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살롱

[ salon ]

요약 객실이나 응접실.
샹보르성 살롱

샹보르성 살롱

복수형 salons은 사교계를, 대문자로 시작되면 미술전람회나 자동차 전시회 등을 가리키고, 또 다과점이나 미장원을 가리키는 데도 쓰이지만 문학사에서는 특히 17∼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성행되던 귀족과 문인들의 정기적인 사교모임을, 미술에서는 살아 있는 화가나 조각가들의 연례 전람회를 가리킨다.

⑴ 귀족 부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자기 집 객실을 문화계 명사들에게 개방, 식사를 제공하면서, 문학이나 도덕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과 작품 낭독 및 비평의 자리를 마련하던 풍습. 즉, 살롱은 중세 유럽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싹튼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본격적인 살롱은 역시 개성의 자유와 여성 지위의 향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르네상스기(期)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에서 17세기 초에 꽃피었다. ‘대화의 정신’이 어느 국민보다도 투철한 프랑스의 국민성과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나는 종교전쟁을 거쳐 거칠어진 귀족들의 기질을 우아한 여성들과의 사교로 누그러뜨리면서, 예절과 말씨를 세련시키고자 프랑스왕 앙리 4세가 궁정 안에 살롱을 개최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살롱은 궁정으로부터 귀족들의 저택으로 옮아갔으며, 이탈리아 출신인 랑부예 후작부인이 열던 살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재상 리슐리외를 비롯한 정치가들과 말레르브나 코르네유 등의 시인이 그 단골 손님이었다. 이 밖에도 사블레 부인, 스캬롱 부인, 스퀴데리 양 등의 살롱이 유명했다. 사랑 ·정념 ·재능 ·명예 ·야심 등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들을 즐겨 화제로 삼아 생각과 말을 세련시키던 살롱은, 모랄리스트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어 잠언 ·인물묘사(포르트레) 같은 독특한 문학 장르를 낳음으로써 명석함과 절도가 특징인 고전주의 문학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라로슈푸코의 《잠언》, 라퐁텐의 《우화시》는 그 직접적인 소산들이고, 레스의 《회상록》, 세비네 부인의 《서간집》, 라파예트 부인의 《콜레브공(公) 부인》 등도 살롱이 낳은 특이한 작품들이다.

한편 살롱의 세련 취미는 때로 그 도를 넘어섬으로써 이른바 프레시오지테(선멋)로 흘러 몰리에르의 《선멋 부리는 여자들》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18세기에는 랑베르 부인, 탕생 부인, 조프랭 부인, 에피네 부인 등의 살롱이 유명했으나, 신흥계급인 부르주아층 부인들도 차차 살롱을 열기 시작했고 또 남성이 주최하는 살롱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그 화제도 과학사상과 합리정신을 통한 계몽시대에 발맞추어 철학 ·과학 ·정치 등으로 뻗어나가,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 등이 그 중심인물을 이루게 된다. 19세기부터 살롱은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대중적인 카페의 보급과 저널리즘의 발달 탓이기도 하지만, 살롱은 문학 동호(同好) 클럽으로 되돌아가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탈 부인이나 레카미에 부인의 살롱은 여전히 당대 문학활동의 온상이 되어서 프랑스 문학과 살롱생활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더구나 살롱을 통해 싹트고 가꾸어져온 대화와 사고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프루스트 등의 문학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⑵ 처음에는 문인들과 함께 미술가들도 모여 그 작품을 공개, 감상 비평하던 것이, 나중에는 많은 작가들이 출품하는 정기적 미술전람회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대표적인 살롱으로는 ‘살롱데쟁데팡당(Salon des Indépendants)’ ‘살롱데튈르리(Salon des Tuileries)’ ‘살롱드메(Salon de mai)’ ‘살롱도톤(Salon d’automne)’ ‘살롱데레알리테누벨(Salon des réalités nouvelles)’ 등이다. ‘살롱데쟁데팡당’은 관선 단체인 ‘프랑스 미술가협회’에서 해마다 5∼6월에 열리는 살롱의 아카데미즘에 불만을 품은 진보적 미술가들이 1884년에 ‘독립미술가협회’를 조직, 무감사제의 전람회로서 출발한 것으로 해마다 봄에 열린다. 1923년에 창설된 ‘살롱데튈르리’는 매년 가을에 열리며, 루오 ·블라맹크 ·뷔페 등이 그 출품작가이다.

매년 5월에 열리는 ‘살롱드메’는 항독(抗獨) 운동에서 싹터 1945년에 제1회전을 가졌으며,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비롯한 전위작가들이 모이는 초대전으로 마티스 ·로트 ·비용 같은 대가들도 출품해왔다. 가을에 열리는 ‘살롱도톤’은 1903년에 비롯되어 야수파 ·입체파의 온상이 되었으며, 그림 외에도 조각 ·건축 ·판화 ·무대장식 등의 부문도 들어 있다. 브라크 ·피카소 ·마르샹 등이 출품했던 곳이기도 하다. ‘살롱데레알리테누벨’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추상파 미술가들의 전람회로 외국 작가들도 참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1667년에 콜베르가 기획해 팔레롸얄의 안마당에서 생존 작가들의 그림을 일정 기간 동안 전시한 것이 최초의 살롱이다. 아카데미 주최의 이 전람회는 1697년에 루브르궁의 그랑 갈르리로 옮겨졌으며 루이 14세 치하에 10회 가량 열렸으나 출품이 부진해 명맥만 이어오다가, 루이 15세 치하인 1725년에 이르러 루브르궁의 살롱 카레에서 본격적인 관전(官展)으로 부활, 1737년 이후 본궤도에 오르면서 대규모 살롱으로 발전하여 1773년까지 전후 25회를 거듭함으로써 미술발표기관으로서의 살롱의 기능을 확립해 놓았다. 1789년의 대혁명을 계기로, 살롱은 그 민주화가 선언되는 등 기구나 장소의 변천은 있었으나, 미술가들과 시민을 맺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서 19세기 중엽 이후까지 존속되어 근대적인 미술비평의 온상 구실을 함으로써 그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 하겠다.

그러나 엄격한 심사제를 견지한 살롱의 관료적인 아카데미즘은 진보적인 미술운동을 외면함으로써 미술 발전의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비난도 사게 되어, 마침내 1883년에는 출품자 중에서 뽑힌 90명이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개편, ‘프랑스 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Français)’의 살롱으로 변신되어 매년 봄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만족하지 못한 진보파들은 다시 1884년에 ‘독립미술가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를 조직하고 무감사제인 ‘살롱데쟁데팡당’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