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

테오도라

다른 표기 언어 Theodora
요약 테이블
출생 500경
사망 548. 6
국적 비잔틴

요약 비잔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여성이다. 명석함과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가장 신임하는 조언자였으며,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마음에 맞는 종교·사회 정책을 추진했다. 어린 나이에 배우가 되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결혼해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녀의 미모와 총명함에 끌린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를 연인으로 삼고 귀족의 지위에 올렸다가 525년 결혼식을 가졌다. 527년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테오도라 역시 황후가 되어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얻었다. 테오도라는 권좌에 있으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공동통치자는 아니었으나 뛰어난 두뇌와 정치 문제를 다루는 수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비잔틴의 사실상 통치자라고 여겼다.

비잔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여성으로 추정된다. 명석함과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조언자가 되었으며,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마음에 맞는 종교·사회 정책을 추진했다.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공식적인 기록을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가 쓴 〈비사 Secret History〉의 찬양 내용과 꿰맞추어보면 테오도라의 어린시절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히포드롬(경기장)에서 곰 조련사로 일했고, 테오도라는 어린 나이에 배우가 되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결혼해 최소한 1명 이상의 아이를 낳았다. 한동안은 털실 잣는 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를 만났을 때 테오도라는 정통 신앙이 아닌 그리스도 단성론(Monophysitism)으로 개종한 뒤였으나, 그녀의 미모와 총명함에 끌린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를 연인으로 삼고 귀족의 지위에 올렸다가 525년 결혼식을 가졌다. 527년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테오도라 역시 황후가 되어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얻었다.

테오도라는 권좌에 있으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으며 공동통치자는 아니었으나 뛰어난 두뇌와 정치 문제를 다루는 수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비잔틴의 사실상 통치자라고 여기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중에 제정된 법령들에는 거의 대부분 테오도라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다. 그녀는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고 외국의 통치자들과 서신왕래를 갖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은 대개 황제가 해야 할 일이었다.

정치 문제에 대한 테오도라의 영향력은 532년 1월에 일어난 니카 반란에서 볼 수 있듯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 반란은 콘스탄티노플의 양대 정치세력인 '청색파'와 '녹색파'가 서로 결탁해 정부의 법령에 반대하여 황제를 따로 옹립했던 사건으로, 측근들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테오도라는 그대로 머물러 제국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그결과 유스티니아누스를 지지하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반란분자들을 히포드롬으로 몰아넣어 능지처참했다.

테오도라는 또한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를 엄단하는 법을 제정하고 이혼법을 여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인식한 최초의 통치자로 기억된다. 황후 자리에 있는 동안 많은 시간을 그리스도 단성론 탄압법 완화에 바쳤다. 그렇게 해서 533년 단성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통신앙 및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중시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종교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

테오도라의 얼굴 모습은 여러 예술 작품에 남아 있는데, 라벤나의 산비탈레 교회에 있는 유명한 모자이크 초상화도 그중 하나이다. 그녀가 암으로 죽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테오도라가 비잔틴 제국의 정치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그녀가 죽은 뒤부터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기(565)까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 법령이 거의 제정되지 않았다는 데서 드러난다.

테오도라
테오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