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위생

정신위생

다른 표기 언어 mental hygiene , 精神衛生

요약 정신건강의 유지 및 정신병이나 신경증을 비롯한 기타 정신장애의 발생에 대한 예방을 연구하는 과학의 한 영역.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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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의 시설
  2. 현대의 정신위생
  3. 정신위생에 대한 국제조직
  4. 정신위생에 대한 국가기관

국제연합(UN)이 설립된 이후 정신건강과 정신위생의 개념은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46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설립규약에 "건강이란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이며, 단순히 질병이나 질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정의된 바와 같이 정신건강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다양한 열망을 포괄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보건기구(WHO)

정신장애로부터의 회복, 정신장애의 예방, 압박을 주는 주위 세계로부터의 긴장 감소, 개인이 자신의 정신적 잠재력과 걸맞는 수준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안녕상태에 도달하는 것 등이다. 세계정신건강연맹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최적의 정신건강이라는 개념은 절대적 이상상태가 아니라 상황이 변함에 따라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신건강은 개개인의 상태로 간주하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사회환경적인 배경에 따라 상대성을 띠고 있다. 정신위생은 정신건강을 유지·증진시키는 모든 예방책을 포함한다. 지역사회정신건강은 그 지역의 조직과 기능이 얼마만큼 구성원들의 정신건강을 결정짓고 도움을 주는가 하는 데 관심을 쏟는다.

어느 시대에나 정신질환자들은 두려움과 혐오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그들의 운명은 대개 거부와 무시, 부당한 대우 등으로 점철되어왔다. 고대의 의학 기록을 보면, 정신질환에 관해 오늘날의 인본주의적 접근자세와 매우 유사한 관점을 보여주는 언급도 있지만, 같은 문헌의 사이사이에는 정신질환은 악마의 홀림과 같이 초자연적인 원인으로 생긴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잔혹한 행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예가 삽입되어 있다(→ 초자연주의). 개혁가들도 때때로 가혹한 치료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18세기 미국의 내과의사 벤저민 러시는 정신병 환자를 악명높은 '진정용 의자'(tranquilising chair)에 묶어 활동을 제한시키는 치료법을 사용했다고 시인했다.

초기의 시설

정신질환 환자의 치료 역사는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을 반영한다. 가장 오래된 정신병원은 아라비아에 세워졌다. 바그다드(918)와 카이로에 세워진 이 병원은 정신질환자들을 '고통받는 알라 신의 사람들'로 여기고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현존하는 일부 아프리카 부족에서는 환각상태를 영적 세계와의 소통이라고 하여 상서롭게 여긴다. 다른 문화들 중에서, 특히 힌두 문화는 서구사회에서 기괴하다고 여기는 행동에 대해서 대단한 인내를 보여준다. 정신질환의 원인이 악마의 홀림이라는 서구의 해석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던 기간(15~17세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극에 달했다(→ 마법).

베들램(1247년 런던에 설립)과 비세트르(파리의 남성 수용소) 같은 옛 정신병원들은 18세기의 전형적인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이었으며 환자들에게 일상적으로 쇠고랑을 채웠다. 이곳의 수용자들은 인간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었고 잔인하지 않더라도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다. 즉 이들의 주요관심사는 정신질환자들을 정상적인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영국 식민지시절의 미국에서는 정신착란자들을 종종 경매에 붙여 농부들이 보호(또는 이용)하게 했다. 일부는 법원 명령에 따라 도시에서 추방당했고, 나머지는 구빈원에 수용되었다. 식민지가 된 지 100년 이상 지난 후에야 정신질환자를 위한 최초의 수용소가 1773년 버지니아 주 윌리엄즈버그에 세워졌다. 1790년대에 프랑스의 개혁가 필리프 피넬은 비세트르에 수용되었던 환자 49명의 사슬을 풀어줌으로써 동료의사들을 놀라게 했다. 비슷한 시기에 퀘이커교도이자 차·커피 상인이었던 윌리엄 튜크가 인도적인 치료를 하는 '요크(잉글랜드) 보호수용소'를 세웠다. 의사이자 독립선언서의 서명자인 벤저민 러시도 정신질환자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옹호했다. 이러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메인 주의 교사였던 도로시아 딕스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정신질환자들이 일반 죄수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기까지는 미국이 독립한 뒤로 반세기가 흘렀다. 1840년대에 그녀가 개인적으로 벌인 구제활동은 미국과 캐나다, 영국에서 시설의 확대와 개혁의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선구적이고 인도적인 노력들을 통해 상황이 개선되어 나가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뜻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앙화된 시설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수용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론의 감시가 없었으므로 한때 정신병원이라고 불리던 곳에 대규모로 수용된 이 불행한 환자들 대개는 점차 학대와 방치라는 구습의 희생자가 되었다.

현대의 정신위생

근대적인 정신건강운동은 한때 정신질환자였던 코네티컷의 C.W. 비어스의 열정적인 지도력으로 첫 추진력을 얻었다. 자신이 겪은 일을 기록한 저서인 〈스스로 발견한 정신 A Mind That Found Itself〉은 1908년 처음 출간된 뒤 수개 국어로 재판 발행을 거듭했고, 학생들과 정신건강분야의 종사자, 일반인들에게 감명을 주어 지역사회·학교·병원에서 정신질환 치료의 개선을 촉진했다. 비어스는 뛰어난 전문가들을 포함한 저명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8년 이 분야 최초의 협회인 '코네티컷 정신위생학회'를 조직했다.

그 설립강령은 회원들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정신건강협회가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있는 동일한 목적을 추구할 책임을 지도록 했는데, 여기에는 정신장애자들의 치료 기준의 향상, 정신질환과 정신지체의 예방, 정신건강의 유지, 건전한 정보의 보급 등이 명시되어 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09년 2월 19일 비어스는 뉴욕 시에서 '전국정신위생위원회'의 설립을 이끌었고, 이는 1950년 '국립정신건강협회'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제정신건강운동에 대한 철학적·과학적 근거가 이미 충분히 고무된 가운데 비어스는 촉매역할을 했던 것 같다. 찰스 다윈을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은 이미 인간이 고정적 잠재력을 가진 불변의 종(種)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무너뜨렸다. 비어스가 대중운동을 시작할 무렵,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부모들에게 부과된 고통을 함께 겪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발달심리학, 응용심리학). 새롭게 출현한 과학적 심리학은 환경이 개인의 적응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로의 일부를 밝힘으로써 부모와 지역사회가 이전에 생각했던 수준 이상으로 어린이들의 성장과 복지를 향상시킬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이러한 정신으로 정신건강운동은 일찍부터 아동지도병원의 설립과, 부모 및 일반대중을 위한 교육계획을 촉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중과 그이후의 정신의학심리학의 발달은 이 운동에 신선한 힘을 불어넣었다. 이 기간 동안 빈의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촉발시킨 유럽의 정신분석운동은 정신질환 증상의 주요 결정요소로서 아동기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세계 전역에서 정신질환 발생의 1차적 요인은 심리적·사회환경적 요소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도록 유도했다(→ 정신장애).

정신위생에 대한 국제조직

비어즈는 1919년 '국제정신위생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워싱턴 시에서 제1차 국제정신위생회의가 열렸던 1930년경에는 25개국에 정신위생학회가 있었다. 1948년 제3차 회의가 열린 런던에서 세계정신건강연맹이 만들어졌다.

이 연맹은 WHO(기구 내 정신건강분과는 1949년에 설립됨)를 비롯한 UN 내 몇몇 국과의 자문에 응하며 비공식적인 상호교환 기능을 했다. 연맹은 국제적인 연구모임들과 전문가위원회를 소집해왔고, 지역적·국제적 회합을 개최했으며, 세계 전역의 정신보건분야 종사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개선시켜왔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신건강·인구증가·사회불안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긴급함이 점점 더 요구됨에 따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은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고 대중에 의해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 도움이 되는 상태를 추구하도록 교육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정신위생에 대한 국가기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1세기 이상 동안 여러 나라의 정신병원은 지방 정부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1946년에 영국 국민보건법이 제정됨에 따라 보건부의 지방 대리기관인 병원행정위원회를 통해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병원치료를 제공할 책임은 완전히 중앙정부의 차지가 되었다(영국국가의료제도). 같은 해 당시 존재하던 사립 정신건강기관들이 통합하여 '전영국정신건강협회'를 만들었다. 이 자발적이고 전국적인 모임은 장애자들을 위한 거주시설을 제공하고, 추후관리를 제공하며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할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 분야 요원들을 훈련시켰다.

1959년의 정신보건법은 정신질환과 정신지체에 관한 정책을 관장하던 이전의 영국법률을 무효화시켰다. 이 법률은 심리적 질환으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다른 의학적 문제와 같은 근거로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했다. 지역사회의 정신보건사업은 병원 및 외래환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일하는 지방보건당국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정신건강 문제에 관한 연구가 주로 정부가 지원하는 의학연구회의의 지휘하에 있다.

정신질환자들을 치료·보호하고 정신위생을 진작시키는 조항들은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 이런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소련과 같은 나라에서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를 통해서 국가가 정신질환자나 정신지체자를 위한 시설을 제공하고 유지할 의무가 있다. 유럽 경제공동체(EEC) 회원국을 포함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정신건강을 위한 역할을 종교단체나 기타 민간기관과 분담한다.

많은 혁신적인 정신보건사업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이중에는 지역사회통합사업, 신경안정약물의 사용, 보호시설을 갖춘 작업장, 책임자의 자리에 비전문가를 고용시키는 사항 등이 있다.

수입된 유럽의 사상들은 캐나다와 미국 문화 속에 이미 존재하던 자아발전과 적응에 대한 전통적인 신뢰와 결합하여 1930년대와 1940년대초, 이 두 나라의 정신건강운동에 또다른 동기부여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귀향한 퇴역군인들의 문제는 정신보건에 관한 일반의 관심을 더욱 자극했다.

정신보건운동과 언론기관이 협력한 가운데 폭로의 물결이 캐나다와 미국을 휩쓸었는데, 특히 1948년 출판된 알버트 도이치의 〈국가의 수치 The Shame of the States〉가 대표적이었다. 1946년에 발행된 메리 제인 워드의 〈정신병원 The Snake Pit〉은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더욱 많은 정신건강 문제의 사실적 묘사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에 대한 이해와 아동지도에 대한 정신역동적 접근이 북아메리카의 대중문화와 결합되었다. 약물요법(예를 들어 진정제와 기분상승제)의 도입이 진보를 가속화시켰다.

1946년 미국에서는 전국정신건강법이 통과되어 1949년 전미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NIMH)가 창설될 수 있었고, 이는 후에 후생부(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로 편입되었다.

주의 병원체계는 증가된 예산으로 재조직되고, 중요한 연방기금이 연구·교육 임상시설 등에 쓰였다. NIMH는 미국에서 정신건강과 행동과학 분야의 기초 및 응용연구, 시범사업, 정신건강 전문가 육성을 위한 주요기금원이다. 이 연구소는 약물중독에서부터 자살 예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회문제 분야에 대한 특수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왔다. NIMH가 운영하는 '전국정신보건정보교환소'는 정기적 간행물인 〈정신보건요람 Mental Health Digest〉과 함께 귀중한 자원이다. 미국 내의 다른 정신보건지원단체로는 '전국 아동건강 및 인간발달 연구소', '퇴역군인행정청', 교육부, 사회·재활 부서, 국립과학기금, 국무부의 의학부 등이 있다.

자선재단들도 해를 거듭하며 아낌없는 지원을 해오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상황은 북아메리카나 유럽과 비슷하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는 훈련된 연구원들과 지방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정신건강과 정신위생을 주로 선교사나 국가간 원조계획, UN의 노력 등에 의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