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클레멘스

다른 표기 언어 Titus Flavius Clemens
요약 테이블
출생 150경, 아테네
사망 211(~215)

요약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2번째 지도자 교사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은 <권고>, <교사>, <잡기>로 구성된 3부작이다.
과거에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이자 기록상 최초의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 교장 판타이누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음 180년경 스승을 이어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 뒤 20년 동안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 기간에 윤리와 신학에 관한 저서들과 성서 주석들을 여러 권 썼고, 이단인 영지주의자들과 투쟁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지성화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던 그리스도교도들과 논쟁을 벌였고, 훗날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된 예루살렘의 주교 알렉산데르 등의 인물들을 교육시켰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신앙과 지식의 역할에 관한 견해
  4. 부(富)에 대한 견해
  5. 클레멘스에 대한 평가

개요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2번째 지도자 교사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은 〈권고 Protreptikos〉·〈교사 Paidagōgos〉·〈잡기(雜記) Strōmateis〉로 구성된 3부작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초기생애와 경력

4세기 주교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부모는 아테네 이교도였다고 한다.

그의 초기생애에 관해서는 중요한 정보가 없다. 학생시절에는 이탈리아와 지중해 동부 지역들에 있는 학문의 중심지들을 두루 여행했다. 마지막 스승 판타이누스(과거에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이자 기록상 최초의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 교장)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음 180년경 스승을 이어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뒤 20년 동안 클레멘스는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가운데 윤리와 신학에 관한 저서들과 성서 주석들을 여러 권 썼고,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영적 기원, 정체, 운명을 계시해 주는 비밀스런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종교적 이원론자들)과 투쟁했으며, 그리스도교를 지성화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던 그리스도교도들과 논쟁을 벌였고, 훗날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된 인물들(예를 들면 예루살렘의 주교 알렉산데르)을 교육시켰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들 가운데는 유명한 3부작 외에도 재산의 사용에 관한 소책자 〈부자들의 구원에 관한 강론 A Discourse Concerning the Salvation of Rich Men〉, 도덕에 관한 소책자 〈인내를 권고함, 또는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 Exhortation to Patience or Address to the Newly Baptized〉, 발렌티누스(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영지주의자)의 추종자 테오도투스의 어록집에 클레멘스 자신의 주해를 붙인 〈Excerpta ex Theodoto〉, 해설 형식으로 쓴 〈Eclogae Propheticae〉, 성서 주석 〈개요 Hypotyposeis〉의 몇몇 단편들이 남아 있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도들과 그리스 학자들에게 사상과 행동 면에서 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전도계획을 내놓았다.

그는 이 계획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그리스 철학과 모세 전승의 역할을 이해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에 따르면 마치 모세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그러했듯이, 철학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진리로 인도하는 예비학습이라고 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교 신조들을 그리스 '파이데이아'(교과과정)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헬레니즘 문화 안에서 효과적으로 증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었다.

그 역시 2세기 문화환경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회비평가였다. "진리는 하나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영구히 흐르는 강처럼 각각 여러 곳에서 흘러온 지류들이 함께 흐른다"(〈잡기〉)라는 클레멘스의 견해는 오리게네스 밑에 있던 교리문답학교 교과과정의 바탕이 되었으며 중세의 4개 학과(quadrivium)와 3개 학과(trivium : 교양과목들)의 기초가 되었다(→ 인문과학). 그러나 이 견해는 지식인들, 특히 특별 지식(그노시스[영지])과 영성을 주장한 이단 영지주의자들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던 알렉산드리아의 교육받지 못한 정통파 그리스도교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년 주교가 된 알렉산드리아의 데메트리우스의 지도를 받은 그들은 율법주의적인 구원 교리를 가르쳤고, 그리스도교도는 믿음(피스티스)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했다.

신앙과 지식의 역할에 관한 견해

클레멘스는 이단 영지주의 집단들로부터 '그노시스'라는 용어를 빌려 쓰는 한편, 교육받지 못하고 고집스러운 정통파 신자들과 그리스의 '파이데이아'로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 교회에 가입한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그 용어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통해 영지주의자들과 율법주의적인 정통파 그리스도교도들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클레멘스의 신학에서 '그노시스'라는 용어는 지식과 신앙을 통합한 형태가 되었는데, 그는 이것을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전능하신 하느님을 존경하도록 가르치는"(〈잡기〉) 인격적인 봉사로 보았다. 그러므로 클레멘스의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자들은 이단 영지주의자들과는 정반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든 받지 못한 사람이든 불신자, 이단자, 동료 신자들에게 새로운 식견을 가르치고 높은 도덕생활의 모범을 제시해 줌으로써 증인 역할을 했다.

믿음을 강조한 그리스도교도들(이들은 사람이 율법적·도덕적인 용어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음)과 마찬가지로, 클레멘스도 믿음이 구원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믿음이 '그노시스', 즉 영적이고 신비스러운 지식의 기초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신자들의 두 차원(규율을 통해서 반응하고 율법의 수준에서 사는, 즉 믿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도들과, 규율과 사랑을 통해 반응하고 복음의 수준에서 사는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자들)을 구분함으로써 그가 죽은 뒤 약 반 세기 후 이집트에서 수도원제도가 꽃피는 토대를 마련했다.

클레멘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복음에 따라 살도록 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그리스도교도로서 사회적인 증인 역할을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신분과 존엄성에 영향을 주는 정치 및 경제력에도 개입했다.

그의 저서들에 들어 있는 '로고스-노모스'(말씀-율법, 또는 복음-율법) 주제와 부합되게 그는 하늘의 도시와 땅의 도시라는 이론을 언급했다. 2세기 뒤에 〈신국 De civitate Dei〉에서 같은 주제를 언급한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클레멘스도 하늘의 도시를 제도 교회와 일치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도는 로고스 아래에서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노모스 아래에서 땅의 시민답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느님과 카이사르(즉 국가)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경우 그리스도교도는 '더 높은 율법'인 로고스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의 뜻을 무시하고서 그들을 노예로 삼는 정부에 대해서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한 히브리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정면으로 반란을 일으켜도 괜찮다는 정당한 이유론을 주장했다.

이 견해에서도 그는 중세초부터 서양문화를 주도해온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한 전쟁론을 예시했다. 또한 인종차별주의가 노예제도의 기초라고 판단될 때는 그것을 비판했다.

부(富)에 대한 견해

2세기말에 이집트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의 증가, 높은 생활비, 점차 늘어나는 세금들은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결국 몰락하고 만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까지도 극히 무겁게 짓눌렀다.

〈교사〉의 내용을 보면 클레멘스의 청중은 대다수가 알렉산드리아 중상류 계층 출신이고, 소수만이 알렉산드리아 대중 출신의 가난한 지식인들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을 강조하던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구원을 얻고 싶어서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주어라"라고 한 명령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부의 문제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에 대해서 클레멘스는 〈부자들의 구원에 관한 강론〉을 써서, 부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중립적인 요인이며, 선을 위해서든 악을 위해서든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씀이 명령하는 것은 재산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애착을 갖지 말고 재산을 관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구제) 문제에서 클레멘스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을 시험함으로써 그 사람이 구제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소유물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기대어 살려고 하는 게으른 사람들이 정작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가로챌 수 있기 때문에 대상을 잘 살피고 구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와 수입의 분배). 201~202년 로마 황제 세베루스 때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박해가 가해지자 클레멘스는 교리문답학교 교장직을 어쩔 수 없이 사임하고 다른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그의 직위는 젊고 유능한 제자 오리게네스가 맡았는데,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大)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클레멘스는 팔레스타인에서 지난날 자신의 또다른 제자로서 예루살렘 주교로 있던 알렉산데르 밑에서 은신처와 일거리를 찾았고, 죽을 때까지 알렉산데르와 함께 지냈다.

클레멘스에 대한 평가

클레멘스는 선교 신학자, 변증가, 논쟁가 등 여러 역할을 하는 가운데 훗날 수도원주의, 정치 및 경제 사상, 신학 등의 분야에서 그리스도교 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된 사상들을 발전시키거나 자극했다. 신학 분야에서 그리스 교회는 그의 견해들을 오리게네스의 견해들과 매우 가깝다고 간주했고, 이 교회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이단설로 간주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간주하고 12월 4일을 그의 축일로 지켰다. 그러나 1586년 그의 견해들 가운데 일부에 대해 정통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자 교황 식스투스 5세는 로마 순교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