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소 1세

다마소 1세

다른 표기 언어 Saint Damasus I 동의어 제 37대 교황
요약 테이블
출생 304경, 로마
사망 384. 12. 11,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축일은 12월 11일. 교황(366. 10. 1~384. 12. 11 재위).

재위 동안 로마 교황청의 우위권을 강력히 주장했다.

선임 교황 리베리오 재임기에는 부제를 지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교황 리베리오를 추방하자 리베리오를 따라갔다. 그러나 나중에 로마로 돌아와 황제가 앉혀놓은 친(親)아리우스파 대립교황 펠릭스 2세를 인정했다. 365년 11월 22일에 펠릭스가 죽은 뒤 다마소는 리베리오와 화해했지만, 그의 변절로 말미암아 생겨난 적들은 그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 내내 괴롭혔다.

다마소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황 후보였던 우르시누스를 지지하는 소수파가 그에게 도전했다. 황제는 다마소 편을 들어 우르시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추방했다.

적극적으로 이단을 억압했고, 2차례의 교회회의(368, 369)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우스 주교와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의 비정통적 가르침을 이단으로 판정했다. 4세기 때의 여러 이단에 대한 24개의 파문장을 남긴 다마소는 동방의 아리우스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터키의 거의 모든 교회를 관장하는 카이사리아의 주교 성 바실리우스와 장기간의 협상에 들어갔다. 아리우스파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의 견이 일치했지만, 정책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다마소는 로마 교구를 교회의 설립자 사도 베드로가 세운 사도적 교구라고 주장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380년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사도 베드로가 가르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라고 선언하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주교들이 선언한 교리만을 정통으로 인정했다. 로마 교구의 우위권은 382년 다마소가 소집하여 로마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아마도 새로운 로마임을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플의 힘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 이 교회회의에 참석했던 성 예로니모(제롬:342~420)는 계속 로마에 머물러 다마소의 비서이자 측근이며 친구가 되었다. 다마소로부터 라틴어 번역 성서를 개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 라틴어 성서는 그후 불가타(Vulgata)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마소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 라틴어가 미사의 공식 언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한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내어 수많은 묘비명을 썼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카타콤(지하 묘지)을 복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아가 열심히 교회를 세우고 복구하는 사업에 힘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