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사리우스

벨리사리우스

다른 표기 언어 Belisarius
요약 테이블
출생 505경
사망 565. 3
국적 비잔틴

요약 비잔틴 제국의 장군.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 시대에 로마의 군사적 전통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중요인물로, 제국 군대를 이끌고 사산 왕조(페르시아),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과 싸웠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쳤다.

벨리사리우스의 젊은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슬라브족 출신이라는 전설도 있지만 믿기 어렵고 정확한 혈통과 출생 날짜를 입증하는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호위병이었다가 황제의 주목을 받게 되어 25세 무렵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그의 공적인 경력을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꼼꼼히 기술했는데,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가 처음 원정에 나선 뒤 15년 동안 그의 개인 참모로 일하면서 장군의 활동을 직접 관찰해 기록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동쪽 이웃이자 경쟁 상대인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맞서 싸운 메소포타미아 전선에서 지휘관으로는 최초의 영예를 얻었다. 그는 530년에 다라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수라(칼리니쿰)에서는 패배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가 페르시아와 협상하여 전쟁을 끝냈을 때에는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다.

532년 1월 니카 반란이 일어났을 때 벨리사리우스는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는데 그의 부대가 반도들을 학살해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한편 이무렵 벨리사리우스는 과부인 안토니나와 결혼했는데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오랜 친구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영향력은 나중에 그에게 큰 힘이 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게르만족에게 점령당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벨리사리우스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533년에 그는 반달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소규모 병력과 함께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그는 2차례의 놀라운 승리로 불과 몇 달 만에 반달 왕국을 무너뜨리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 황제는 화려한 축하 행사를 베풀어 그의 개선을 환영했다. 동고트족에게서 이탈리아를 되찾는 작전은 535년 시작되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순식간에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고 본토에 상륙한 뒤, 나폴리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위티기스 왕 휘하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은 고트족은 537~538년 로마를 포위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훌륭하게 저항했다. 사령부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 때문에 더이상의 북진은 지연되었지만 540년에는 어려운 상황을 견디다 못한 고트족이, 만약 벨리사리우스가 황제가 된다면 항복하여 그의 지배를 받겠다고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황제는 벨리사리우스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왕위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참뜻을 숨기고 고트족의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였다가 고트족이 항복한 뒤 황제 칭호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의혹을 누그러뜨리지도 못한 채 고트족의 적개심만 일으키고 말았다. 황제는 그를 이탈리아에서 소환하고 잠시 냉대했지만, 이듬해에는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파견해 사산 제국과 싸우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규정을 어기는 병사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그후 황제에게 불충했다는 이유로 사령관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때 그가 불명예와 파멸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테오도라 황후가 안토니나에 대한 우정 때문에 이 일에 개입한 덕분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벨리사리우스의 무능한 후임자들 때문에 제국의 지배가 무너졌다. 벨리사리우스는 544년 다시 이탈리아로 파견되었지만 여느때보다 의심이 많아지고 인색해진 유스티니아누스는 충분한 병력과 군자금을 지원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벨리사리우스는 그후 4년 동안 이탈리아 해안지방에서 위험한 작전을 폈고 로마를 잠시 점령하기도 했지만 동고트족과 효율적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테오도라 황후가 548년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곧장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 다른 장군들은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지 못했고, 특히 환관인 나르세스는 황제의 충분한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승리조차 거두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벨리사리우스는 재산과 많은 호위병을 집안에 그대로 보유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559년에 훈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자 황제는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교묘한 전략으로 훈족을 겁주어 쫓아낸 다음 다시 은퇴했다. 3년 뒤에는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아마도 그는 결백했던 듯싶지만 명예를 손상당했다. 563년 황제의 총애를 어느 정도 되찾은 그는 죽을 때까지 평화롭게 살았으며, 그가 그토록 훌륭하게 섬겼는데도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던 황제 역시 그가 죽은 지 몇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벨리사리우스의 성격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2가지 주된 충동이 그의 생애를 이끌었는데, 그것은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한 충성과 아내 안토니나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서 자주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황제에게 순종하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를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주었다. 안토니나는 분명히 그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러나 무모하고 부도덕한 안토니나의 행동은 곧잘 그에게 당혹감과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프로코피우스가 쓴 〈아네크도타 Historia arcana〉에서 벨리사리우스는 그 시대의 주요인물들 가운데 비교적 호의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그의 명성은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후세에도 그에 대한 전설이 생겨났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뒤섞인 경우가 많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늘그막에 그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은 철학소설인 〈벨리세르 Bélisaire〉(1767)에서 루이 15세를 간접적으로 공격하고 관용과 정의를 탄원하는 수단으로 벨리사리우스의 전설을 이용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생생한 소설 〈벨리사리우스 백작 Count Belisarius〉(1938)은 이 장군의 생애를 가장 훌륭하게 소설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