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미술

인상주의미술

[ Impressionism art , 印象主義美術 ]

요약 19세기 후반, 주로 1860∼18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상의 주의.
특등석

특등석

원어명 art de l Impressionnisme

인상주의미술을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쳤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뉘앙스의 미묘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빛의 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直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상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아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상의 인상파가 성립된 것은 1860년의 파리에서였다. 종래의 아카데믹한 작풍에 불만을 느낀 몇몇의 개성적인 청년작가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이미 1857년경부터 피사로, 세잔, 기요맹이 차례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제작하였고, 같은 무렵 바질·모네·르누아르·시슬레 등도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서로 우정을 맺었다. 이 중 모네는 '아카데미 스위스'에도 출입하여 이들 7명의 화가들은 곧 지기(知己)가 되어 매주 목요일에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새로운 회화에 관해 열심히 토론하였다. 이곳에는 그들 외에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 졸라와 그 밖에 시인·평론가들도 모였다. 그들은 1863년 낙선화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으로 혹평을 사고,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로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혁신화가 마네를 그들의 수령으로 받들고 밝고 대담한 새로운 회화관으로 해서 크게 계발(啓發)되었다.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이 카페 게르부아의 모임을 자연 해산시켰으나, 모네·피사로·시슬레 등이 전쟁을 피하여 런던으로 가서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대 풍경화파의 외광표현(外光表現)을 접한 사실은 벨라스케스·고야·들라크루아 등, 인상파적 기법을 선구적으로 이미 실천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운동의 개화(開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후(戰後)에 각각 파리로 돌아와, 1874년 봄 나달의 사진관에서 이 파의 첫 전람회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라는 풍경화의 제명(題名)을 따서 르루아라는 한 미술기자가 '인상파전람회'라고 하는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에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이 그룹전은 세상의 몰이해와 싸우면서 1886년까지 전후 8회에 걸쳐 열렸는데, 1877년의 제3회전부터는 그들 자신도 '인상파'라는 명칭을 사용할 만큼 이 명칭은 일반화되었다.

이 인상파 그룹과 8회에 걸친 그들 전람회의 경과는 물론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마네는 처음부터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룹의 유력한 작가들이 전람회에 참가한 횟수를 보아도 8회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한 사람은 피사로 단 한 사람뿐, 그 밖의 드가와 모리조는 7회, 기요맹이 6회, 모네와 고갱이 5회, 시슬레와 르누아르가 4회, 세잔은 2회에 불과했다. 쇠라·시냐크·르동 등은 겨우 마지막 전람회에 등장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소수 화가들의 12년에 걸친 악전고투의 인상파운동이 그다지 통일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평(世評)이 호전된 그 시점에서 이전부터 다소 난맥상을 보여 왔던 그들의 공통적 사고와 그룹으로서의 결속은 무너져, 제8회전의 성공 후 각자 자기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인상파화가들은 재능과 기질면이 서로 다르듯이, 화풍에 있어서도 결코 한결같지 않았다. 모네·피사로·시슬레 등이 그 중에서도 인상파의 작풍을 가장 잘 나타낸 작가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역시 시기에 따라 화풍이 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상파화가들이 유형적인 아카데미즘에 반항하고 어떤 관례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밝고 미묘한 대기(大氣)의 인상을 묘사하는 데 전념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나타낸 예로서 그들은 앞서 든 화가들 외에도 부댕이나 용킨트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법상의 특색에서도 얻는 바가 많았고, 선명한 색채감이나 유동적인 구도를 보여 주는 일본의 풍속화(우키요에)에서도 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外光派)'로서 언제나 옥외(屋外)에서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 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고유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色)에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부분에도 명도(明度)가 낮은 색채, 파랑이나 보라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색조(色調)의 분할이라든가 색채의 병치(竝置)라고 하는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고안하였다. 빛의 광휘(光輝)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수색(純粹色)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視神經)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수색(특히 補色관계에 있는 색끼리)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 위에서 혼연히 융합되고(시각혼합작용),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의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함을 간직하기 때문이었다. 신인상파(新印象派)는 인상파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원리를 더욱 철저화한 데서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