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

괘릉

[ 慶州 掛陵 ]

지역 경주

토함산 남서쪽에 마주 보이는 산 아래쪽의 낮고 편평한 구릉상에 위치해 있는 고분으로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변의 왼쪽에 있다. 이곳은 경주 시내에서 약 12㎞ 떨어진 곳으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가운데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을 제외하면 경주 중심부에서 가장 먼 거리에 축조된 것이다. 괘릉(掛陵)은 ‘능을 걸다’라는 뜻인데, 조선시대 경주부에서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의 내부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봉분은 크기는 저경, 높이가 21.9×7.5m의 원형봉토분이다. 봉분의 하단에는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돌(護石)이 1.4m 높이로 설치되어 있다. 이 둘레돌은 목조건축의 석조 기단과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길이, 높이가 1.2×0.95m 정도 크기의 판석을 세워 연결하고 갑석(甲石)을 올린 것이다. 각 면석(面石) 사이에는 면석보다 튀어나오게 탱석(撑石)을 배치하였는데, 이 탱석은 그 뿌리가 봉분의 내부로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탱석의 2칸 건너 하나씩에는 무복을 입고 무기를 쥐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다. 이 십이지신상은 신라의 것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이름나 있다. 왕릉의 둘레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깔아 회랑을 돌렸고, 이 회랑의 가장자리에 높이 1.7m 정도의 석주(石柱)를 세워 돌리고 석주 사이사이에 돌로 만든 살대를 끼운 석난간(石欄干)을 설치하였다. 석주는 모두 25개로 그대로 남아 있으나 난간 살대는 거의 망실되어 새로 마련한 것이다. 봉분의 내부에는 돌방(石室)이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사각형의 석상인 혼유석을 설치하였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동서로 약 25m의 간격을 두고 봉분쪽에서부터 석사자(石獅子) 2쌍, 관검석인(冠劍石人) 1쌍, 서역인(西域人) 모습의 석인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차례로 서로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 역시 신라 조각품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며 당당하고 치밀함이 돋보인다. 그리고 서역인 모습의 석상은 매부리코에 주걱턱의 턱수염을 가진 것으로 아라비아 계통의 상인으로 추정되어 통일신라의 국제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역인의 모습은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土俑)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괘릉은 가장 완비된 통일신라의 능묘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를 통해 당의 능묘제도를 본받아 이루어진 것이나 십이지신상과 석사자를 배치한 것은 신라인의 창작으로 알려져 있다. 능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따로 조각하여 배치한 전(傳)성덕왕릉의 형식에서 발전하여 탱석에 직접 조각한 것으로 9세기대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능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성왕은 신라 제38대왕으로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선발하고, 벽골제를 증축한 바 있다.

원성왕의 능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원성왕조에는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擧柩燒於奉德寺南)”고 했고,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조에는 “원성왕릉은 토함산 서쪽의 곡사, 곧 지금의 숭복사에 있다(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고 했는데, 괘릉 인근의 외동읍 말방리에 숭복사터가 있으므로 이를 원성왕릉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숭복사터가 정확히 토함산의 남쪽에 있으므로 이 능을 원성왕릉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어서, 토함산의 서쪽에 있는 전(傳)성덕왕릉이 원성왕릉이고 이 능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제형산 서북에 장사지냈다(葬于弟兄山西北)”고 전하는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839)의 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능의 일대 22,800평이 1963년 1월 21일 사적 2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참고문헌

  • 新羅五陵(姜仁求 外,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