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

장제

[ 葬制 ]

장제(葬制)란 장례(葬禮)의 제도라는 의미이며 상장제(喪葬制) 중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屍身)을 처리하는 절차와 관련된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상례(喪禮)라 함은 죽은 사람의 시신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한 산 사람의 태도와 처리행위의 전반을 가리키는데 장례(葬禮)는 그중 시신을 묻거나, 들이나 나무 위에 놓아두거나,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우거나 하는 시신처리의 방식만을 지칭한다. 장제는 세계의 여러 문화지역(文化地域)에 따라, 그리고 역사의 각 시기에 따라, 실로 다양한 방식이 있어 왔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에 동일한 문화영역 안에서도 장제는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이념에 따라 다양한 방식이 공존해 왔다.

고고학자료상으로 보면 최초로 장례의 절차가 있었음은 죽은 이의 시신을 매장했던 증거로부터 확인된다. 시신을 매장했던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는 인류의 진화단계 상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부터이다. 프랑스의 라페라시(La Ferrassie) 유적에서는 네안데르탈단계의 한 집단 구성원들이 사망하자 같은 공간의 곳곳에 묻어 주었던 예가 있다. 그리고 이라크의 샤니다르(Shanidar) 동굴에서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매장한 시신의 주변에 꽃을 뿌려주었던 예도 있다. 이는 인류의 진화과정을 통해 꾸준히 뇌용량이 증가하고 인지능력이 향상되어 온 결과, 집단 구성원의 죽음에 대해 특별한 관념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추상화(抽象化)의 능력도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은 이의 시신을 그냥 두지 않고 구체적인 행위, 즉 장례의 절차로 처리했던 것이다. 이후 현생인류(現生人類)가 등장하면서 장례는 복잡하고 다양화되며 그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특히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특별한 대우가 나타나는데 러시아의 숭기르(Sungir) 유적에서는 시신에 맘모스 상아를 깎아 만든 구슬로 장식된 옷을 입혔으며, 이탈리아 아레네 칸디데(Arene Candide) 동굴유적처럼 멀리서 운반되어 온 바다조개와 사슴뿔로 장식된 유골도 있었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가 되면 농경취락이 형성되어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게 되며 그에 따라 장례의 절차는 집단화(集團化)되고 체계화(體系化)된다. 특히 마을 가까이에 취락 구성원의 공동묘지(共同墓地)가 따로 마련되어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된다. 농경지의 확보를 통해 생계(生計)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방식이 생겨남으로써 지리적(地理的) 공간(空間)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도 따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집단의 규모가 더욱 증대되고 농경취락들이 여러 개 연결되어 하나의 사회집단을 만들게 되면서 집단 내부의 사회분화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신석기시대 후기의 성숙한 농경사회로 되면서 계급(階級)이 분화되고 사회적 통합과 불평등화가 진행된다. 이에 따라 장례의 절차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개인적․가족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집단 전체의 의식이 되며, 그래서 거대한 집단묘나 규모가 큰 족장(族長)무덤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가 되면 문명이 발생하게 되며 그에 따라 문명의 중심지역과 그 주변의 지역은 정치․사회․이념적인 체계가 서로 차별화되어 간다. 문명의 중심지역에서는 국가의 지배자와 귀족들을 위하여 거대한 고분이 축조되는데, 이집트의 피라밋을 비롯하여 문명의 발생지역에서 보는 거대한 무덤들은 그러한 예에 속하는 것이다. 주변지역에서도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족장(族長)을 위한 무덤이 그 권력을 과시하듯이 큰 규모로 만들어지고, 부장품 역시 화려하고 풍부하게 매납된다. 특히 문명화된 지역으로부터 금속기나 기타 귀한 물품들은 주변지역인 권력자들에게는 권위의 상징물로서 선호되었기 때문에 족장의 장례용품으로 흔히 쓰였던 사례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장제가 고고학 자료로 확인되기는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조개무지에 얕은 구덩이를 파고 묻어준 예가 있으며 울진군의 후포리(厚浦里)라는 유적에서는 해안으로 돌출한 구릉 꼭대기에 잘 깎아 만든 돌도끼 수십 점과 함께 집단으로 장례를 지낸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청동기시대 한국의 장례 방식은 다양한 묘제와 함께 매우 다양화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특히 족장을 위한 특별한 장제가 발생했음이 분명하고, 가족장이 아니라 공동체의 장례가 빈번히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거대한 고인돌의 축조는 공동체에서 행한 특별한 장례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며 사천 이금동(梨琴洞)이나 창원 덕천리(德川里) 유적의 거대한 묘역은 무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례 당시나 장례가 끝나고 난 후 의례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게 제기된다.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이후 한국 고대의 장제는 고고학자료로도 확인되지만 문헌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3세기대까지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예(濊), 옥저(沃沮), 삼한(三韓) 등 동이(東夷) 제족속(諸族屬)의 장제(葬制)는 중국 사가(史家)들에 의해 관심 있게 다루어지고 『삼국지(三國志)』와 같은 사서에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내용으로 잘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왕이 죽으면 백 여 명까지 순장(殉葬)하고 옥갑(玉匣)을 입혀 장사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는 장사를 후하게 지내며 돌무지무덤(積石塚)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옥저는 2차장(二次葬)을 지내는데 가매장했다가 육탈(肉脫)이 되면 뼈만 추려 큰 가족용 나무덧널(木槨)에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한(馬韓)지역에는 널을 쓰지만 덧널은 쓰지 않는다 하고 소나 말은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장사지낼 때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변․진(弁․辰)지역에서는 널에다 큰 새의 깃털을 넣어주는 풍습이 있다고 전한다.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동이(東夷) 제 지역의 분묘는 규모나 부장품 등에서 선사시대(先史時代) 분묘(墳墓)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도처에서 왕묘(王墓)를 정점(頂點)으로 하여 일정한 차등이 주어지는 귀족(貴族)들의 무덤이 대규모로 축조되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고총고분(高塚古墳)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사회의 진화속도가 가장 빨랐던 지역인 부여와 고구려지역에서는 아무래도 왕묘의 등장과 고분문화의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부여는 한대(漢代) 무덤의 영향으로 규모가 큰 목곽분이 발전하였고, 고구려는 초기의 돌무지무덤과 후기의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문헌상으로 부여는 후장(厚葬)을 하였고 상장제를 매우 중요시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수서(隋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삼국의 다른 나라보다 장례의 절차에 대해 상세히 기록된 편인데,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고 3년 뒤에 장사를 지낸다거나 3년 혹은 3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다거나, 죽은 사람의 물건을 장례가 끝나면 다투어 가져갔다는 등등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백제는 다양한 석축 혹은 토축분구묘(土築墳丘墓)로부터 시작하여 백제 중앙 지배층의 무덤이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으로 축조되면서 지방의 하위고분으로까지 확산된다. 신라와 가야의 묘제는 함께 덧널무덤(木槨墓)으로부터 출발하여 발전되어 갔다.

신라(新羅) 지배층(支配層)의 묘제는 경주 시내에 있는 거대한 왕묘로부터 그 주변에 분포하는 고총무덤들을 중심으로 파악되는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무덤 형식이 최고위계의 묘제로서 축조된다. 이 무덤은 거대한 덧널(木槨)의 주위와 상부로 엄청난 양의 돌무더기를 쌓아 돌무지봉분을 조성하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방식으로 축조된 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거대한 규모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형분도 있고 작은 무덤은 주로 돌덧널이 쓰인다. 가야의 제국에서도 왕묘로부터 일반인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고분이 축조되었다. 왕묘나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만이 매장시설로 쓰인 것이 특징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각국의 장제는 나름대로의 강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말한 분묘의 구조나 그 밖의 장례절차에 따라서도 차이점이 생긴다. 부장품을 보면 신라의 지배층 무덤에서 가장 많고 화려한 유물이 나오며 가야의 왕묘가 그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백제의 왕묘에서는 호사스럽긴 하지만 양적으로는 신라나 가야를 따르지 못하는 편이다. 고구려의 무덤은 도굴이 심해서인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부장품이 극히 적은데 『수서(隋書)』 고구려전(高句麗傳)의 기록처럼 죽은 사람의 물건을 장례 후 나누어준 풍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배층 무덤은 다른 삼국에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할 수준으로 무덤의 실내를 벽화로 장식하였으며 죽음에 대한 산 사람의 극진한 예우를 읽을 수 있다.

삼국시대 후기가 되어 삼국의 무덤에 공통적으로 채용되는 굴식(橫穴式) 무덤들은 추가장(追加葬)을 전제로 한 묘제(墓制)이다. 하나의 무덤방에 죽은 시점이 서로 다른 여러 사람을 장사지내는데, 이것은 순장하고는 성격이 다른 장제이며, 한 무덤방에 매장된 사람들은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골을 보면 반드시 굴계의 무덤이 아니더라도 추가장을 하였던 예가 있으며, 또한 여러덧널식(多槨式) 무덤이라는 방식으로 여러 매장시설을 하나의 묘역에 배치시켜 장사 지낸 사람들간의 관계를 표시하는 예가 많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장제의 성립은 2가지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는 삼국 후기의 무덤 매장시설 만큼은 추가장이 가능한 돌방무덤으로 통일되어 갔는데, 이러한 과정이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더욱 단일한 민족의 장제문화로 전승되어 갔다. 둘째로는 무열왕릉(武烈王陵)으로부터 신문왕릉(神文王陵)을 거쳐 경덕왕릉(景德王陵)과 성덕왕릉(聖德王陵)에 이르는 기간 중에 완성된 능묘(陵墓)의 기본형이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계승되면서 발전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봉분(封墳)의 기부(基部)에 깬돌(割石)로 쌓은 둘레돌(護石)을 돌리다가 점차 십이지상(十二支像)이 부조된 다듬은 판돌(板石)을 이용하고 약간 거리를 두고 석조난간을 돌리게 된다. 성덕왕릉(聖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과 원성왕(元聖王)의 능으로 알려진 괘릉(掛陵) 등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십이지상의 둘레돌을 돌린 봉분과 묘전(墓前)에 문인(文人)과 무인(武人)의 석물(石物)을 세운 완비된 형식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걸쳐 호족이나 사대부의 무덤을 비롯하여 일반인의 무덤들도 고고학 자료로 자주 확인되지만 고고학의 관점에서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 왕릉은 그 내부시설이 돌방무덤이며 통일신라시대에 정비된 둘레돌을 돌리고 묘전(墓前) 석물(石物)을 배치한 것이다. 왕릉의 내부는 상자모양의 돌방이며 다듬은 석재로 축조하고 회칠한 후, 천장에는 일월성신도(日月星辰圖)를 그리고 4벽(四壁)에는 사신도(四神圖)와 십이지신도(十二支神圖)를 그린다. 이와 같은 왕릉의 기본형은 조선 초까지는 이어지나 세조(世祖) 때부터 왕의 유언에 의해 무덤구덩이(墓壙)를 파고 널(棺)을 내린 뒤 회를 채운 회격묘(灰隔墓)로 된다. 고려시대의 무덤으로 벽화가 그려진 돌방무덤이 확인된 예가 있어 귀족의 무덤은 돌방무덤이나 벽화돌방무덤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나 일반인의 무덤은 나무널을 넣고 회곽(灰槨)을 두른 무덤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고 때로는 회곽 대신 목탄곽(木炭槨)을 사용하는 예도 있다.

참고문헌

  • 삼국시대의 고분(이성주, 한국의 문화유산, 문화재보호재단, 1997년)
  • 옛무덤의 사회사(장철수, 웅진출판, 1995년)
  • 百濟石室墳硏究(李南奭, 學硏文化社, 1995년)
  • 新羅古墳硏究(崔秉鉉, 一志社, 1992년)
  • 고분(김기웅, 대원사, 1991년)
  • 古墳出土 副葬品硏究(尹世永, 高麗大學校出版部, 1988년)
  • 新羅の陵墓の考察(齊藤忠, 朝鮮學報 119, 1986년)
  • 伽耶古墳의 編年硏究(李殷昌, 韓國考古學報 12, 韓國考古學會, 1982년)
  • 韓國壁畵古墳(金元龍, 一志社, 19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