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

임제

다른 표기 언어 林悌 동의어 자순, 子順, 백호, 白湖, 겸재, 謙齋, 풍강, 楓江, 벽산, 碧山
요약 테이블
출생 1549(명종 4)
사망 1587(선조 20)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임제는 문과에 급제(1577, 선조9)했으나 벼슬을 멀리한 채 전국을 방랑하며 많은 한시를 남겼다. 당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린 탓에 그가 지낸 관직은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에 그쳤다.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 아버지는 오도절도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진(晉)이다. 큰아버지 풍암(楓岩)이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돌보았다.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 용만·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문인인 이이·허균·양사언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肉談)적인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 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 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 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

임제(林悌) 기념비
임제(林悌)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