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한시

다른 표기 언어 漢詩

요약 좁은 의미에서는 한대(漢代)의 시를 일컫는 말이지만, 중국 및 주변의 한자문화권에서 한자로 쓴 시를 포함한다. 한시의 자수는 5언·7언이 대부분이나 4언·6언도 있다. 고시·악부·근체시로 나눌 수 있다.

목차

접기
  1. 분류와 형식
  2. 고시
  3. 악부
  4. 근체시
  5. 한국의 한시

분류와 형식

한시의 분류기준은 자수(字數)·구수(句數)·압운·운자(韻字)·위치 등이다. 자수는 5언·7언이 대부분이며 4언·6언도 있다.

구수는 4구·8구가 대부분인데, 일반적으로 4구는 절구(絶句), 8구는 율시라고 한다. 압운에서 운자는 대부분 구말에 둔다. 그러나 고대시 가운데는 구수·구중에 압운하는 경우도 있으며, 장시에서는 도중에 운을 바꾸기도 한다. 한시는 그 성격상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시

일반적으로는 근체시 성립 이전, 즉 태고의 가요에서부터 위진 남북조의 악부 가행을 가리키지만, 근체시 성립 이후에 이루어진 시 중 근체시 규격에 부합되지 않는 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근체시에 비해 구법과 연의 구성 및 구수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 5언·7언이 주가 되나 4언·6언도 있다. 압운은 존재하지만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언고시와 칠언고시이다.

악부

악부는 악가를 관장하던 관청의 명칭으로서, 여기에서 채집·보존한 악장(樂章)이나 가사 또는 그 모작을 통들어 악부시라고 한다.

근체시

고체시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시로서, 당대에 그 형식이 완성되었다. 기승전결의 구법이 있으며, 연의 구성과 대구의 구속이 있고 구수의 규정이 있다. 율시·배율(排律)·절구의 3종류가 있는데, 각각 5언·7언의 구별이 있다.

① 율시는 1편이 4운 8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2구절을 묶어 1련이라고 하고 수련(首聯)·함련·경련·미련(尾聯)으로 구성되며, 이때 함련과 경련은 반드시 대어(對語)를 써서 연구(聯句)를 이루어야 한다. 오언율시에는 제2·4·6·8구에 압운이 붙고, 칠언율시에는 제1·2·4·6·8구에 각운이 붙는다. ② 배율은 한 편이 6련 12구로 구성되며 한 구는 5언이 정격이나 7언도 있다. 평측과 압운은 율시와 비슷하지만 6련을 모두 대어연구(對語聯句)로 한다. ③ 절구는 기승전결의 4구로 이루어지며 1·2구는 산(散), 3·4구는 대(對)가 된다. 오언절구에는 제2·4구의 끝에, 칠언절구는 제1·2·4구의 끝에 압운을 둔다.

한국의 한시

한국 한시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선조들에 의해 최초의 한국 한시로 인정되어온 기자(箕子)의 〈맥수가 麥秀歌〉는 BC 11세기경의 작품이며, 분명히 중국의 한족(漢族)과 인접해서 살았을 고대 한국 민족의 한 여인의 작품으로 판정되는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도 BC 3~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찍부터 서정시가로 발달한 한국 한시는 중국의 고가요(古歌謠)와 시경시(詩經詩)의 형식을 받아들여,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 黃鳥歌〉라는 서정시가 나왔다.

그리고 역시 고구려인에 의해 〈인삼찬 人蔘讚〉이라는 동요형 시도 지어졌다. 이 작품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 내용이 서사적인 것으로 전환될 뿐만 아니라 중국과 같이 형태도 5언시로 바뀌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와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致唐太平頌〉 등이 그런 것들이다. 뒤를 이어 정법사(定法師)는 오언고시(五言古詩) 〈고석 孤石〉을 지어 훌륭한 상징적 표현의 차원까지를 보여주었다.

신라의 삼국통일기 이후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당나라)에 유학하여 한자·한어를 직접 생활로 경험하고 학습함으로써 보다 많은 한시를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한층 자기적인 언어감각과 감정으로 시를 창작할 수 있게 되어 본격적인 한국 한시의 터를 다졌다. 이러한 활동의 주요인물은 최치원·최승우·박인범·최광유 등이며, 이중 특히 최치원은 시대적 상황도 깊이 의식하면서 다수의 좋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중국에서부터 칭찬을 들었고, 한국 한시의 터전을 제대로 마련해준 시조로 추대되었다.

최치원을 끝으로 하여 신라시대까지는 중국 한시를 수용해 학습적 차원의 기반을 완수한 시기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고려시대는 미숙한 대로 자기 모습다운 한시의 창작을 전개해갔다. 국가의 기반 조성을 위해서 전기에는 김부식 등의 정치적 기여를 위한 목적시가 창작되었고, 동시에 당시풍(唐詩風)을 잘 살려 지은 정지상의 시도 나왔다. 고려 중기 무신집권의 시기에도 이인로·임춘 등 이른바 죽림고회라는 시인집단이 등장해 자신들의 시적 재질을 자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이규보는 활달하고 호방한 기개와 재질로 시대에 잘 대응하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했다. 이들은 당시풍을 모범으로 삼으면서도 당시 풍조로서 흘러들어오는 송시풍(宋詩風)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이때부터는 시에 대한 비평의식이 싹트기 시작해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등이 나왔다. 뒤를 이어 이제현은 원(元)나라에 들어가 중국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시적 수련을 훌륭하게 쌓고 시와 사(詞) 등의 송풍 작품을 남겼다.

고려 말기에는 새로운 철학사상체계로 성리학이 들어와 한시도 그 영향을 받아야 했으며, 이러한 시의 경향을 대표하는 시인이 이색과 정몽주였다.

조선왕조는 배불숭유(排佛崇儒)의 국시(國是)로 건국되면서 한시도 그 영향 아래 전개되어갔다. 조선초기에 성리학과 문학을 함께 실천한 사람은 권근이었다. 그뒤를 이은 시인들로 많은 작품을 남긴 서거정과, 저항의 정신으로 기인처럼 살아간 김시습, 유학자이자 시인인 김종직이 있었다.

이무렵 〈동문선 東文選〉·〈청구풍아 靑丘風雅〉 등의 시선집과 〈용재총화 이미지齋叢話〉·〈동인시화 東人詩話〉 등의 시평론집들도 나왔다. 조선 초기부터 한동안은 당시풍을 모형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에 공감하면서도 창작의 실제에 있어서는 앞서의 풍조대로 송시풍의 영향을 더 받았다. 그런 영향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중기의 새로운 한시 모습을 보인 사람이 박인이었다. 같은 시기 성현·박상·신광한·황정욱 등 4명도 우수한 시인들로 인정받았다. 이른바 목릉성제(穆陵盛際)라는 선조대를 중심으로 하는 때에는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학의 발달이 극에 달하여 신흠·이정구·장유·이식 등 4명이 이름을 날렸다.

필화사건으로 목숨까지 잃은 권필, 외국사절과의 시 회답으로 이름을 떨친 차천로도 이때의 시인들이었고, 원칙적 모형으로 삼아왔던 당시의 풍격(風格)을 훌륭하게 자기 것으로 익혀 새로운 시의 경지를 열어놓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인 최경창·백광훈·이달 등이 이 시대를 대표했다. 이밖에도 중국 시인 두보를 잘 배워 시를 잘 지었다는 이안눌, 시인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허난설헌 등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시평론집인 허균의 〈성수시화 惺叟詩話〉, 홍만종의 〈소화시평 小華詩評〉, 남용익의 〈호곡시화 壺谷詩話〉, 시선집인 〈국조시산 國朝詩刪〉·〈기아 箕雅〉 등이 나왔는데, 그뒤 한동안은 당시풍을 숭상하면서도 실제의 시단은 침체상태여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김창협과 평민 시인인 홍세태가 있을 뿐이었다.

이후로부터는 시대의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자각이 싹트면서 감정과 흥취의 멋에 치중했던 종래의 당시풍을 배격하고 우리의 것, 현실의 것을 소재로 참된 것을 찾아 보다 지적이며 진실한 시를 짓는 혁신적 시단이 형성되었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등으로 이루어진 후기4가(後期四家)가 그 예이다. 이들을 전후해서 같은 시풍의 시가 이용휴·정약용 등에 의해서도 나왔다. 그러면서 이 풍조에 또다시 정취를 가미해서 새로운 시를 남긴 신위가 있었다. 한국적 풍격으로 완성된 한시의 풍조는 그뒤에 바로 이양연 등의 시로 이어졌고, 강위·황현 등이 조선왕조의 멸망을 통분해하는 시를 지었으며 그이후 한국 한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처하여 한국 한시의 통시적 총정리를 시도한 시선집 〈대동시선 大東詩選〉이 장지연 등에 의해 엮어졌다.

한국의 한시는 그 표현의 언어·문자적 성질상 귀족·남성 중심의 문학일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여성과 평민계층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가능했다.→ 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