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Justinianus I
요약 테이블
출생 483,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지금의 세르비아 니시의 남쪽인 듯함)
사망 565. 11. 14, 콘스탄티노플
국적 비잔티움

요약 비잔티움의 황제(527~565 재위).
(영). Justinian Ⅰ. 정식 이름은 Flavius Justinianus. 본명은 Petrus Sabbatius.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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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외정책
  2. 교회정책

비잔티움 제국정부의 행정기구를 재편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534)으로 알려진 성문법 제정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일리리아 사람으로 농민 집안 출신이며 유스티니아누스라는 로마식 이름은 삼촌이었던 유스티누스 1세 황제에게서 딴 것이고 그의 출세는 삼촌의 덕택이었다.

젊었을 때 그의 삼촌이 고위 군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항상 그리스어의 악센트를 잘못 발음했다고 한다. 518년에 유스티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조카로서, 나이들고 자식이 없는 삼촌의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주도했다. 법적으로 유스티누스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525년에 부황제(caesar)의 칭호를 받았으며 527년 4월 4일 공동 황제(augustus)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여배우 출신으로 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인 테오도라는 황후가 되었다. 527년 8월 1일 유스티누스 1세가 죽자 그를 계승해 단독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법전편찬가 및 입법가로서의 업적이었다.

그는 법률연구를 크게 장려했으며 528년에 위원회를 설치해 제국의 법령을 담은 새로운 법전 〈칙법휘찬 Codex Constitutionum〉을 편찬하도록 했다. 이 법전은 529년에 발간되었고 530년에는 로마 법학자들의 저술을 요약·정리하기 위한 2번째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학설휘찬 Digesta〉이라고 알려진, 이 위원회의 저작은 533년에 나왔다. 이와 동시에 법학생들을 위한 안내서인 〈법학제요 Institutiones〉가 준비되어 533년에 발간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의 법률을 가장 최근의 것까지 수록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제2판은 534년에 발간되었다. 565년까지의 뒤이은 법령들은 〈신칙법 Novellae Constitutiones Post Codicem〉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입법활동의 많은 부분은 황제의 가장 중요한 사법각료였던 트리보니아누스가 제안하고 감독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유스티니아누스는 부정부패를 뿌리뽑고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사법제도를 마련해 백성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진정한 관심을 쏟았다.

그가 행한 조치에는 속주총독에 대한 적절한 통제와 부분적인 행정기구 재편이 포함되었다. 그와 동시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여러 다양한 군사원정, 특히 서방원정을 위해 재정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래 사람을 잘 발탁했다. 그에게는 두 사람의 뛰어난 각료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소아시아에서 온 카파도키아 사람 요한네스였으며 또 한 사람은 시리아인 페트루스 바르시메스였다.

요한네스는 531~541년에 민정총독을 지냈으며 페트루스는 543년부터 민정총독을 지냈다.

최초의 중요한 개혁조치는 535년에 속주총독 직책의 매관매직 행위인 '수프라기아'(suffragia)를 금지한 것이었다. 속주총독들은 자신들의 직책을 사들이는 데 막대한 비용을 쓰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속주의 하층민들에게 가렴주구를 행하는 것이 상례였다.

속주총독에 대한 훈령이 작성되었으며 도시 방어 임무를 맡은 방위장관(defensores civitatis)의 지위가 강화되고 사법권이 확대되어 속주 백성들이 총독의 법정에 가기 위해 비용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속주 행정제도의 개편이 있었다. 아시아나·폰티카·오리엔스 등의 주교관구를 개혁하고 이집트에서 비카리아트라는 행정관직을 폐지했으며 속주의 재편성을 비롯한 개혁이 실시되어 재정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순전히 내부적 요인으로 행정질서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는 이집트와 카파도키아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민간기관과 군사기관이 결합되었으며 총독에게 스펙타빌리스라고 하는 더 높은 지위가 부여되었다.

스펙타빌리스는 500솔리디(이후에는 750솔리디) 미만의 소송사건에 대해 최종판결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시리아같이 외적에 맞서 전략지점을 방어할 필요가 있는 지역에서는 민간기관과 군사기관을 별개로 유지했다.

이같은 단편적인 개혁은 때때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노력에도 속주총독들이 선정을 베풀기를 꺼리거나 그럴 힘을 갖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또한 커다란 행정관직이 없어지자 남은 길은 많은 비용을 들여 콘스탄티노플에 탄원하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카파도키아 사람 요한네스의 몰락 이후 다른 종류의 행정관직을 부분적으로 갱신하는 조치가 있었다.

요한네스와 그 후임자인 페트루스 바르시메스 치하에서는 외세 열강과 이민족 군주들에게 바치는 보상금 및 전쟁비용 때문에 재정문제가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특히 이탈리아의 속주들같이 되찾은 속주들은 대개 심하게 황폐화해 재정적자를 겪었으며 따라서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도 불규칙했다. 그러나 대체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두 장관들이 재정적 수완을 발휘한 덕택에 자금이 조달되었다. 이들은 세금을 효율적으로 징수하고 회계감사를 실시하며 착복행위를 추적하고 공공비용을 절감하는 한편 도시의 행사와 행정사무를 줄임으로써 속주와 수도에서 부자와 빈민을 똑같이 소외시켰다.

1가지 중요한 수입원은 로마 제국에서 오래전부터 열심히 장려해온 무역과 산업활동인데 특히 인도·동남아시아·중국이 중요한 무역상대였으며 향신료·향료·비단이 가장 비중이 큰 수입품이었다. 페르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면 물품의 가격이 올라가거나 심지어는 공급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특기할 만한 일은 속디아나(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누에를 들여와 마침내 비잔티움 시장에서 자립적인 비단 공급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생사의 판매는 정부독점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재무장관인 페트루스 바르시메스는 견직물에까지 독점을 확대해 또다른 수익성 높은 국가전매사업을 만들어냈다.

독직행위를 뿌리뽑고 빈부에 상관없이 기득권을 축소시키려던 정부의 시도는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자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53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니카 반란'(니카란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소리로 '무찔러라', '이겨라'라는 뜻)이 일어나 대중적 불만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녹색당과 청색당이라고 알려진 콘스탄티노플의 정파들이 연합해 시장 사무실과 공공건물을 비롯해 황궁과 거기 인접해 있는 '신성한 지혜의 교회' 일부까지 공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경기장에 모여 시장과 유스티니아누스의 두 각료인 요한네스와 트리보니아누스의 해임을 요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요구에 동의했으나 군중들은 이제 통제를 벗어나 특정한 이권집단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다음날 전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 히파티우스가 황제로 선포되었으며 몇몇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군중들과 제위 찬탈자는 경기장에 집결했다. 이 시점에서 2가지 요소가 작용해 유스티니아누스를 구원했다. 테오도라가 그를 설득해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도록 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 같은 장군들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아 경기장의 군중들에게 단호하게 맞섰다.

그들은 나르세스의 도움을 받아 우위를 차지했으나 반란군중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희생을 치렀다. 히파티우스는 처형당했다. 이 봉기로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날 뻔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쟁을 벌이고 육해군 병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며 외세열강과 이민족들에게 보상금을 바치는 데 많은 비용을 썼지만 그의 건축계획도 그에 못지 않았다. 그 계획은 수로와 교량의 건설,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의 전면적 재건설(이 항목은 그의 재위중에 되풀이된 비용이 많이 드는 공사였음), 그리고 광범위한 변경지대에 필수적인 요새와 방어진지 건설 같은 토목공사들을 포함했다.

또한 수도원·고아원·숙박소·교회 등의 건축도 거기 포함되었다. 그가 세운 교회 중에 하기아 소피아와, 성세르기우스와 성바쿠스 교회(작은 하기아 소피아라고 부름)는 지금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그대로 있다. 하기아소피아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세련되고 유명하며 그 명성에 걸맞게 가장 훌륭한 건축물의 하나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커다란 야망을 지녔으며 훌륭한 정신력과 지칠 줄 모르는 활력, 세부사항까지 파악할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옛 로마 제국만큼 복원하려고 한 유스티니아누스의 목표는 대체로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거의 모든 비잔티움 황제들이 품었던 목표이기도 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 비잔티움 통치와 그리스의 영향력을 몇 세기 동안 복원시켰고 북아프리카에서 반세기 이상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610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혼란에 빠졌을 때 황제 포카스를 폐위하고 제위에 오른 헤라클리우스라는 인물은 바로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법률적 업적과 웅장한 '대교회'(하기아 소피아 성당)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으며 당대의 문학과 시, 철학서들은 6세기의 비잔티움 제국 문명이 빼어났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대외정책

유스티니아누스의 대외정책에서 보였던 2가지 중요한 양상은 페르시아와의 해묵은 분쟁을 계속 이어간 것과 서방의 옛 로마 속주들을 이민족 침략자들에게서 되찾으려고 시도한 것이었다(이란사).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페르시아의 왕 카바드(코바드) 1세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를 비롯한 비잔티움 장군들이 상당한 전과를 올린 여러 차례의 전투가 있은 후 531년 9월 카바드가 죽으면서 휴전협정이 진행되었다. 카바드의 후계자인 호스로우 1세가 마침내 타협을 받아들여 532년에 영구평화조약이 비준되었다. 이 조약은 전체적으로 비잔티움에 유리했는데 비잔티움은 영토를 하나도 잃지 않고 라지카(소아시아의 콜치스)의 요충지에 대한 종주권을 페르시아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보상금으로 페르시아에 1만 1,000파운드의 황금을 지급해야 했으며 그 대가로 호스로우는 카프카스 지방의 방위에 대한 지원금 주장을 일체 철회했다.

540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골몰해 있을 때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방의 군대를 다소 소홀하게 방치했으며 그 틈을 타서 호스로우가 540년에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시리아, 비잔티움령 아르메니아로 진격해들어와 주요도시들을 차례로 약탈했고 541년에는 북부의 라지카를 침공했다.

다시 동방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벨리사리우스는 541, 542년에 역공세를 개시했으나 이후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 전쟁은 다른 장군들의 지휘 아래 장기간 질질 끌었으며 얼마간은 선(腺)페스트 발병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545년에 5년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551년 갱신되었으나 라지카는 페르시아인들이 완강하게 반환을 거부함으로써 휴전이 적용되지 않고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접전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557년 휴전협정이 다시 갱신되면서 이번에는 라지카도 포함되었다.

마침내 561년말경에 50년간의 휴전협정이 타결되었다. 비잔티움은 연간 3만 솔리디(금화)의 공물을 바치는 데 동의했으며 페르시아는 북방의 침략자들을 막아주는 중요한 방벽인 라지카의 그리스도교 소왕국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철회했다. 이렇게 해서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 왕의 맹렬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동방 속주들을 사실상 온전하게 보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 전선에서 그가 행한 정책은 결코 실패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빼앗긴 서방의 속주들을 '고통없이' 제국에 되찾아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으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아리우스파(그리스도교 이단세력)의 통치 아래 사는 가톨릭교도들이 겪는 시련을 못본 체 할 수도 없었다.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서 가톨릭교도들은 걸핏하면 박해를 받았다. 또한 콘스탄티노플과 동맹을 맺고 가톨릭 박해를 중단했던 나이든 반달왕 힐데리히가 530년 겔리메르에게 자리를 내주고 폐위된 이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반달족은 모리타니와 남부 누미디아의 무어 부족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부하 장수와 각료의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고 533년 6월 힐데리히를 돕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약 50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전함 92척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 8월에 아무런 저지를 당하지 않고 상륙이 이루어졌으며 534년 3월에 벨리사리우스는 왕국을 장악하고 반달 통치자 겔리메르의 항복을 받았다. 북아프리카는 제국의 일부로 재편되어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발레아레스 제도, 셉템(세우타)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옛 수도 로마가 자리잡고 있는 로마 제국의 본토 이탈리아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북아프리카와 비슷하면서도 특히 자기 야망을 실현시키기에 유리한 정세를 맞이했다.

바로 그의 전임자들 당시에 이탈리아는 이민족인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테오도리쿠스)가 통치했는데 그는 사실상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했지만 명목상으로는 비잔티움 황제의 대리인이었다. 테오도리크는 아리우스파였으며 처음에는 관용적이고 현명한 군주였으나 재위 말년에 이르러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다. 그가 죽고나자 아리우스파인 고트족과 가톨릭교도인 이탈리아인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동고트족 내에서도 분열이 생겨 일부는 격렬하게 비잔티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이 동료 가톨릭교도를 지원하고 이탈리아 속주에 대한 직접적 지배권을 되찾는 데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우스로 하여금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를 공격하도록 했으며, 한편으로는 사절을 보내 당시 갈리아에 정착해 있던 강력한 프랑크족의 지지를 얻도록 했다. 540년 동고트 왕 비티기스의 패전과 라벤나의 함락 이후 이탈리아에는 민정총독 아타나시우스의 통치 아래 제국의 행정권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가혹한 재정공출과 병사들의 약탈행위로 인해 새 체제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동고트족 대다수는 끝내 항복하지 않았으며 힐데바트와 에라리크의 짧고 불운했던 치세 이후에 그들은 541년 가을 토틸라(바두일라)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포했다. 토틸라는 유능한 지도자였으며 542년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여 543년 나폴리를 점령했다.

544년에 벨리사리우스가 부족한 병력을 이끌고 토틸라를 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도시들이 연이어 동고트족에게 함락되었으며 나중에는 라벤나·오트란토·앙코나만 겨우 비잔티움의 수중에 남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충분한 증원군이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도 진격할 수가 없었으며 결국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

그동안 토틸라는 대지주들과 사이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전국의 행정을 넘겨받았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타협하기를 원했으나 552년에 환관 사령관 나르세스의 지휘 아래 그를 치기 위해 막강한 대군이 파견되었다. 토틸라는 우세한 병력과 전략에 밀려 패배하고 부스타갈로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나르세스는 로마에 입성했으며 그 직후 베수비오 남쪽의 락타리우스 산에서 동고트족의 저항군을 격파했다. 553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지원을 받은 소규모의 분산된 저항이 끊이지 않다가 562년에 비잔티움이 이탈리아 전국을 장악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54년의 국사조칙(國事詔勅)으로 일련의 행정조치를 취해 이탈리아의 사회경제적 복지를 되살리고자 했다.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너무나 황폐해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생애 중에는 정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그가 죽은 지 3년 만에 국토의 일부분을 또다시 롬바르디아 침략자들에게 빼앗겼다.

발칸 반도 북방의 변경에 있는 로마 속주들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트라키아·다키아·달마치야는 불가르족슬라브족(스클라베니라고 알려졌음)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550~551년에 침략자들은 그들을 몰아내려는 군사적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비잔티움 영토에서 겨울을 나기까지 했다. 559년에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은 코트리구르 훈족과 합세해 남쪽으로 테르모필라이까지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트라키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는 장성(長城)에까지 이르렀다.

퇴역한 벨리사리우스가 민병대를 모아 이 위기를 막아냈다. 561년에는 아바르족이 침략자들과 합세했으나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다. 도나우 강 너머로부터 밀려드는 이같은 공세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으며 발칸 지방과 그리스에 요새와 방어진지가 구축되고 강화되었지만 비잔티움 사람들은 새로운 침입자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치지도 못하고 동화시키지도 못했다.

슬라브족에 뒤이어 불가르족은 결국 로마 속주 내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때때로 그들을 몰아내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교회정책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비잔티움 제국에서 교회와 국가는 천상의 왕국을 지상에 반영한 것으로 간주되는 단일한 그리스도교 제국의 본질적인 양측면으로서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녔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에게는 후대의 비잔티움 황제들이 그랬듯이 교회의 선정을 진작시키고 정통적 교리를 고수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제정한 법률들의 많은 부분이 종교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이교와 이단,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고전시대의 유산을 충분히 존중하는 식견이 있었지만 한때 유명했던 아테네 아카데미에서 이교도 교사들을 추방했는데 이는 그리스 철학보다는 이교사상을 겨냥한 조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마주친 주요한 교리문제는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인정받은 정통설, 즉 그리스도 안에 신과 인간의 본성이 공존한다는 견해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단성론의 견해 사이에 빚어진 갈등이었다. 단성론은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강력하게 대두했으며 민족의식의 성장 및 비잔티움 통치에 대한 불만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부인 테오도라도 단성론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방 속주들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반면에 그들에게 양보할 경우 거의 틀림없이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나 서방 쪽과 멀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정통적인 서방 주교들에게 단성론 주창자들과 타협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심지어는 비질리오 교황을 콘스탄티노플에 억류했으며 안티오키아의 중요한 교회인사들이 쓴 몇몇 글들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는 최종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안티오키아의 수상쩍은 글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는 단성론 주창자들을 무마하지 못했고 안티오키아의 교사들을 공격해 그곳 사람들을 노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비질리오 교황에 대한 대우와 교리문제를 결정하려는 시도로 인해 로마를 격앙시켰다.

재위 말년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는 공적인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신학적인 문제에 몰두했다(→ 아프타르토 가현설). 심지어 그는 이단에 빠져들어 564년말에 그리스도의 신체는 결코 썩지 않으며 십자가에서는 단지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아프타르토 가현설). 이에 즉각적인 항의가 일어났으며 많은 성직자들이 그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황제가 죽자 없던 일이 되고 565년에 그의 조카인 유스티누스 2세가 제위에 올랐다.

교회문제에 유스티니아누스가 관심을 갖고 활동한 것을 황제교황주의(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입장)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후대의 비잔티움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부섭정으로 여겼고 동로마제국에서는 라틴계의 그리스도교국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교회와 국가 사이에 명백한 구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