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외인문학

방외인문학

다른 표기 언어 方外人文學

요약 지배체제에 반발해 이념적으로 노장(老莊)을 비롯한 이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작된 문학.

조선시대 사대부는 문학적인 교양을 지닌 문인 학자이자 정치 행정을 담당하는 관인이었다.

이들은 중소 토지 소유자들로 일정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독서를 통한 문학적 교양을 쌓은 후, 관인으로 진출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생애에 있어서 '출'(出)과 '처'(處)라는 양면적 성격을 가졌다. 이러한 당대 지식인의 일반적 삶의 양태에서 벗어난 중세기의 반체제적인 인간 유형이 방외인이다. 16세기 전후의 역사적 상황에서 처사형과 방외형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처사형 지식인이 기본적으로 체제옹호적이며 관인형의 다른 한 모습인 데 반해, 방외인은 사대부적 생활질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들은 정치 현실에 대해 격렬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신분에 결함이 있는 말단 사대부나 그 이하 지위여서 사회적 진출을 바랄 수 없었다. 따라서 방달불기(放達不羈)의 고립된 인간으로 방랑과 비판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문예창작을 통해 자신의 고뇌를 토로하고 해소했다.

방외인들은 방랑을 하다가 자취를 감추어 행적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남긴 작품도 얼마 되지 않는다.

김시습(金時習:1435~93)은 한국 문학사에서 방외인문학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정치현실에 대한 불만을 불문(佛門)에 투신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산사(山寺)에서도 민본정치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흔히 낙향한 사대부들이 하듯이 은거의 길을 택하지 않음으로써 사대부적 규범에서 탈출해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가슴에 쌓인 울분을 시에 쏟아놓았으며, 한국 문학사상 획기적인 소설작품인 〈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지었는데, 이 작품집은 전기적 양식을 모체로 김시습의 방외인적 삶의 자세와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표현된 작품이다.

김종직 계열의 사림파 내부에서도 처사형과 방외인형의 분화가 일어났다.

김굉필·정여창을 비롯한 처사적 인물들은 권력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자세로 현실에 임해 학자의 길을 걸었으나 남효온·홍유손과 같이 저항의식이 강했던 인물들은 비판적 발언과 분방한 행동을 하면서 방외인문학을 남겼다. 남효온(1454~92)은 18세 때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저질러진 잘못을 시정하고자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평생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다.

〈육신전〉은 사육신 사건을 정면으로 대담하게 다룬 전기(傳記)로, 박팽년·성삼문으로부터 유응부에 이르는 인물들을 열전형식으로 서술했다. 홍유손(1431~1529)은 본래 남양 아전 출신이다. 그 고을 관장이 문장에 능한 것을 가상히 여겨 이역(吏役)을 면해주었다고 한다. 〈해동이적 海東異蹟〉에 행적과 시가 전하는데 홍유손은 김시습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연산군 치하에서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제주도에 귀향을 가기도 했다.

방외인문학은 김시습 이후 치열한 저항의식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암울한 정치현실로 인해 허무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정희량(鄭希良:1469~?)을 들 수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한림을 지냈으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의주·김해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34세 때 강가에 의관과 신발만 남겨놓고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선이나 승려가 되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믿었다. 이황이 젊어서 산사에 가 〈주역〉을 읽는데 옆에서 어느 스님이 구두(句讀)를 정확하게 잡아주는 것을 보고 정희량인 줄 짐작하고, 이제 나와서 벼슬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으니, 모친상을 마치지 않았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도망을 쳤으니 불충인데 어찌 나서겠느냐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중종반정 이후 〈허암유고 虛庵遺稿〉가 출간되었다. 〈산은설 散隱說〉·〈혼돈주가 渾沌酒歌〉 등의 작품을 통해 일체의 문명과 제도를 부정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환상적으로 추구했다.

16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중앙정계는 당파적 이해관계에 얽매인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고, 문학에서는 도덕주의가 팽배했다. 이때 한편에서 문학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면서 창작활동을 자신의 삶의 중요한 지표로 삼은 일련의 시인들이 나타났다. 삼당시인 중의 한 사람인 이달(李達:1539~1612)은 어머니가 충청도 충주 기생으로 애초에 정계 진출의 길이 막혀 있었다.

어느 한 곳에 예속되기를 싫어해 사방으로 유리걸식했고, 시 짓는 재주로 지방 수령 및 양반들의 애호를 받으며 전전한 유랑시인으로 불우했지만 오직 시창작에 심혈을 쏟아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다. 허균은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추모하고, 유작을 모아 〈손곡집〉을 간행했다.

임제(林悌:1549~87)는 전라도 나주 출생으로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으나 예조정랑에 그쳤다.

생애의 후반을 울분과 방황으로 보냈으며, 동서(東西) 분당(分黨)의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그는 당쟁의 무리에서 벗어나 호협(豪俠)한 일생을 보냈다.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를 읊은 일화는 봉건 예교의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 감정과 행동의 자유를 얻고자 했던 그의 인간자세를 엿보이게 한다. 임제는 자유분방한 생활체험과 감수성으로 1,000여 수의 시에서 독특한 예술적 성취를 이룩했는데, 문학사적으로는 〈수성지 愁城誌〉·〈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화사 花史〉가 주목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다루면서도 특이한 서술양식을 쓰고 있는데, 〈금오신화〉를 비롯해 이전의 우언(寓言)·가전(假傳) 등의 수법을 발전시킨 형태이다. 김시습은 왕도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인간사회를 합리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확신했는데, 임제는 왕도정치란 이념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현실과 괴리된 공허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임제는 이러한 이념을 대치시킬 만한 사상이나 현실을 극복할 사회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비관적·낭만적인 세계관을 역설적·우언적인 허구의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 이별·정염·양사언·어무적 등이 방외인으로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