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강동 고분

용강동 고분

[ 慶州 龍江洞 古墳 ]

지역 경주

경주분지의 동북쪽에 위치한 소금강산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는 구릉의 서사면과 이 구릉의 동편에 계곡을 두고 남북으로 뻗는 능선의 서사면에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것이 용강동 고분군으로, 경주에서 포항방면으로 나가는 출입구의 우측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한다. 여기에 분포하는 고분들 가운데 현재 봉토가 확인되는 것은 14기 정도이며 주변에는 봉토분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의 남서쪽 경주분지의 평지에서는 1기의 돌방무덤(石室墳)이 발견되어 1986년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 의해서 발굴 조사되었는데, 이것이 용강동 돌방무덤으로 인물도용(人物陶俑)과 청동십이지상(靑銅十二支像)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그리고 용강동 고분군의 북편 말단부에 1991년 근화여중고가 들어서게 되어 효성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이 부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용강동 돌방무덤은 경주시 용강동 1130번지 밭 가운데인 평지에 위치한 폐고분으로 ‘개무덤’, ‘고려장’으로 불리던 무덤이다. 고분은 외형으로 보아 왕이나 최고 위계의 귀족급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조사결과 복원한 봉분은 크기가 저경 16m, 높이 3m인 원형봉토분으로, 봉토의 하단에는 깬돌(割石)을 1.5m의 높이로 쌓은 바깥둘레돌(外護石)열을 돌렸고, 이것과 3m 간격을 두고 안쪽에 안둘레돌(內護石)열을 70㎝ 높이로 쌓아 돌려 2중의 둘레돌을 가졌다. 그리고 주변에는 다수의 석재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바깥둘레돌 시설은 원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을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덤방(石室)은 남벽의 중앙에 널길(羨道)을 단 중앙널길식으로 평면은 정방형(正方形)이다. 널방(玄室)은 네 벽을 모두 장방형(長方形)의 깬돌로 정연하게 쌓았는데, 내부에 설치된 주검받침대(屍床臺)의 높이부터 내경(內頃)하게 쌓아 활모양(穹窿狀)을 이루고, 위에는 2매의 판상석을 연결해 덮어 마무리하였다. 널방의 벽면 틈새에는 회를 칠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널방의 크기는 동~서 2.6m, 남~북 2.5m, 높이 2.8m이다. 주검받침은 서벽과 북벽에 붙여 동-서 장축으로 놓았는데, 벽 쪽을 제외한 가장자리는 편평한 깬돌로 쌓고 그 내부는 냇돌(川石) 또는 깬돌을 채우고 상면에 점토를 두텁게 바른 다음 회칠을 해서 마무리했다. 주검받침의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2.25×1.7×0.4~0.5m이다. 널길은 깬돌로 양 벽을 쌓은 뒤 틈 사이를 회로 바르고, 천장에는 3매의 깬판돌로 마무리했다. 널방는 미석 앞을 1매의 판석으로 막고 입구까지 깬돌이나 냇돌을 가득 채워 밀폐시켰는데, 그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1.5×1.0×1.2m이다.

널방 안에서는 사람의 치아와 함께 토용(土俑) 28점, 토마(土馬) 4점, 청동십이지상 7점, 토기 13점, 구슬, 돌베게(石製頭枕), 발받침(足座), 어깨받침(肩座) 등 모두 64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물토용(人物土俑)은 전신상을 흙으로 빚어 만든 뒤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채색한 것으로 높이는 12∼22㎝ 정도이다.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토용들에 비해 아주 사실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남자상이 15점, 여자상이 13점이다. 남자상은 모두 머리에 복두를 쓰고 있고 홀(笏)을 잡은 문인상, 홀을 잡고 턱수염이 마치 서역인(西域人)처럼 텁수룩하게 표현된 문인상, 그리고 두 사람이 마주보고 대련하는 모습의 무인 태견상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인상은 모두 두 손을 모아 상대방을 공경하는 모습으로 제작되었는데,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었다.

청동제십이지신상(靑銅製十二支神像)은 얼굴은 동물의 모습이나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상반신을 벗은 채 두 팔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형태이며, 허리에는 허리띠와 허리가리개(腰甲)를 두르고 있는데 겹쳐 내린 옷이 등과 함께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십이지신상은 다른 왕릉의 둘레돌에 조각된 모습과는 차이가 있고, 무덤 내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와 같은 인물토용과 청동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와 당나라와의 문물교류관계를 잘 설명해 주며, 지증왕 때 순장이 금지되면서 무덤에 토용의 매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므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무덤의 축조연대는 신라에서 십이지의 발생, 인물토용에 나타나는 복식의 형태 등으로 미루어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치는 통일신라 전성기로 추정된다. 또한 인물토용에 나타나는 복식의 색깔이 보라색이 아닌 붉은색이고 문인이 잡고 있는 홀이 상아홀로 여겨지는데,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보아 육두품에 해당되므로 무덤의 주인공은 그보다는 높은 신분인 진골 이상의 귀족이거나 왕족으로 추정된다. 고분과 주변 507평이 1989년 1월 9일 사적 제32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한편 효성여자대학에 의한 발굴에서는 저경 17m, 높이 3∼4m 내외의 대형분 3기, 저경 10m 내외의 중형분 15기의 봉토가 남아 있는 고분들과 87기의 봉토가 남아 있지 않는 고분들이 조사되었다. 조사된 고분들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으로 구분이 되는데, 봉토가 남아 있던 고분들은 대부분 굴식돌방무덤이었다. 이 고분들은 고신라 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참고문헌

  • 慶州市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嶺南埋葬文化財硏究院·慶州市, 1996년)
  • 慶州 龍江洞 古墳의 硏究(李殷昌·姜裕信, 古文化 41·42合輯, 韓國大學博物館協會, 1992년)
  • 慶州龍江洞古墳發掘調査槪報(趙由典·申昌秀, 文化財 19, 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