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극

신파극

[ 新派劇 ]

요약 현대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를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

한국 신파극운동의 흐름을 보면, 시대적 조건과 연극 여건에 따라 성쇠의 굴곡이 발생부터 소멸까지 40여 년 동안 세 번 나타난다. 1910년대 초 ·중반과 1930년대 중 ·후반, 그리고 1947∼1948년이다. 1910년대에는 새로운 양식의 신파극이 처음 들어와 붐을 이루었고, 1930년대에는 동양극장 건립, 광복 직후는 사회적 혼돈상태와 문화정책 부재 때문이었다. 한국 신파극은 일본 신파극을 직수입한 것이기 때문에 초창기 신파극은 언어만 달랐을 뿐 연극내용부터 무대장치 ·의상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극 양식이 일본색 그대로였다. 일본 신파극의 발전 순서처럼 한국 신파극도 군사극이 성했다. 최초의 신극단인 혁신단은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여 권선징악 ·풍속개량 ·민지(民智) 개발 ·진충갈력(盡忠竭力) 등의 표어를 내세웠고, 처음에는 개화계몽이라는 큰 시대의식 아래서 연극 운동을 펴나가려 했다.

군사극이 쇠퇴하면서 《육혈포강도》 같은 탐정극과 《우정 3인 병사》 등과 같은 의리인정극이 많이 나왔지만, 이상의 모든 것이 한데 얽힌 가정비극이 주가 되었다. 조중환 작 《장한몽》 《불여귀》 《쌍옥루》, 이해조 작 《봉선화》 《비파성》 등은 가정비극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소설 번안극 이외에 《송죽절》 《수전노》 《가련처자》 등 의리와 인정, 살인과 복수, 애정과 증오가 뒤얽힌 가정비극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당시의 신파극단들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정비극소설 《장화홍련전》 《심청전》 《사씨남정기》 등의 작품을 즐겨 공연하였다. 이처럼 초기 신파극은 신(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소설에로 복귀하여 선악의 대립만 드러내었고, 이러한 문제는 가족관계와 직결되었다. 그것도 새로운 풍속개량 측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개화의 충격에 의한 구질서와 신질서의 갈등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질서에 대한 긍정적 인정으로 악의 징벌을 유발하는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 들어와 근대적 자각이 한국 민족에게 광범위하게 일어나자 신파극은 발붙일 곳을 잃었다. 그래서 개량신파를 들고 나온 이기세의 예술협회나 윤백남의 민중극단은 창작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윤백남 작 《운명》, 이기세 작 《희망의 눈물》 《눈오는 밤》, 김영보 작 《정치삼매》 《시인의 가정》 등이 그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 레퍼토리가 개량은 되었지만 신파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5년 동양극장이 설립되고 몇 개의 전속극단과 기타 많은 신파극단이 조직되어 신파극이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하자 전문적인 신파극 작가가 많이 등장했다. 이서구를 비롯하여 박진 ·이운방 ·송영 ·임선규 ·김건 ·최독견 ·김영수 ·박영호 등의 작가가 데뷔했다. 그 당시 주제로 시대극과 가정비극, 화류비련극 등이 주를 이루었고, 창작극이 아니면 이광수 ·박종화 같은 현대작가들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왜색을 완전히 탈피하였다. 사극은 《단종애사》와 같은 소설의 각색물과 《김옥균전》 《황진이》 등 역사상 인물을 극화한 것이 많았고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가정비극이 많았으며 인기도 있었다. 1930년대 신파극에서 가정비극이 많았던 것은 1910년대와 일맥상통하며 이것은 신파극이 가진 속성(屬性)이기도 하다. 광복 직후도 동양극장시대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사극과 가정비극이 가장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