회현리 조개무지

회현리 조개무지

[ 金海 會峴里 貝塚 ]

지역 김해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소재한 철기시대조개무지 유적으로, 1907년 8월 일본인 今西龍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시굴된 이래, 1914년 鳥居龍藏, 1915년 黑板勝美, 1917년 鳥居龍藏에 의해 각각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계속되었다. 그 뒤 1920년 浜田耕作·梅原末治, 1934년과 1935년 榧本杜人에 의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성격이 한층 명확해졌다. 현재 부르는 김해 조개무지라는 명칭은 이 조개무지의 처음 발견자인 今西龍이 붙인 것이나, 조선 총독부에서 1933년 8월 27일 사적지로 지정하면서 ‘김해 회현리 조개무지’라고 정식 이름을 붙였다.

이 조개무지는 봉황대의 동쪽 기슭으로 동~서가 긴 표주박형에 가까운 작은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동~서 길이 120m, 남쪽너비 30m, 높이 6m 정도이다. 패각은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집중적으로 두껍게 쌓여 있는 반면, 동쪽과 북쪽 정상부는 얇게 깔려 있다. 과거 발굴조사는 두 정상부 주위를 중심으로 하여 실시되었다. 1920년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패각의 퇴적층위는 상층과 하층의 구별이 뚜렷하였으나, 출토된 유물의 내용면에서는 특별한 시기 차이를 찾지 못하였고, 패각의 종류는 굴·백합 등 34종과 4종의 갑각류(甲殼類)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 골각기, 철기, 석기, 가락바퀴(紡錘車), 유리대추옥, 탄화미, 화천(貨泉), 동물뼈 등 많은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토기는 적갈색토기(赤褐色土器)와 회청색토기(灰靑色土器)의 2종류가 있었고, 토기의 형태에는 항아리, 독,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잔 등이 있는데 대부분 경질로 구워진 것이다. 그리고 토기의 성형기법은 권상법(卷上法)과 윤적법(輪積法)의 2가지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표면처리는 물손질하여 문지르기, 판자나 실을 감은 막대기로 두드리기, 대칼 같은 기구를 이용한 깎아내기 등이 있다. 이 때문에 표면에는 여러가지의 무늬가 시문되어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토기를 ‘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라고 부르기도 한다.

골각기는 사슴뿔이나 뼈 또는 멧돼지뼈를 가공해서 만든 칼자루가 대부분이고, 바늘, 화살촉, 첨두기도 있다. 철기는 칼, 도끼 등이 있으며 석기는 도끼, 반달돌칼, 숫돌 등이 있다. 가락바퀴는 흙으로 만들었으며 그 형태는 주판알과 같다. 탄화미는 교란되지 않은 층에서 발견되었으며, 낟알의 특징은 장폭비(長幅比) 2.0 이하의 단립형(短粒形)에 속하는 것이다. 화천(貨泉)은 중국 신(新)나라 왕망(王莽)이 B.C. 14년에 발행한 것으로, 당시의 대외교섭과 이 유적의 절대연대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34년 12월부터 1개월에 걸쳐 발굴된 무덤들은 이 조개무지의 동쪽 정상부 주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고인돌(支石墓) 1기, 돌널무덤(石棺墓) 5기, 독널무덤(甕棺墓) 3기와 집자리(住居址)가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덮개돌(上石) 아래에 고임돌(支石)이 없는 개석식(無支石式)으로 지하의 유구는 깬돌(割石)로 4벽면을 쌓아 올린 돌덧널(石槨)의 형태였으나 한쪽 벽면이 무너지고 없는 상태였다. 돌널무덤은 모두 납작한 깬돌을 이용하여 만든 상자모양의 것이었고, 유물은 붉은간토기(紅陶) 1점과 간돌화살촉(磨製石鏃) 2점이 있다. 독널은 2개의 토기 아가리부분을 서로 맞댄 이음식(合口式)이다. 출토유물은 대롱옥(管玉) 2점과 세형동검(細形銅劍) 2점, 동사(銅鉈) 8점이 있다. 이들 묘제들은 패각층의 연대 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김해 조개무지는 시기적으로 앞선 매장터와 패각층으로 구분된 2개 이상의 문화층으로 형성된 유적이다.

참고문헌

  • 金海貝塚甕棺と箱式石棺(榧本杜人, 考古學雜誌 43-1, 1957년)
  • 金海貝塚年代에 關한 再檢討(金元龍, 歷史學報 9, 歷史學會, 1957년)
  • 金海貝塚發掘調査報告(浜田耕作·梅原末治, 朝鮮總督府大正 9年古蹟調査報告, 193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