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최치원

다른 표기 언어 崔致遠
요약 테이블
출생 857(문성왕 19)
사망 미상
국적 신라, 한국
본관 경주(慶州)
시호 문창(文昌)
고운(孤雲), 해운(海雲)

요약 <시무책 10조>를 저술한 신라의 학자.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 해운으로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문장의 대가인 신라삼최로 꼽힌다.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장원 급제했다. 당나라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고하는 <격황소서>를 써서 문명을 떨쳤고, 문인 고운, 나은 등과 교류했다. 귀국한 후에는 헌강왕에게 발탁돼 외교문서 등을 작성하며 당대의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894년 진성왕에게 집권체제와 골품제사회의 모순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무책 10여 조를 올리기도 했다. 유교와 불교, 도교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많은 글을 남겼다.

목차

접기
  1. 정의
  2. 초기 생애
  3. 주요 활동
    1. 당나라 체류 시기
    2. 신라 귀국 후의 활동
    3. 시무책 10여 조
    4. 만년의 행적
  4. 문집과 저작
  5. 영향과 평가

정의

최치원(崔致遠)
최치원(崔致遠)

신라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 창건을 도왔다.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와 함께 문장의 대가인 '신라삼최(新羅三崔)'로 꼽힌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이며,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초기 생애

857년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했다.

주요 활동

계원필경
계원필경
당나라 체류 시기

최치원은 874년(경문왕 14) 서경(西京, 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당나라의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하여, 외국인을 대상으로 치러진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후 관직에 임명되기 전까지 낙양에 머물며 시를 썼는데, 이때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급제 2년 뒤인 876년(헌강왕 2)에 당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율수현(溧水縣)은 지금의 중국 장쑤성(江蘇省) 율양시(溧陽市)이며, 현위(縣尉)는 종9품의 하급관직이었다. 그러나 최치원은 관리 중에서 시문(詩文)이 뛰어난 인재를 특별히 선발하는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응시하기 위해 이듬해 겨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관직을 물러난 후 잠시 어려운 시절을 겪던 최치원은 879년(헌강왕 5)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騈, 고변이라고도 함)의 천거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면서 관직으로 복귀했다. 고병은 대대로 금군(禁軍)에 종사하며, 여러 차례 반란군을 진압하고 백성의 생활을 돌보아 민심을 얻은 무관이었으나 글을 좋아하여 많은 선비와 친분이 있었다.

이 무렵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880년(헌강왕 6) 고병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에 나서게 되면서 최치원을 발탁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서기의 임무까지 맡겨, 표문(表)·장계(狀)·서한(書)·계사(啓) 등을 작성하게 했다. 고병의 휘하에 있었던 4년 동안 최치원은 1만여 편에 이르는 글을 쓰면서 문장가로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특히 881년(헌강왕 7)에 지은 〈격황소서(檄黃巢書)〉가 당대의 명문으로 알려지면서 최치원은 높은 평가를 받아 종8품의 승무랑(承務郎)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内供奉)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승진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받았으며, 882년(헌강왕 8)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어대(魚袋)는 관등에 따라 옥·금·동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어부(魚符)를 넣어 차던 주머니로, 비은어대는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자금어대는 3품 이상의 관리에게 하사했던 장식이었다.

최치원은 당에 머무는 동안 강동의 시인 나은(羅隠)과 교류하고 지냈는데, 나은은 자신의 재주가 출중함을 믿고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최치원에게는 자신이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최치원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한 문인 고운(顧雲)과도 친하게 지냈으며, 최치원이 귀국할 때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했다.

신라 귀국 후의 활동

885년(헌강왕 11) 28세 때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게 발탁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최치원은 현위 시절 지었던 시와 부를 모아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을 엮고, 고병의 휘하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엮어 왕에게 헌상했으며, 왕명을 받아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시무책 10여 조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상하게 여겨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이 왕위에서 내려오고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謝嗣位表)〉를 최치원이 썼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유람하며 지냈다.

만년의 행적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 강주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친교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는데,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문집과 저작

무성서원(武成書院)
무성서원(武成書院)

그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석이정전(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이 있다.

그가 지은 글로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다. 최치원의 대표적인 시문집인 <계원필경>은 표·장·서·계 등의 형식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밖에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일부가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각주1) 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모셔졌다.

영향과 평가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쓰기도 했다(신라의 불교).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오르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참고문헌

  • ・ 김보광, 2015, <고려전기 어대의 개념과 운영방식에 대한 검토>, 한국사연구 169.
  • ・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 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 이강래 옮김, 1998, <삼국사기Ⅱ>, 한길사
  • ・ 이현숙, 1992, <신라말 어대제의 성립과 운용>, 사학연구 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