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

러시

다른 표기 언어 Benjamin 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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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6. 1. 4 (구력 1745. 12. 24), 필라델피아 근처 바이베리
사망 1813. 4. 19, 필라델피아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의사·정치지도자.

대륙회의 의원을 지냈고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

그는 끊임없이 임상 연구와 임상 교육을 장려했지만 사혈(瀉血 blood-letting) 및 사하(瀉下 purging) 등의 치료법을 고집하기도 했다(의학).

그는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프린스턴에 있는 뉴저지대학에 입학해서 1760년 졸업했다. 6년간 의학 견습을 한 뒤 유럽으로 건너가 1768년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의사자격을 얻었다. 그후 런던 병원에서 근무했고 잠시 파리를 여행했다.

1769년 고향으로 돌아와 병원을 개업했고, 필라델피아대학교의 화학 교수가 되었다. 이듬해 〈화학강의 계획서 Syllabus of a Course of Lectures on Chemistry〉(1770)를 출판했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행된 화학교과서였다. 전쟁과 정치적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저술 덕분에 러시의 병원은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신문과 잡지에 실린 많은 글을 빼고도 미국 초기 의학간행물에 실린 글 중 65개가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또 미국 전지역에서 찾아온 많은 견습생과 학생들을 교육시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필라델피아대학과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화학 교수, 의학 및 임상의학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약 3,000명의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가르쳤다. 1790년 이후 그의 강의는 필라델피아 시의 중요한 문화적 자랑거리가 되었다.

의사로서 그는 과학에 바탕을 둔 병리학자라기보다는 다소 독단적인 이론가였다.

질병을 하나의 간단한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그는 모든 병은 혈관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아 생기는 열에 불과하므로 사혈과 사하로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열이 높아질수록 더 과감하게 체액을 줄여야 한다고 믿었다. 1790년대 필라델피아에 황열병(黃熱病)이 유행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황열병보다도 그의 치료법을 더 무서워했다.

그는 정신의학에도 큰 공헌을 했다.

여러 해 동안 펜실베이니아 병원에서 정신병 환자를 돌보았는데, 정신병도 여느 병과 똑같이 치료하면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들을 자비롭게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신병이 귀신에 홀린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정신병도 때로는 신체 결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정신병에 관한 의학적 조사 및 관찰 Medical Inquiries and Observations upon the Diseases of the Mind〉(1812)은 정신병에 관한 미국의 초기 논문 중 최초의 논문인 동시에 여러 해 동안 유일한 논문이었다.

러시는 미국 건국 초기에 열렬히 활동한 애국자였다.

1776년 6월 급진 식민지회의 의원으로 독립촉구결의안을 기초했으며, 곧이어 대륙회의 의원으로 뽑혀 그해 8월 2일 다른 의원들과 함께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 1년 동안 대륙군 중부군관구 소속 내과 및 외과 의무감으로 직접 전쟁터에서 근무했으나, 워싱턴 장군이 후원하던 그의 상관이 군병원을 잘못 운영한다고 생각해 1778년초에 그만두었다.

그후에도 러시는 계속해서 워싱턴의 군사적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뒤에 그는 이 일을 후회했고, 최근까지 그의 명성에도 오점으로 남았다. 그는 다시 환자를 돌보고 의술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797년 존 애덤스 대통령에 의해 미국 조폐국 출납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