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한문학

다른 표기 언어 漢文學

요약 한자로 표기된 문학 또는 그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 한문학은 중세를 대표하는 양식이다. 시(詩)와 문(文)으로 나누어진다.

목차

접기
  1. 개념과 특성
  2. 범주와 갈래
  3. 한국의 고대 한문학
    1. 삼국시대
    2. 남북국시대
  4. 고려시대 한문학
  5. 조선시대 한문학

개념과 특성

중세는 문화적 보편주의를 추구했던 시대로 동아시아의 한국·중국·일본·베트남은 중국어의 표기문자인 한자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한자문화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 한문학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수준을 높이는 한편 주체성을 지키려 애썼으며 우리나라의 민족 정서와 사상을 표현했다. 이때문에 한민족의 중국문학과 구별되며 한국문학의 큰 범주 안에 속한다. 풍부한 한문학 유산은 새로운 문학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범주와 갈래

한문학은 문학·역사·철학이 갈라지지 않았던 시대의 양식으로, 문학을 시·소설·수필·희곡·평론으로 나누는 근대 이후의 순문학 범주를 넘어선다.

전통적으로 글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미문 의식과 글에는 올바른 도리를 담아야 한다는 재도지문의 의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문학은 크게 시(詩)와 문(文)으로 나누어진다. 갈래를 나누는 것은 위(魏)나라 조비의 〈전론 典論〉 논문편에서 비롯되었다. 청나라 요내는 〈고문사유찬 古文辭類纂〉에서 사부류·논변류·서발류·주의류·서설류·증서류·조령류·전장류·비지류·잡기류·잠명류·찬송류·애제류의 13가지로 나누었다.

〈동문선 東文選〉에 실린 작품의 종류를 보면 한국 한문학의 갈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사부류·전장류·잡기류 같은 문과 소설이 한국 한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의 고대 한문학

삼국시대

한국 한문학은 삼국시대 이전에 시작되어 한말에 이르러 역사적 생명력을 잃었다. 고조선과 한사군 때 이미 한자를 사용한 것 같지만, 작품은 고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는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만이 전한다.

한자를 공식 기록문자로 삼은 것은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로 전환하여 불교를 승인하고 학교를 세워 유학을 권장한 시기 이후이다. 나라가 정비되면서 자부심을 나타내기 위한 비문을 지었는데, 고구려의 〈광개토왕비〉가 대표적이다. 고구려는 〈유기 留記〉 100권을 간추린 〈신집 新集〉 5권을, 백제는 〈서기 書記〉 50권을 엮었으며, 신라는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주변 국가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표(表)와 같은 외교문서가 중시되면서 신라의 강수와 같은 인물이 알려졌다.

백제 성충의 〈옥중상서 獄中上書〉와 신라 김후직의 〈간렵문 諫獵文〉은 왕에게 간언한 글이다. 시 작품은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 가락국 건국신화에 삽입된 〈구지가 龜旨歌〉, 신라 진평왕 때의 〈비형사 鼻荊詞〉, 진덕여왕의 〈태평송 太平頌〉 등이 있다.

남북국시대

신라가 남쪽에서 고구려·백제를 통일했을 때 고구려 유민이 북쪽에 발해를 세우면서 남북국시대가 전개되었다. 발해문학은 자료가 적지만, 해동성국이라 일컬어졌고 당나라 빈공과에서 신라와 우열을 다투었던 만큼 수준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국지장편 渤海國志長編〉 등에 발해 사신의 시로 양태사의 〈야문도의 夜聞擣衣〉, 왕효렴의 〈춘일대우정자 春日對雨情字〉가 전한다.

통일신라는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를 만들었는데, 과목으로 오경과 〈논어〉·〈효경〉·〈문선〉을 택했다. 〈문선〉의 선택은 글을 아름답게 꾸미고 4·6변려문을 많이 짓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고려 중기 당·송의 시문이 성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당나라에서 활동한 시인 설요의 〈반속요 返俗謠〉, 왕거인의 〈분원시 憤怨詩〉가 〈전당시 全唐詩〉에 실려 있다.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신라인은 58명인데, 신라말에 이름을 떨친 최광유·최승우·박인범·최치원은 6두품 출신이다. 이들은 나말여초의 시풍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 한문학의 확립자인 최치원의 〈제가야산 題伽倻山〉·〈강남녀 江南女〉가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등에 전한다. 최치원의 〈등윤주자화사상방 登潤州慈和寺上房〉, 박인범의 〈경주용삭사각 涇州龍朔寺閣〉, 박인량의 〈사송과사주구산사 使宋過泗州龜山寺〉는 빈공제자의 3시로 이름이 높았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와 같은 불경 주소는 해외에까지 알려졌다. 설총이 신문왕에게 간언한 〈화왕계 花王戒〉는 의인문학의 효시로, 고려의 가전체와 조선시대의 〈화사 花史〉에 영향을 주었다.

화랑의 전기인 〈화랑세기 花郞世記〉는 김대문이 지었다 하나 현전하지 않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최초의 여행기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四山碑銘〉·〈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이 유명하며, 최치원이 지었다는 〈신라수이전 新羅殊異傳〉의 내용 일부가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에 전한다. 〈호원 虎願〉·〈최치원 崔致遠〉·〈수삽석남 首揷石枏〉은 창작성과 수식이 가미된 전기 작품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한문학

고려시대의 문학은 무인란을 기점으로 전기의 귀족계층 문학과 후기의 사대부계층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유미주의의 귀족문학이 지속되고 한시가 융성했는데, 이자연·김부식의 가문에 의한 문벌문학이 발달했다. 최언위·박인량 등 신라말 빈공과 출신의 활약, 광종 때의 과거제 이후 진사과 출신의 우대, 신하들과 창화시(唱和詩)를 주고받은 예종·의종의 문학 애호,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12공도의 사학(私學) 출현, 예종의 국학(國學) 진흥과 같은 학교제도의 발달은 한시 융성의 바탕이 되었다.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의 상소를 올린 최승로는 〈대인기원 代人寄遠〉에서 애국적 심정을 읊었다.

김황원은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 일컬어졌지만 완전한 작품이 전하지 않고, 곽여의 〈동산재응제시 東山齋應製詩〉는 예종에게 화답한 것이다. 만당체(晩唐體)를 터득했다는 정지상의 〈송우인 送友人〉·〈송인 送人〉은 풍부한 서정성과 감각적 표현으로 극찬된다. 김부식의 〈결기궁 結綺宮〉·〈군막우음 軍幕偶吟〉은 고사를 인용한 직설적 표현의 시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설화집으로 추측되는 박인량의 〈수이전 殊異傳〉은 전하지 않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온달 溫達〉·〈도미 都彌〉는 전기적(傳奇的) 요소가 풍부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무인란 이후 한문학의 새로운 경향은 하층민의 억압된 삶을 소재로 한 애민시, 몽골 항쟁의식의 소산인 영웅서사시, 선승들의 불교시, 사부의 등장과 시화집(詩話集)의 창작, 가전문학의 발생이다.

특히 무인집권기에는 이인로·임춘·오세재 등 죽림고회의 문인들이 주목된다. 신진사류인 이규보는 김극기의 〈전가사시 田家四詩〉와 진화의 〈도원가 桃源歌〉를 이어 애민시의 전통을 이루었다. 이규보의 영웅서사시 〈동명왕편〉과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대표적 서사시이다. 원나라 지배하에 성장한 신흥사대부들은 향리 출신의 신진사류에 맥을 잇고 있으며 성리학을 바탕으로 진보적인 문학을 전개했다. 이제현은 변려문을 벗어나 고문(古文)을 쓸 것을 주장하며 문학을 통하여 사상혁신을 꾀했다.

그는 〈산중설야 山中雪夜〉와 영사시를 남겼고, 민간의 노래를 소재로 〈소악부 小樂府〉를 짓기도 했다. 최해의 〈삼월이십일우 三月二十日雨〉, 안축의 〈염호 鹽戶〉, 윤여형의 〈상률가 橡栗歌〉는 애민시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색은 〈부벽루 浮碧樓〉와 민속 소재의 시편을 남겼다. 이색을 중심으로 성리학을 연마한 정몽주·이숭인·김구용·정도전·권근 등은 배불(排佛)·친명(親明)을 내세우며 자신들을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생각했다. 이숭인·정도전의 〈오호도 嗚呼島〉는 전횡을 소재로 곧은 의지를 표현했다.

이 시기에 관료로서의 사명감을 보이는 관료적 경향과 강호에서의 삶을 바라는 처사적 경향의 문학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말 사대부의 갈등을 대변한다. 길재·원천석은 조선 건국 후 처사의 삶을 택했다. 혜심·충지·경한·보우·혜근과 같은 선사(禪師)들은 선(禪)과 시를 융합한 불교시를 지었다.

이인로의 〈화귀거래사 和歸去來辭〉는 김부식의 〈중니봉부 仲尼鳳賦〉와 함께 사부(辭賦)문학을 열었고, 이규보·최자·이색·정몽주·이숭인의 사부문학 작품이 전한다. 최초의 비평서인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에 이어 이규보의 〈백운소설 白雲小說〉,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이제현의 〈역옹패설 櫟翁稗說〉이 나왔다.

가전문학(假傳文學)의 효시는 임춘의 〈국순전 麴醇傳〉·〈공방전 孔方傳〉으로 술과 돈을 의인화한 일대기 양식인데, 이규보의 〈국선생전 麴先生傳〉, 이곡의 〈죽부인전 竹夫人傳〉, 식영암의 〈정시자전 丁侍者傳〉이 뒤를 이었다.

전(傳) 양식도 다양해져서 이규보는 자서전 형식의 〈백운거사전 白雲居士傳〉을 지었고, 이색의 〈송씨전 宋氏傳〉, 이숭인의 〈배열부전 裵烈婦傳〉 같은 인물전이 나왔다. 각훈은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고의 승전인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을 남겼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조신 調信〉은 전기소설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는다. 풍자적 산문으로 이규보의 〈경설 鏡說〉과 이곡의 〈시사설 市肆說〉이 있고, 기(記)와 서(序)도 사대부문학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 한문학

조선 전기와 후기의 문학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기점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에는 사대부문학이 관각파문학·사림파문학·방외인문학으로 나누어지며, 후기에는 실학파문학이 나타나고 중인층의 등장으로 문학담당층도 넓어졌다. 중앙관료들이 이끌어간 관각파문학은 고려말의 관료적 경향을 이었는데, 사장파문학이라고도 한다. 관각파문인은 나라를 빛내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조선초에는 정도전의 〈불씨잡변 佛氏雜辨〉과 권근의 〈입학도설 入學圖說〉이 그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다.

정도전의 〈신도팔경 新都八景〉에는 건국 주체의 진취적 기상이 깃들어 있으며, 권근의 〈응제시〉에는 민족적 자부심이 나타난다. 변계량 이후 역대 문형(文衡)이 문풍(文風)에 영향을 끼쳤고, 성균관·사부학당의 학교제도와 과거제가 정비되고 집현전의 기능이 활발해진 세종 이후에는 정인지·성삼문·박팽년·김수온·신숙주 등 새로운 인재들이 나온다.

이들의 힘을 빌어 세종부터 성종 때까지 〈고려사〉·〈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악학궤범〉과 문학서인 〈동문선 東文選〉을 편찬했다. 각종 편찬사업에 의해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정리되었지만 동시에 규범화되었다. 〈동문선〉 편찬의 중심인물인 서거정은 〈동인시화 東人詩話〉에서 관료적 기상이 깃든 시를 높이 평가했다. 서거정이 짓고 강희맹·이승소가 화답한 〈한도십영 韓都十詠〉에는 안정기의 번영을 즐기는 의식이 엿보이며, 이행의 〈팔월십오야 八月十五夜〉는 애상적이다.

이석형의 〈호야가 呼耶歌〉, 성간의 〈노인행 老人行〉, 성현의 〈잠부탄 蠶婦歎〉, 김종직의 〈낙동요 洛東謠〉는 애민시의 흐름을 계승한 것이다. 김종직의 〈동도악부 東都樂府〉는 조선 후기에 특정양식으로 발전하는 〈해동악부 海東樂府〉의 본보기가 되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집권세력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고 관료들이 귀족화하여 사대부의 자세에서 벗어나자 재야 사림이 도전하여 몇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김종직이 관직에 나간 것은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세력을 잡게 되는 신호였으며, 고려말의 처사적 경향을 이어 사림파 문학을 이끌었다. 사림파 문인들은 도본문말(道本文末)을 내세우며 시를 성정(性情)을 닦는 수단으로 삼고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시 세계를 추구했으므로 사림파 문학을 도학파 문학이라고도 한다.

서경덕의 〈산거 山居〉, 이황의 〈한거이십영 閑居二十詠〉, 조식의 〈유감 有感〉에서는 자연미를 예찬하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내면적 자기완성을 이루려고 했다. 김시습·남효온·임제는 체제 밖에서 비판의식을 담은 방외인문학(方外人文學)을 전개했다. 김시습은 〈기농부어 記農夫語〉·〈석서 碩鼠〉를, 임제는 〈패강가 浿江歌〉를 지었다. 백광훈·최경창·이달은 도학적 문학에 반기를 들고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지은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이달의 〈만랑가 漫浪歌〉가 유명했다.

그밖에 김해 관노비 출신의 어무적, 승려·여성 시인들이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어무적은 〈유민탄 流民歎〉을 지었고, 불교시에서는 선사(禪師)인 휴정이 우뚝하다. 황진이와 허난설헌은 신분이 다르지만 여성의 심리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남성 위주 사회를 비판한 공통점을 지닌다. 사부문학 작품은 몽유록의 영향을 받은 듯한 박상의 〈몽유부 夢游賦〉 외에 두드러진 변화가 없었다.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등으로 이루어진 전기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한국 설화소설의 효시가 되었다.

남효온의 〈육신전 六臣傳〉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했고, 임제는 〈화사 花史〉·〈수성지 愁城誌〉를 통해 사회적 모순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 심성을 의인화한 〈천군전 天君傳〉류의 가전체와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등의 몽유록이 나타난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골계전이 발달하여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 강희맹의 〈촌담해이 村談解頤〉·, 송세림의 〈어면순 禦眠楯〉이 나왔다.

시화와 수필이 섞인 필기류는 남효온의 〈추강냉화 秋江冷話〉,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 성현의 〈용재총화 慵齋叢話〉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전한다. 최부의 〈표해기 漂海記〉, 김정의 〈제주풍토기 濟州風土記〉는 기행문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후에는 사대부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허균은 인간의 정욕은 하늘이 부여했다고 하여 도덕주의에 반기를 들고 인간성의 회복을 외쳤다. 17세기 이후 집권세력인 노론계의 문인들은 의고주의(擬古主義)에 빠져 모방만을 일삼는 문학 풍토를 바꾸려고 했다.

양명(陽明) 좌파의 영향을 받은 장유·김창협·김창흡은 성정의 바름 대신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담아야 진시(眞詩)라고 하여 천기론(天機論)을 내세웠다. 김창협은 홍세태의 시에 천기가 깃들었다고 칭찬했고, 홍세태 이후 위항(委巷) 시인들은 천기론을 받아들여 위항문학을 옹호하며 신분제도에 맞섰다. 김정희에게서 비롯되어 중인층의 장지완·정수동·최성환이 받아들인 성령론(性靈論)은 천기론의 맥을 이은 것으로, 개성을 강조했다. 18세기 이후 집권 사대부에서 소외된 실학자들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깊이 깨닫고 현실과 동떨어진 주자학을 비판하며 근본적인 방법을 찾으려 했다.

정약용·홍대용·박지원·박제가와 같은 실학파 문인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풍속·지리·역사·언어를 바탕으로 글을 짓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배경과 맞물려 민요 취향의 한시, 해동악부, 사실적 경향의 장편시와 같은 시문학 양식이 발전했다. 이옥은 남녀간의 사랑을 민요풍으로 읊은 〈이언 俚諺〉을 남기고, 박지원은 농촌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린 이덕무의 시를 조선풍이라고 칭찬했다.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는 역사의 흔적을 더듬은 작품이고, 홍양호의 〈북새잡요 北塞雜謠〉는 관북지방의 풍속을 담았다.

시조를 한시화한 신위, 이유원의 〈소악부〉는 이제현을 이어 국문시가와의 접맥을 시도했고, 신위는 〈동인론시절구 東人論詩絶句〉를 남겼다.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계와 실학파 문인을 중심으로 독특한 양식의 악부체 한시들이 창작되었는데, 우리 역사 소재의 영사악부(詠史樂府)와 풍속을 읊은 기속악부(紀俗樂府)가 있다. 이러한 악부들은 심광세의 〈해동악부〉에서 비롯되어 임창택·이익·이광사·신광수·정약용·이학규 등이 작품을 남겼다.

권필의 〈구거아 驅車兒〉와 같이 민생의 어려움을 묘사한 사실적 장편은 중세사회 해체기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형상화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많이 지어졌다. 조선시를 짓겠다고 선언한 정약용의 〈전간기사 田間紀事〉·〈애절양 哀絶陽〉, 중인 출신 조수삼의 〈북행백절 北行百絶〉은 백성의 참상을 담은 사실적인 장편이다.

김삿갓은 문자유희로 한시의 고상한 풍격을 파괴함으로써 시대를 풍자했다. 중인층은 17세기 이래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시를 통해 신분제도를 비판했는데, 홍세태·조수삼·이언진·장혼·정수동·이상적이 알려졌다. 한문학의 마지막 시기에는 강위·황현·이건창·김택영 같은 문인들과 우국지사들이 외세에 대한 울분과 투쟁의지를 담았다. 황현의 〈절명시 絶命詩〉, 안중근의 〈합리빈가 哈爾濱歌〉가 주목된다. 사부문학으로 고부(古賦)와 과부(科賦)를 지었으며, 김택영은 〈오호부 嗚呼賦〉를 남겼다.

허균의 〈국조시산 國朝詩刪〉은 사대부의 시선집이고, 〈해동유주 海東遺珠〉·〈소대풍요 昭代風謠〉는 위항시집이다. 홍만종의 〈시화총림 詩話叢林〉, 이수광의 〈지봉유설 芝峰類說〉, 허균의 〈성수시화 惺叟詩話〉 등에서는 역대 시화들을 모았고, 김만중의 〈서포만필 西浦漫筆〉, 김창협의 〈농암잡지 農巖雜識〉에도 시화가 실려 있다.

조선 후기 산문에도 양란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려는 경향과 새로운 사고를 담아 영역을 넓히려는 경향이 동시에 나타난다.

중기의 한문 사대가 이정구·신흠·이식·장유가 문장의 모범을 보이고, 송시열·허목·남유용이 고문을 지었다.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순정한 문체를 유지하려 했으며, 홍석주·김매순·이건창·김택영은 순정한 고문가로 알려졌다. 김택영은 김부식 등의 글을 뽑아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抄〉를 발간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행(使行), 유배 등의 다양한 체험으로 기록문학이 발달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亂中日記〉, 강항의 〈간양록 看羊錄〉은 전쟁 체험의 기록이다. 명나라 기행문 〈조천록 朝天錄〉과 청나라 기행문 〈연행록 燕行錄〉은 여러 편이 전하며, 일본 기행문으로 신유한의 〈해유록 海游錄〉이 알려졌다. 연행록의 으뜸인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는 창의적 양식으로 평가받는데, 정조는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라고 비난했다. 허균은 〈유재론 遺才論〉에서 인재등용의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세상에 쓰이지 못한 탁월한 인물의 행적을 〈손곡선생전 蓀谷先生傳〉과 같은 일사전(逸士傳)으로 남겼다.

19세기에는 조희룡의 〈호산외기 壺山外記〉를 비롯한 중인전 모음집이 나오며, 장지연은 〈일사유사 逸士遺事〉에서 사대부와 중인의 전을 모아놓았다. 박지원의 〈양반전 兩班傳〉·〈호질 虎叱〉·〈허생전 許生傳〉 등은 날카로운 풍자와 사실주의 정신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이옥의 〈심생전 沈生傳〉·〈가자송실솔전 歌者宋樺傳〉 등에는 야담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19세기 이후의 야담집인 〈청구야담 靑丘野談〉·〈동야휘집 東野彙集〉은 사대부 취향을 벗어난 유몽인의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맥이 닿는데, 새로 부상하는 계층의 삶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도 많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전·소설·야담이 상호 영향을 받아 박지원·이옥의 전을 소설에 넣기도 한다. 필기류·실학저술·개인문집은 낱낱이 헤아릴 수 없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홍만종의 〈순오지 旬五志〉, 박제가의 〈북학의 北學議〉, 황현의 〈매천야록 梅泉野錄〉 등을 들 수 있다.→ 한국문학, 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