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니모

예로니모

다른 표기 언어 히에로니무스 , Eusebius Hieronymus
요약 테이블
출생 347경, 달마티아 스트리돈
사망 419/420,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요약 예로니모의 영어권에서의 이름은 제롬이며 가톨릭 및 정교회의 성인 중의 하나이다. 한 동안의 은둔생활 뒤에 사제가 되었으며, 교황 다마소의 비서로 일했고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다. 성서 및 금욕주의, 수도원주의, 신학에 대해 쓴 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라틴어 번역 성서 <불가타>가 잘 알려져 있다. 생애 말기에 교황 다마소의 비서가 되어 로마로 돌아와 성서연구를 계속하면서 금욕생활을 보급했다. 교황의 요청으로 오리게네스의 <아가> 설교 2편을 번역하고, 옛 라틴어 복음서 역본들을 자기 방식대로 개정함과 아울러 <시편>의 옛 라틴어 역본을 처음 개정했다.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을 담았다.

목차

접기
  1. 초기생애
  2. 후기 저작
  3. 영향
예로니모(Eusebius Hieronymus)
예로니모(Eusebius Hieronymus)

전통적으로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학식이 높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동안 은수자(隱修者)로 지낸 뒤 사제가 되었고, 교황 다마소의 비서로 일했으며, 389년경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다. 성서·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라틴어 번역성서 〈불가타〉로 유명하다(→ 성서 번역).

초기생애

스트리돈(지금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근처인 듯함)에서 부유한 그리스도교 부모에게 태어났다.

12세에 로마로 유학해 문법·수사학·철학을 공부했다. 라틴 문학에 매료된 진지한 학자로서 카타콤(지하묘지) 집회에 자주 참석했고, 366년경 로마 유학을 마칠 무렵 교황 리베리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뒤 20년 동안 일정한 주거지를 정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여행했으며, 트레베리스(지금의 트리어)에서 수도원 생활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369년초 스트리돈 부근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에서 주교 발레리아누스를 중심으로 모인 금욕주의 엘리트 집단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 집단에는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저서들을 번역한 저자 겸 학자인 루피누스도 있었다.

373년경 이 집단이 흩어지자(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음) 동방을 통해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여행으로 몸도 지치고 마음에도 갈등이 생겨 안티오크의 사제 에바그리우스의 손님으로 지냈으며, 아마 그곳에서 〈일곱 매질에 관하여 De septies percussa〉로 알려진 최초의 저서를 쓴 듯하다. 안티오크에서 중병에 걸렸을 때인 375년 사순절 중반에 유명한 꿈을 꾸었다. 이 꿈에서 하느님의 법정에 끌려가 그리스도교도라기보다는 키케로주의자(BC 1세기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추종자)로 고소를 당해 심한 매질을 당한 뒤 다시는 이교 문학을 읽지도 지니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오랜 뒤 루피누스와 논쟁을 벌일 때 이 꿈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기는 했지만, 이 꿈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고전문학을 읽을 수 없었고, 영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 꿈의 결과로 최초의 해석학 저서, 즉 성서의 〈오바디야〉에 대한 알레고리 주석을 썼는데, 21년 뒤에는 이 책을 젊었을 때 무지한 열정으로 쓴 것으로 간주해 평가절하했다.

375년에는 칼키스 사막에 들어가 2년 동안 은수자로 지내면서 마음의 평정을 구했으나,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78년 예로니모는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이 편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제 기능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2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사제임명을 받았다.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의 해석학 강의에 참석했고, 베레아의 나자렛파(유대인 그리스도교도)를 방문하여 이들이 갖고 있는 히브리어 복음서가 〈마태오의 복음서〉 원본인지를 조사했다. 379~382년 거의 3년 동안 예로니모는 성서연구를 하면서 지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열렬한 제자였던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신학자 이코니움의 암필로키우스와도 알게 되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그리스어 실력을 쌓았고, 오리게네스의 주석에 대해 점점 더 감탄하게 되었으며, 오리게네스의 〈구약성서〉 설교들 가운데 14편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의 〈연대기 Chronicon〉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378년에 마쳤다.

그러나 생애 말기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교황 다마소의 비서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일이었다(382~385). 로마에서 성서연구를 계속하면서 금욕생활을 보급했고, 다마소의 요청으로 간단한 해석학 논문들을 쓰고 오리게네스의 〈아가〉 설교 2편을 번역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수한 그리스어 사본들을 토대로 옛 라틴어 복음서 역본들을 자기 방식대로 개정한 일과 70인역(〈구약성서〉 그리스어 역본)의 몇몇 사본을 토대로 〈시편〉의 옛 라틴어 역본을 처음 개정한 일이다.

후기 저작

예로니모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당시에는 다양한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단에 반대한 주교 에피파니오의 선동으로 동방에서 일어난 반(反)오리게네스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오리게네스의 견해에 반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389경~392년에 〈루가의 복음서〉에 대한 그의 설교 39편을 번역한 바 있음) 친구들인 예루살렘 주교 요한네스와 루피누스에 대해서도 반대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처음에 편지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 아프리카 사람이 자신의 성서 관련저서들을 혹평한 데 대해 화를 냄으로써 서로에 대한 존경에 상처를 입힐 뻔했다. 392(또는 393)년 이교도들의 이교문화에 대한 자부심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도교 저자들의 목록인 〈유명한 사람들에 관하여 De viris illustribus〉를 썼다.

처녀성과 혼인의 동등성을 주장한 수사 요비니아누스에 반박하여 신랄한 논쟁서 〈요비니아누스를 반박함 Adversus Jovinianum〉(393)을 썼다. 이 책은 대부분 명쾌한데 지나치게 거칠고, 때로 혼인을 쓸데없이 모질게 다룬 2, 3세기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제 비길란티우스에 반박해 어느날 밤 수도원주의, 성직자 독신주의, 순교자 숭배와 관련된 특정 의식들을 옹호한 〈비길란티우스를 반박함 Contra Vigilantium〉(406)을 썼다.

펠라기우스 문제(인간 구원에서 신의 은총이 차지하는 역할을 최소화한 이단으로 영국의 수사 펠라기우스의 이름을 땀)는 이 이단설을 주장한 저자가 직접 나타남으로써 로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식(移植)되었고, 예로니모는 이에 대해 뛰어난 논쟁서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는 대화 Dialogi contra Pelagianos〉(3권, 415)를 썼는데, 가공의 질문자들을 등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객관화했다(→ 펠라기우스주의).

베들레헴에서 벌인 성서제작 작업에는 성서학자들에게 유익한 2권의 서론적인 저서들이 포함되는데, 팔레스타인 지명들에 관한 에우세비오의 책을 번역 및 각색한 〈지명에 관한 책 Liber locorum〉과 히브리어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가공적인 어원 또는 출처와 함께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 〈히브리 인명 해석서 Liber interpretationis Hebraicorum nominum〉가 그것이다.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Hexapla〉(히브리어 본문과 그리스어 역본을 나란히 6열로 배열하여 편집한 책)에 기초하여 70인역의 옛 라틴어 역본을 꾸준히 개정한 결과, 〈전도서〉·〈잠언〉·〈아가〉·〈역대기 상〉·〈역대기 하〉·〈욥기〉를 개정하게 되었고, 〈시편〉에 대한 로마 개정본에 오리게네스의 발음부호들을 덧붙였다. 391~406년 원문을 토대로 〈구약성서〉 라틴어 역본을 제작했는데, 도구들이 매우 빈약했고, 또한 이 작업과정에서 받은 반발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

베들레헴 주석들은 때로 성급한 집필, 전임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 알레고리 해석에 대한 편애 등이 엿보인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문제들에 관한 책 Liber Hebraicarum quaestionum in Genesim〉은 지리, 어원, 랍비 전승(성서시대 이후 유대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주로 다룬다. 〈시편〉에 대한 짧은 해설서들과 〈시편〉 10~16편에 대한 더욱 학문적인 해설서들을 썼다. 〈전도서〉 주석(387경)은 히브리 본문을 사용한 최초의 라틴어 주석이라는 점에서 해석학의 표본이다. 대표적인 주석은 아마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일 것이다.

〈신약성서〉에 대해서는 〈마태오의 복음서〉를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여 해설했고, 사도 바울로의 편지 4편(〈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디도에게 보낸 편지〉)을 알레고리 해석법을 강조하여 해석했으며, 304년경 순교한 라틴 해석학자 페타우(오스트리아)의 주교 빅토리누스가 천년지복설(千年至福說 : 장차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견해)에 근거하여 쓴 〈요한의 묵시록〉의 주석을 개작했다.

그가 남긴 많은 편지는 해석학 문제에 대한 소논문들이며, 휘하 수사들에게 주는 성서 본문에 대한 설교들이다(→ 성서비평).

베들레헴에서의 금욕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가 벌인 많은 논쟁들에서뿐만 아니라, 유목민들에게 붙잡혀간 수사 말쿠스에 대해 쓴 전기, 기적과 여행 이야기들이 담긴 힐라리우스 전기, 콥트인들이 남긴 금욕주의 저서들(예를 들면 〈파코미우스의 규율 The Rule of Pachomius〉)에 대한 번역서, 수사들에게 한 설교들, 편지의 중요한 부분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영향

예로니모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다. 깊은 사색가라기보다는 뛰어난 학자였고, 사색적인 신학자라기보다는 견고한 전통주의자였으며, 해석학자로서보다는 편집자로서 더욱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생애는 학문과 금욕주의를 절충한 것이며, 그가 남긴 편지는 사가·성서학자·신학자 들의 학문적 관심을 끌었다. 그의 영향은 특히 중세 초반에 더욱 폭넓고 깊었다. 주로 매체는 〈불가타〉(그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 역본)였으나, 해석학자 겸 인문주의자로서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 사상의 많은 부분을 서방에 전달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