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

다른 표기 언어 Oregenes
요약 테이블
출생 185경, 알렉산드리아
사망 254경, 페니키아 티레
국적 그리스

요약 오리게네스는 성서신학을 탄생시킨 인물로 그의 대표작은 <구약성서>의 6가지 판본을 병기해놓은 <헥사플라>이다.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신학자였으며 성서, 체계적 신학, 그리스도의 변증적 저술 등을 담은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는 나태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그리스도교 최초의 체계적 사색가로서 이후의 신학사상 발전에 공헌했다.
그의 신학사상의 근본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철학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데 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방법이 성서의 비유적 해석이다. 그때까지 기독교인들은 철학을 부적절한 이교도의 것으로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와 반대로 철학자들을 기독교 이전의 기독교인들로 범주화하여 해석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전통을 물리치면서 신학적인 지식과 철학적인 지식을 새롭게 종합하려 했다.

목차

접기
  1. 저서
  2. 신학체계
  3. 영향
오리게네스(Oregenes)
오리게네스(Oregenes)

대표작은 〈구약성서〉의 6가지 판본을 병기해놓은 〈헥사플라 Hexapla〉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는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교회역사가인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에우세비오의 기록이 더 정확한 듯함).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의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202년의 박해 때 순교하자, 오리게네스는 어머니와 6명의 남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처음에는 귀부인의 집에서 살다가 그뒤 문법을 가르쳐서 돈을 벌었으며,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제자였던 그는 주교 데메트리우스의 권한에 힘입어 클레멘스를 계승하여 교리문답학교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알렉산드리아 학파). 에우세비오는 오리게네스가 청년시절에 학생들에게 교리문답을 자유롭게 가르치기 위해서 스스로 거세(去勢)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밖에도 오리게네스의 뛰어난 정절을 헐뜯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 이 이야기도 단순히 그를 비방하는 험담에 불과한 듯하다 에우세비오가 전하는 오리게네스의 생애에는 성인들의 전설에 붙기 마련인 과장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으므로,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는 신플라톤주의 창시자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강의를 들었다고 하며, 오리게네스도 편지에서 자신의 '철학 스승'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강의에 참석하면서 헤라클라스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헤라클라스는 처음에는 후배 동료였다가 다음에는 경쟁자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자 오리게네스와 교제를 끊었다. 처음에 오리게네스는 헤라클라스를 찾아가 자기를 도와 교리문답학교에서 기초과정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여유 있는 시간에 좀더 높은 수준의 교육과 연구에 몰두했다. 이 기간(212경~)에 히브리어를 배우고 자신의 저서 〈헥사플라〉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라는 이름의 부유한 그리스도교인을 이단 발렌티누스의 가르침에서 개종시키고 자기의 많은 저서들을 헌정했으며, 많은 논문과 주석을 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신변잡기 Stromateis〉·〈부활에 관하여 Peri anastaseos〉·〈제1원칙들에 대해서 De principiis〉를 썼고, 또한 발렌티누스의 추종자이자 영지주의자인 헤라클레온의 주석을 논박하기 위해 방대한 〈요한의 복음서〉 주석을 쓰기 시작했으나, 그 중간중간에 연구를 중단하고 로마(이곳에서 신학자 히폴리투스를 만났음)·아랍·안티오크·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곧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여기저기서 설교자로 많은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우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이 자유분방한 평신도 교사를 어떻게 하든 통제하려고 했고, 그가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리아에서 설교하도록 허락을 받았을 때에는 특히 분개했다.

229~230년경 오리게네스는 발렌티누스의 또다른 추종자 칸디두스와 논쟁을 벌이려고 그리스를 향해 길을 떠났고, 도중에 카이사리아에서 사제로 임명받았다. 칸디두스는 사탄이 회개할 수 없다는 점을 근거삼아 구원과 멸망이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예정되어 있다는 발렌티누스의 주장을 변호했고, 이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만일 사탄이 자의(自意)에 따라 타락했다면 그도 역시 회개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오리게네스가 사제 임명을 받은 데 잔뜩 화가 나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견해에 크게 놀라 교회회의를 통해서 그를 단죄하려고 했으나, 그리스와 팔레스타인 교회는 데메트리우스데메트리우스의 뜻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뒤 오리게네스는 카이사리아에서 살면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 학생들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는 훗날 네오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된 그레고리오스 타우마투르구스가 있다.

카이사리아로부터 여행을 계속하여 235년 막시미누스의 박해 때에는 카파도키아에 머물며 암브로시우스에게 〈순교에 대한 권고 Exhortation to Martyrdom〉를 써보냈다.

이 박해기간 동안에는 한 공의회(아랍에서 열린 듯함)에서 벌어진 논쟁의 일부 내용을 〈헤라클레이데스와의 논쟁 Discussion with Heracleides〉이라는 제목으로 파피루스에 기록했는데, 이 파피루스에는 어떤 지역의 주교가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을 부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고, 그리스도론에 관한 쟁점들과 영혼이 실제로 피[血]인가의 여부 등에 관한 불분명한 논쟁들이 실려 있다. 황제 데키우스의 박해기간 동안(250) 오리게네스는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했으나, 그뒤 여러 해를 더 살다가 죽었다.

티레에 있는 그의 무덤은 숭배되었는데, 이 무덤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십자군 원정 시기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입증된다.

저서

오리게네스는 〈구약성서〉 그리스어 본문 연구와 성서 전체에 대한 해석을 필생의 작업으로 삼았다.

〈헥사플라〉는 〈구약성서〉 판본들을 병기한 책으로서, 히브리어판, 그 번역본인 70인역(권위있는 〈구약성서〉 그리스어 역본)·아킬라역·심마쿠스역·테오도티온판이 그 대상이었으며, 〈시편〉의 경우에는 다른 두 번역본(이 가운데 하나는 오리게네스가 요르단 계곡의 항아리에서 발견했음)이 더 검토되었다. 〈헥사플라〉를 제작한 목적은 히브리어 성서만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랍비들과 논쟁을 벌이기 위한 근거를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오리게네스의 주석학 저서들은 주해(교육받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서 쓴 학문적인 해석), 여러 계층의 회중들을 위한 설교, '스콜리아'(특정 구절이나 책에 대한 개별적인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무려 32권이나 되었던 〈요한의 복음서〉 주해들 가운데 현존하는 필사본은 모두 뮌헨에 보관되어 있는 코덱스(책 모양의 사본)에 실려 있는데, 몇 권에 지나지 않는다(요한).이 사본과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보관되어 있는 관련 필사본 하나만이 그가 쓴 〈마태오의 복음서〉 주석서 10~17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본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마태오). 이 주석의 단편들은 오리게네스의 주석학 저서가 대부분 그렇듯이, 〈카테나이 catenae〉('고리', 즉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성서주석 선집)로 알려진 문서들 가운데 남아 있다.

〈아가〉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주석은 그리스도교 저자 티라니우스 루피누스(365~410/411)가 과감히 생략하고 줄여서 옮긴 라틴어 편역본으로 남아 있다. 〈창세기〉로부터 〈판관기〉(〈신명기〉는 제외시킴), 〈시편〉 36~38편에 대한 설교집은 루피누스의 라틴어 번역판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교의 대학자 예로니모(347경~420경)는 〈아가〉·〈이사야〉·〈예레미야〉·〈에제키엘〉·〈루가의 복음서〉에 대한 설교들을 번역했다. 이들 라틴어 설교집은 중세 수도원에서 널리 읽혔고, 필사본도 많이 전해진다. 〈예레미야〉에 대한 설교집의 그리스어 원본은 에스코리알(스페인에 있는 역사적인 건축물)에 소장된 한 사본에 남아 있으며, 엔도르의 무당에 관한 설교(사무엘의 초혼이 실제로 있었다는 주장 때문에 일찍부터 비판을 불러일으켰음)의 그리스어 원본은 뮌헨에 소장된 사본과 파피루스에 실려 있다.

〈제1원칙들에 대해서〉는 231년 이전에 쓴 책으로서, 방대한 규모와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그리스도교 교리를 진술했으며, 그 밑에 깔린 전제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사도들로부터 받은 신앙규율(〈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하느님인 창조주, 창조 이전부터 존재한 주의 강생, 삼위일체의 한 위격인 성령, 이성적인 사람들의 자유, 육체에 속박을 받지 않는 영혼, 세상의 일시성, 장차 올 심판)에 충실해야 하지만, 지식인 신자들은 여기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칼케돈 공의회(451)가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법령들을 공포하기 오래 전부터 저술활동을 했다. 이 시기는 400년대보다 더 폭넓은 분야의 교리를 공개적으로 논할 수 있었으며, 〈제1원칙들에 대해서〉에 나타나는 사상은 후대의 정통신앙 표준들에서 벗어나는데, 원본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음의 자료를 가지고 그 내용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들 자료에는 〈필로칼리아 Philocalia〉(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와 바실리오스가 오리게네스의 성서주석을 예시하려고 편집한 선집), 루피누스의 라틴어 편역(이단설 기미가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썼다고 밝힘), 후대 저자들, 특히 예로니모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저서(오리게네스가 이단임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그에게 불리한 구절들을 인용함) 등이 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를 반박한 저자들이 쓴 여러 논쟁서는 그의 글을 잘못 인용하는 경우가 있고, 또한 후대 오리게네스주의자들의 글을 그의 글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교도의 비판에 맞서 그리스도교를 변호한 대작 〈켈수스에 대항하여 Contra Celsum〉(248경)는 암브로시우스의 요청에 따라 쓴 책으로서, 바티칸의 한 사본에 전체 내용이 남아 있으며, 〈필로칼리아〉와 파피루스들에도 단편들이 남아 있다.

이 책은 2세기의 반(反)그리스도교 철학자 켈수스의 〈참된 교리(강연) Alēthēs logos〉를 한 문단씩 응답한다. 따라서 이 책은 2세기의 이교 지식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바라본 시각과 이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답변을 알려주는 주요자료이다. 오리게네스와 켈수스는 둘 다 플라톤 철학을 전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그외에는 크게 견해가 달랐다. 켈수스는 단적으로 그리스도교가 고전문화의 종교전승과 지적 가치를 유치하고 촌스럽게 뭉개버렸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그와 끈질기게 대결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도 철학적으로 사고할 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비이성적 대중의 편견도 아니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나 반체제 인사들의 피난처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케임브리지에 소장된 한 사본에 실린 〈기도에 관해서 On Prayer〉는 오리게네스가 233년경에 쓴 소책자로서, 주기도문을 해설하고 기도에 관한 몇 가지 철학적인 문제들을 논했다.

그는 개인의 경험과 상반되는 숙명론에 빠지면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며, 가장 고결한 기도는 영혼이 물질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사람과 하느님을 중재하는 그리스도와 수동적이고 내면적인 합일을 하는 것이라고 논했다.

신학체계

오리게네스가 교사로서 쌓은 경험은 영적인 깨달음의 범위를 꾸준히 강조한 데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신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로 보았고, 초신자들도 성인들과 함께 끊임없이 사다리를 오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의 신학 전체는 결국 하느님의 선함과 피조물의 자유에 초점을 둔다. 만물 위에 초월해 있는 하느님이 모든 존재의 원천이며, 선하고 의로우며 전능하다고 본다. 이 전능은 도덕성이 없는 단순한 힘이 아니어서 아무도 이 전능에 호소하여 불합리하거나 비(非)정상적인 것을 합리화할 수 없다.

하느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로고스'(말씀)를 통해서 이성과 영혼을 지닌 존재들을 창조했으며, 이 창조 행위에는 하느님 편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제약하는 일이 포함된다.

하느님은 창조질서를 초월하기도 하고 그 안에 내재하여 활동하기도 하기 때문에, 제약을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며, 자유롭기도 하고 필연성 아래 있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보면, 하느님은 영원히 우주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 선한 힘이 어느 때고 발휘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다른 점에서 보면 하느님은 우주를 꼭 필요로 하지 않으며, 우주가 존속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한편 이성을 지닌 존재들은 하느님을 숭배하기를 게을리하여 타락했다. 하느님은 물질세계를 훈련도구로 창조했다(지진이나 전염병 같은 천재지변은 인간들에게 이 세상이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님을 일깨워 줌). 오리게네스는 영혼들이 각기 다른 차원에 떨어져 어떤 것은 천사가 되고 어떤 것은 인간의 육체 속에 떨어지며, 또한 가장 악한 영혼들은 마귀가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영혼의 선재성을 믿었으나, 이성을 지닌 영혼이 동물의 육체로 들어간다거나 윤회한다고 믿지 않았음). 구원은 하느님이 그 섭리로 베푸는 위대한 교육으로서, 모든 영혼을 본연의 지복(至福)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심지어 사탄까지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타락하거나 이성과 자유를 상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바로잡아줄 목적으로 징계는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 징계는 고치기 위한 것이다. 단순한 신자들은 그것을 보응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진리 자체는 아니며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적 훈계이다.

구원의 절정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던 성자(聖子)가 강생한 사건이다.

다른 영혼들이 모두 타락한 상태에서 한 영혼만은 타락하지 않고 성부를 경배하며 그와 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부·성자·성령, 즉 삼위일체 중 제2위격인 신적인 '로고스'(성부에게 종속되지만, 무한한 창조주와 유한한 피조물 사이에 놓인 심연을 놓고 보면 하느님 편에 속하는 것)는 성부와 연합함으로써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몸으로 강생했다. 그리스도의 영혼과 로고스는 마치 육체와 영혼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쇠와 불처럼 매우 강렬하게 연합했다.

그리스도의 영혼도 다른 모든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그 연합은 너무 강렬한 것이었으므로 모든 변덕의 성향을 없앴고, '로고스'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자기와 연합시켰으며, 이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준 예가 바로 변화산에서 예수가 변모된 모습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오리게네스는 반(半)영지주의 저서 〈요한행전 Acts of John〉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육체가 당대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적 수준에 따라 각기 달리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육체 안에서 뛰어난 점을 보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주와 하느님을 발견했다. 〈요한의 복음서〉 주석에서 오리게네스는 어린양·구속자·지혜·진리·빛·생명 등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들을 모아놓았다. 성부는 한 분이지만 성자는 여럿이고 또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이 단계들은 지복직관과 지성소(至聖所)로 오르는 신비주의적 상승의 사다리에 달린 가로대들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의 전형이다.

교회뿐만 아니라 신자 개인은 '로고스'의 신부(新婦)이며, 이 연합의 신비는 〈아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예로니모는 오리게네스에게 열중해 있던 시기에 오리게네스의 〈아가〉 주석을 그의 걸작으로 꼽았다. 이처럼 구원은 타락한 인간을 물질에서 영으로, 그림자에서 실체로 회복시켜 주는데, 이 원리는 인간 속에 거하는 성령이 법·역사·신화·비유 등의 문자 아래 가리워져 있는 성서와 성례전들로 직접 예시된다.

오리게네스는 주석가의 임무는 알레고리를 꿰뚫고 성서라는 물체 안에서 그 혼과 영을 찾아내고 그것이 개별적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실존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정확한 해석(비평적 해석)은 영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오리게네스는 성서 계시와 신자의 영적생활이 모두 점차 발전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을 바로잡아주는 '영혼의 학교'로서, 그 기초교육은 현세에서 받고 고등교육은 장차 올 세상에서 받게 되는데, 장차 올 세상에서는 나무와 건초와 그루터기를 태워 정결하게 하는 불세례를 받음으로써 대속(代贖)과 성화(聖化)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은 단 하나의 피조물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지옥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은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에 지옥은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되겠지만, 결국 하느님의 사랑이 이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만물을 그에게 굴복시키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으며, 자유는 이성을 지닌 피조물에게서 뗄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에 하늘나라도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덕(德)에서 자유의지를 제거한다면, 그대는 그 본질을 파괴할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영혼들이 원상태를 회복하는 순간 드라마는 전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의 순환을 믿었지만, 오리게네스는 그와 정반대되는 입장에서 세계의 순환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유는 궁극적인 끝이 없음을 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향

만일 정통신앙이 지향(intention)의 문제에 집중했다면 오리게네스보다 더 정통신앙을 지닌 신학자는 없을 것이며, 그보다 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 헌신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현세를 부정했으며, 심지어 편협한 기질도 갖고 있었다. 그의 주석에 나타나는 통찰력과 설교에 배어 있는 열정적인 신앙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경건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성서 주석과 금욕주의 이상은 크게 영향을 미쳐 동·서방 교회를 망라한 주석가들이 마음대로 표절했다. 그는 수도원주의의 발생에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의 이상들은 수사(修士)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6~399)의 저서들을 통해서 그리스 금욕주의 전승에 흘러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반(半)펠라기우스주의 수사 요한네스 카시아누스(360~435 : 인간의 도덕적인 노력의 가치를 강조함)와 서방교회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러 차례 이단혐의를 받아왔다.

그는 생전에 복음을 이교철학으로 더럽혔다는 혐의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죽은 뒤에는 비판적인 시각들이 점점 켜져서,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 그의 부활 교리를 비판한 그리스의 그리스도교인 올림포스의 메토디오스에게는 정중하게(300경), 그리스도교 이단들을 논박한 에피파니우스에게는 모욕적으로(375), 루피누스와의 논쟁에서 반(反)오리게네스 입장을 취한 예로니모에게는 신랄하게(393경~402) 각각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특히 동방교회에서 더욱 그러했으며, 그 예로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 교장 맹인 디디무스,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 특히 카파도키아의 교부 바실리오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루피누스가 번역한 〈제1원칙들에 대해서〉가 물의를 빚었고, 동방에서는 에피파니우스의 비판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탄압을 받았다.

6세기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라우라 공동체'(독거 수도원 공동체)는 지식인 수사들 사이에서 펼쳐진 오리게네스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들은 영혼선재설·보편구원설·구형(球形)부활육체설(오리게네스 자신은 이 신조를 지지하지 않았음) 등을 믿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오리게네스를 단죄하는 긴 칙령을 발표하여 그를 둘러싼 논쟁을 마감했으며(543), 그뒤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5차 에큐메니컬 공의회(553)는 단죄 대상을 디디무스와 에바드리우스에게까지 확대했다. 그런데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비잔틴 수사인 고백자 막시무스(550경~662경), 아일랜드 신학자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게나(810경~877경) 등의 저서를 통해 계속되었고,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그의 정통성을 놓고 논쟁이 벌어져왔다.

일반적으로 서방교회 저술가들은 동방정교회 저술가들보다 그에게 더욱 우호적이었다.

오리게네스의 학설에 대한 주요한 반론들로는 ① 성자를 성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부정한 4세기 이단설 아리우스주의의 선구자가 된 점, ② 육체의 부활을 영적인 뜻으로 해석한 점, ③ 지옥을 부정함으로써 사람들의 도덕적 열정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보편구원설을 주장한 점, ④ 영혼의 선재성과 세계의 순환을 주장한 점, ⑤ 알레고리 해석을 사용함으로써 구원사(救援史)를 무시간적인 신화로 전락시킨 점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근거없는 반론들은 하나도 없다.

이와 동시에 사도시대 이후 초기 교회에서 오리게네스가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는 예로니모의 첫 판단을 정당하다고 인정할 만한 이유도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