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

다른 표기 언어 Pre-Columbian Civilizations

요약 16세기 스페인에 정복되기 이전에 중앙 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에서 발전했던 토착 인디언 문화(앞의 지역은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를 포괄하며 뒤의 지역은 남아메리카의 서부를 가리킴)(→ 색인: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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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중앙 아메리카 문명
  2. 중앙 아메리카의 전고전기 및 고전기 문명
    1. 개요
    2. 형성기
    3. 고전기(마야 문명)
  3. 중앙 아메리카의 후고전기 문명
    1. 개요
    2. 후고전기 문화의 성격
    3. 아스텍 문명
  4. 안데스 문명
    1. 개요
    2. 잉카 제국 이전의 시기
    3. 잉카의 기원과 팽창
    4. 스페인 정복기의 잉카 문명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Pre-Columbian Civilizations)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Pre-Columbian Civilizations)

구대륙의 고대 문명과 마찬가지로 고대 아메리카의 문명은 여러 왕국과 제국, 대형 기념물과 도시, 예술품, 야금술, 문헌들로 특징지어진다. 아메리카 문명은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기원은 후기 플라이스토세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BC 7000경). 그러나 식용작물의 재배는 긴 세월이 지난 후, 중앙 아메리카에서 정착농경이 시작된 BC 1500년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이때부터 BC 1200~900년에 상당히 빠르게 수도 및 여러 도시로 이루어진 중앙집권적인 계급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이전의 단순한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대신했다.

그러나 BC 500년경부터 마야·사포텍·토토낙·테오티우아칸 등 지역마다 서로 다른 문명이 등장했다. 이 왕국들은 700경~900년에 서로 우위를 차지하고자 투쟁을 벌였다. 1428년 중앙 멕시코 지배세력으로 아스텍 문명이 등장했으나 이 마지막 토착 중앙 아메리카 제국은 1521년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인들에게 정복당했다.

안데스 지역에서 농경부락의 정착은 중앙 아메리카 지역보다 훨씬 빠른 BC 2500년경에 이루어졌다. BC 1800년경부터 복잡한 사회질서의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초기 안데스 문명이 중앙 아메리카에서처럼 시가와 도시의 통일체를 공유하던 시기에 들어선 것은 BC 800년 무렵부터였다. 이런 통일 시기는 BC 500년 무렵 마무리되고 그후 600년까지 지방화 시기가 계속되면서 모치카, 초기 리마, 나스카, 레쿠아이, 초기 티아우아나코 등 수많은 거대왕국들이 번창했는데, 이때부터 1438년경 잉카 정복이 시작될 때까지 수많은 왕국이 존립하면서 지역적인 차별성에 기반을 둔 역사·문화를 형성했다.

잉카 정복은 현재 페루의 남부 고원에 있던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533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당시 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 경계로부터 칠레 중부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이 제국을 정복했다. 중앙 아메리카와 안데스 두 문명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각각의 문화적 전통에 반영되어 있다.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상형문자로 된 글과 역법(歷法) 제작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종교도 고도로 발전했으며 시장이 중요한 기능을 했다. 안데스 문명에서는 고대 페루인들이 초기의 문명발전과 통치제도 및 제국 형성에 이바지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중앙 아메리카 문명

중앙 아메리카의 북쪽 경계는 멕시코 만 연안에 자리잡은 현재의 탐피코 항 위쪽 해안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가(멕시코 고원의 중부 사막 대부분은 제외) 남쪽으로 둥근 윤곽을 그리면서 바하칼리포르니아를 마주보는 태평양 연안지역까지 이어진다(→ 색인: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남동쪽 경계는 카리브 해 연안의 온두라스 북서부에서 뻗어나와 엘살바도르의 태평양 연안을 가로지른다. 따라서 멕시코의 약 절반, 과테말라와 벨리즈 전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일부 지역이 중앙 아메리카에 속한다. 중앙 아메리카는 지리적·문화적으로 고원과 저지로 구분된다.

멕시코 고원 대부분은 2개의 시에라마드레 산맥 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로 화산 산맥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다. 남서부에는 치아파스-과테말라 고원이 있다. 저지는 주로 해안지역이다. 가장 중요한 곳은 멕시코 만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져 마야족의 고향인 페텐-유카탄 반도를 끼고 있는 해안평야지역이다.

인구의 측면에서 볼 때 농사를 짓기에는 저지대보다 고지대가 훨씬 더 유리했던 것 같다. 이는 고지에 훨씬 더 큰 도시가 형성되었던 사실을 통해 나타난다. 옥수수·콩·호박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었다.

고원에서는 어느 정도 영구적인 경작지에서 괭이로 농사를 짓는 것이 보통이었다. 관개나 치남파스(호수나 연못을 매립하여 만든 논)를 이용한 집약적 농업이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다. 저지농업은 화전농업으로서 밀림 개간이 이루어졌다. 몇 년 동안 계속 농사를 지어 생산량이 떨어진 경작지는 버려지는 게 보통이었다. 극히 다양한 환경조건 때문에 각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사치품목 등을 카카오 열매를 화폐로 사용해서 거래하는 시장이 발달했다. 농업의 성공은 높은 수준의 건축·조각·시·미술 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정치적 통일체, 나아가 군소국가나 제국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사고체계는 궁극적으로는 역법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역법에 따르면 260일을 주기로 하는 '의례적인 해'와 365일을 주기로 하는 '모호한 해'가 서로 맞물려 있으며 이 두 주기가 다시 52년을 주기로 순환한다. 그들의 고유한 종교적 생활은 이런 순환에 맞추어져 있었고 여러 신들이 머물고 있는 13개의 천상세계, 9개의 지하세계를 특징으로 했다. 종교체계는 뛰어난 천문학 지식을 가진 사제들의 지배를 받았다.

중앙 아메리카의 전고전기 및 고전기 문명

개요

중앙 아메리카의 문화는 BC 65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마도 후기 홍적세나 빙하기의 언젠가 존재했을 육교를 통해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여러 인종 집단이 북동시베리아에서 이주했던 것 같다. 빙하가 북아메리카 북부를 뒤덮고 있던 BC 11000년경 수렵민족들이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늘하고 습진 초지로 이루어진 중앙 아메리카를 떠돌며 살던 수많은 포유동물들에게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BC 7000년경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고 북반구의 거대 빙상(氷床)이 상당부분 사라지면서 수렵생활방식이 끝나고 새로운 농업생활의 시대가 열렸다.

BC 6500년 직후 푸에블라의 테오티우아칸 계곡의 사람들이 칠리후추·목화·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BC 5000~3000년에는 조생종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BC 3500년경에는 과 개량종의 옥수수가 등장했다. 가용식량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하자 일시적·계절적 사냥 캠프와 동굴 주거지에서 반영구적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다. BC 3500~1500년에 테오티우아칸 계곡 같은 곳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초기의 작물들이 전해진 결과 식용작물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BC 1500년 무렵 정착농경이 일반화되어 완전히 정착된 생활양식이 채택되었다.

형성기

BC 1500~900년에는 환경이 중앙 아메리카의 문화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원지대는 환경조건이 다양했지만 공동체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자원을 갖춘 곳은 없었으며, 각 마을이 공생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교역에 바탕을 둔 도시적 문화통합에 이르렀던 것 같다. 한편 저지는 자원이 상당히 풍부해서 모든 지역의 마을이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농경문화와 함께 멕시코 만 베라크루스와 타바스코 남부의 습한 저지대에서 BC 1150년경 발생한 올멕과 같은 거대문명도 공존했다.

올멕(Olmec)
올멕(Olmec)

올멕 문화의 발생은 대지역들이 커다란 도시와 행정중심지 등 중앙집중화된 지역으로 통합되었음을 나타낸다. 기름진 토양과 넉넉한 강우량이라는 자연조건에 힙입어 비옥한 농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한정된 유용지를 둘러싸고 잦은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군사력을 갖춘 권력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올멕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초기 올멕은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을 포함하는 커다란 교역망을 지배했는데 교역품 가운데는 거울을 만드는 데 쓰는 철광석과 같은 사치품들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몇몇 가공품을 제외하면 올멕 문화는 카리브 해 동쪽의 베라크루스-타바스코 중심부들에서 마야 저지대까지 확산되지는 못했다. 중앙 아메리카의 나머지 지역과 올멕 문화와의 관계는 BC 300년경까지 지속되었고 이즈음에 절정에 이르렀던 것 같다. 올멕은 중앙 아메리카 최초의 고등문화였지만 그 문화권 전체는 중앙 아메리카의 토양에서 형성된 그밖의 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BC 900~300년에는 올멕 문화가 여전히 광범위한 세력을 떨치는 한편 각 지역의 문화적 차별성이 더욱 커졌다.

BC 300~AD 100년에도 초기 올멕 문화에 필적할 만한 통일세력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왕국이 속출하고 지방단위의 문화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주의가 일반화된 것이 이 시기였다. BC 300년경 페텐-유카탄 반도의 저지대 마야족이 장차 신대륙에서 가장 강대해질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페텐-유카탄 반도는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농업잠재성도 낮은 편이었지만 석조건물과 부싯돌을 만드는 데 쓰는 석회석이 풍부했다.

이무렵 건축은 마야 특유의 형식을 갖추면서 상당 수준 발전해 있었다. 마야 문명의 중심지는 과테말라의 페텐 북부였으므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마야 구조물들이 발견되었다. 마야의 초기 문명은 유카탄의 훨씬 동쪽까지 전파되었다.

고전기(마야 문명)
마야 문명(Maya civilization)
마야 문명(Maya civilization)

AD 100~600년에 지난 몇 세기 동안 형성된 다양한 경향들이 완전히 제모습을 갖추었고, 2가지 문화가 나타났다.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문명(올멕 문명이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이무렵 행했음)과 과테말라 저지대의 마야 문명이 그것이다. 테오티우아칸 문명이 도시적·팽창주의적이었던 반면, 마야 문명이 비팽창주의적·도시적 성향도 덜했다는 점은 중앙 아메리카의 고원과 저지 사이의 환경차이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정복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테오티우아칸은 북동쪽으로 멕시코 계곡이 주머니 모양으로 뻗어나와 있는 테오티우아칸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당시 수공업 중심지로 부자와 빈자들의 집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통해 계급구분이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고전기의 저지대 마야 문명은 두 시기의 문화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AD 250년경에 나타났던 차콜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600년경에 시작되어 900년경에 사라진 테페우 문화이다.

마야 문명이 이무렵 절정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수공예품 유물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순전히 마야적 특성을 지닌 도기들 외에 테오티우아칸 문명의 흔적을 보여주는 그릇 등의 유물을 통해 멀리 떨어진 두 문화권 사이에 교역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야 중심지의 도시들과 테오티우아칸의 관계는, 테오티우아칸 시가 6세기말에 이르러 제국의 수도로서 힘이 약화되기 시작하자 저지대 마야 남부의 도시들은 테오티우아칸 제국의 정치·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600~900년 테오티우아칸족을 비롯한 멕시코 중부 인디언이 문화발전에 미미한 역할을 하는데 그친 반면 저지대 마야족은 지적·예술적으로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 그러나 테오티우아칸에 비해 마야는 팽창주의적이지는 않았다. 마야 문명이 멕시코 만을 따라 확산되기는 했지만 군사적 힘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부족도 타부족을 지배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지만 타부족의 정복에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는 900년경 톨텍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600~900년의 마야의 도시형태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지역의 도시는 고원의 테오티우아칸 도시들처럼 크지도, 그렇다고 형식면에서 발전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7만 5,000명의 주민들이 사는 중심도시에는 예술과 지적 생활의 발전뿐만 아니라 통치·종교·무역면에서 진정한 도시의 기능이 요구되었다.

저지대 마야의 중부 또는 북부의 주요유적은 보통 여러 가지 형태의 석조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벽 내부를 잡석으로 바른 뒤 그 위를 석회석 벽돌이나 얇은 석회판으로 붙인 형태이다(→ 색인:건축). 밑에서부터 여러 번 단을 쌓아 올린 신전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숲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궁전 유적들도 높이가 더 낮고, 거대한 방이 많이 갖추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피라미드와 비슷하다.

궁전과 신전 피라미드는 보통 중앙 광장을 따라 늘어서 있다. 오랜 시기에 걸쳐 마야 문명의 심장부 역할을 담당해온 페텐 북부를 비롯한 중앙 하부지역에 중요한 마야 유적이 몰려 있다. 가장 크고 유명한 고전기 유적지인 티칼은 6개의 위풍당당한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하나는 높이가 69m로서 일찍이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세운 건조물 가운데 가장 높다.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를 인공적으로 만든 10개의 거대 저수지가 티칼의 주민들에게 부족한 식수를 제공했다.

티칼(Tikal)
티칼(Tikal)

티칼을 비롯한 주변 여러 도시들의 신전들은 마야 군주의 돋을새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1946년 밀림의 전투, 죄수 심문, 승리의식 등을 생생한 색채로 담은 극히 사실적인 모자이크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이에 따라 마야족이 평화적인 종족이었다는 기존 관념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다.

유카탄 반도보다 더 건조하고 지대가 평탄한 중앙 하부지역의 북쪽으로 가면서 저지대 마야 문명의 성격은 변화한다.

페텐 북부에 있는 리오벡 지대는 독특한 구조의 신전 피라미드와 궁전으로 유명하다. 이 신전과 피라미드의 측면에는 탑 형태의 구조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들 구조물은 정면에 계단이 설치되어 꼭대기의 입구를 거쳐 방으로 연결된 형태를 하고 있지만 방이나 계단 등은 모두 모양만 갖추었을 뿐 진짜는 아니다. 리오벡의 건축물에는 환상적인 뱀 문양이 깊숙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 양각은 북서쪽의 케네스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현저해진다.

마야의 건축가들은 케네스에 하늘뱀 모양을 건물 정면에 새기고 건물 전체를 기이한 괴물이나 나선무늬들로 조각했다.

캄페체 서부에서 유카탄 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낮은 구릉지대로 가면, 정교한 건물장식이 훨씬 절제되고 질서정연해진다. 지형적 특성을 따라 푸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이 문화양식은 페텐 유적이 하부지역 중앙에 존재하는 데 비해 주로 하부지역 북부에서 발견된다.

푸크 유적지는 마야의 예술적·지적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 분명하다. 푸크 양식에서는 돌조각을 붙인 뒤에 얇은 장방형의 석회판으로 표면을 장식하고 장화 모양의 아치형 돌을 사용했다. 낭하의 기둥둘레는 처마돌림띠로 장식되어 있다. 붙박이형 또는 반원주형의 기둥이 여러 개의 긴 열을 이루며 잇달아 늘어서 있다. 그리고 상층 전면에는 석재 모자이크로 만자(卍字)무늬 및 격자무늬와 긴 두건 모양의 코를 가진 하늘뱀의 얼굴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푸크 유적은 대(大)페텐, 곧 중앙 하부지역의 중심부들이 쇠퇴하기 시작하거나 이미 붕괴된 9, 10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에서 저지대 마야의 '신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푸크 건축물
푸크 건축물

1000년경 유카탄 북부지역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푸크 양식의 대건축물이 곳곳에 자리잡은 치첸이차에 수많은 톨텍 양식의 신전과 궁전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양식은 약 1250년까지 치첸이차를 중심으로 해서 유카탄 북부지역을 지배했다.

마야 문명 전성기의 마야 예술은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예술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지역의 엄숙한 양식들과 달리 마야 예술이 고도로 설화적·장식적인 데다가 때로는 극히 산만했기 때문이다. 마야 예술은 본질적으로 조소적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석조 부조(浮彫)에서조차 화가들이 초벌그림을 그렸던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특성을 보여주는 예술품들은 주로 나무·깃털·나무껍질과 같은 없어지기 쉬운 재료를 썼기 때문에 대부분 소실되었다. 마야족이 다른 인디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그러한 지적 성취 대부분은 역사적·천문학적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인 역법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마야의 상형문자는 200년부터 스페인 정복기까지 계속 발견된다.

언어와 기록체계 자체는 엄청난 발전을 겪었다. 고전기 마야 상형문자는 기호(logogram)였는데, 대체로 하나의 그림이 단어나 개념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단어나 문장이 기술될 수 있는 방식은 매우 유연했던 것 같다. 900년경 이것은 음절문자표가 기호를 보완하거나 대치되는 훨씬 더 고정된 체계로 편성되었다. 마야 수학은 2가지의 큰 성과를 이루었다.

자릿수 기수법(記數法)과 영(零) 개념의 사용이라는 고대 마야 천문학은 금성의 상합과 일식의 예견뿐만 아니라 태양력의 지속시간을 아주 정확하게 산정해냈다(→ 색인:자리값 체계). 스페인 정복 이전의 상형문자를 기록한 드레스덴 사본에 이런 내용과 그밖에 마야족에게 뛰어난 천문학자의 명성을 가져다준 기타 정확한 천문학적 계산 결과들이 실려 있다.

900년부터 스페인의 침입기 사이에 마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몇몇 신들이 100년경의 초기 기념물들에 이미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격은 마야의 최고신인 이참나로서, 불·난로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창조신의 역할을 했다. 깃털 달린 뱀의 형상을 한 쿠쿨칸(톨텍족이나 아스텍족은 케찰코아트라고 불렀음)이라는 이름의 뱀신도 많이 숭배되었다. 100~900년 마야인은 신의 후손으로서 그 신성한 본질을 물려받은 인간이라고 여겨졌던 죽은 황제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다.

신에 대한 태도는 건강, 풍성한 수확, 풍부한 사냥감을 주고 배고픔과 질병을 주관하는 존재에게 기원하는 소박한 수준의 것이었다. 고대 마야족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쳤으며 사제들은 집을 짓거나 사냥을 하기에 좋은 날을 택일했다(→ 색인:희생제의). 신의 호의에 대한 답례로는 동물·농산물·꽃·비취·고무·피 등 다양한 제물이 바쳐졌다.

100년경 이후 마야족은 아스텍족만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 시작했다(→ 색인:인간희생제의). 그러나 BC 900년부터 인신제물을 흔하게 바쳤던 멕시코 중부처럼 잦지는 않았으며 심장의 절제나 화살쏘기, 참수 등의 형태가 취해졌다. 전투에서 패한 군주나 귀족을 비롯한 포로들을 제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의 주요목적 역시 노예와 제물로 쓸 포로를 얻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자진해서 희생제물로 나서거나 몸의 일부를 바치는 행위도 신에 대한 공양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

자연숭배 같은 좀더 단순한 형태의 종교관행이 BC 900~500년에 널리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문학 지식이 차츰 정확해짐에 따라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BC 300년경에는 정교한 세계관이 갖추어지기에 이르렀다. 신격화된 천체와 시간 주기가 예전의 옥수수신과 비의 신에 보태졌다.

종교는 엄격하게 조직된 사제들에 의해 해석되는 복잡한 신화를 갖춘 비밀스런 것이 되었다. 마야 사제들은 천문학적 현상과 복잡한 시간 개념에 관해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비밀스런 교리는 대중의 믿음과는 크게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마야족의 신화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와 공통된다. 마야족은 여러 개의 세계가 잇달아 창조되었다가 파괴된 후 현재의 우주가 등장했다고 믿었다(→ 색인:우주론). 또 이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먼저 흙으로(영혼이 없었기 때문에 파괴되었음), 그 다음에는 나무로(영혼과 지식이 없고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거나 악마에게 잡아먹혔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수수 죽(마야족의 선조)으로 차례차례 창조되었다.

주요창조행위는 태양과 달의 창조, 곧 태양 및 달의 신의 행위 창조와 관련되어 있었다. 대중들은 현재의 세계가 범람으로 망할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 사제들은 현재의 세계가 대홍수로 망하지만 순환이 깨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가 창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100~900년에 마야족은 자기 집의 마룻바닥 아래에다 시체를 묻었다. 사제나 강력한 군주들은 지하 납골당에 묻혔다(→ 색인:장례의례). 죽은 사람은 9층의 지하세계로 내려간다고 믿었지만 멕시코 중부에서처럼 하늘에 천국이 있다고 믿었던 증거는 없다.

높은 사제들은 역사·점성술·문자표기 등을 가르쳤다.

사제의 신분은 세습되었고 각 의식에서 행하는 기능도 전문화되었다(→ 색인:사제직). 예컨대 어떤 사제는 희생제물의 가슴을 개봉하고, 또다른 사제는 팔과 다리를 붙잡고, 나머지는 성서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식으로 나누어졌다. 몇몇 사제는 예언가와 점술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환각제를 쓰기도 했다. 마법사와 주술의는 예언자였으며 질병을 주는 동시에 치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법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의 마야족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데 대부분 스페인 정복 이전의 신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마야 왕국은 흔히 신권국가였다고 여겨지지만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은 기념물들 자체에서 잘 드러난다. 기념물들 속에는 왕과 여왕, 후계자, 전쟁포로 등이 나타나지만 어떤 형태로든 사제는 보이지 않는다.

중앙 아메리카의 후고전기 문명

개요

9세기경 마야 문명은 하부지역 중앙의 서쪽 경계에서부터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세기 동안 이런 문화적 마비상태는 점점 동쪽으로 퍼져갔으며 마야 문명은 완전히 쇠퇴하여 몰락했다. 외래의 침입은 하나의 요인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규모의 농민봉기가 있었다는 믿을 만한 근거도 없다. 유일한 사실은 하부지방 중앙에 살던 주민들이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점이다. 인구팽창과 토지의 심각한 남용이 이런 비극을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렇듯 찬란했던 문명이 쇠퇴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후고전기 문화의 성격

고대 중앙 아메리카 문명은 900년경부터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어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도착 또는 1521년 그가 아스텍족을 정복한 때까지 지속되었다.

10세기는 저지대 마야 문명의 대대적인 붕괴시기였지만 역사적 기록을 보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거대 제국을 세웠던 톨텍족의 생성기이기도 하다. 스페인 정복기의 중앙 아메리카에는 가지각색의 말을 쓰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다양한 이들 민족집단들은 공통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적 기원과 환경적 요인에 따라 지역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나는 문화를 이룩했다.

경제적 기반은 고도로 생산적인 농업이었지만 기본 연장은 원시적인 돌이나 나무도구였다. 주식은 옥수수였으며 콩이 주요단백질원이었다. 많은 작물들이 특수한 환경에서만 재배되었기 때문에 교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종교는 인간 행위의 종류에 따라 수많은 신들로 특수화된 다신교였다. 또한 점성술적인 목적에 바탕을 둔 천체 및 천체의 운동에 대한 관찰도 중시되었다. 260일을 주기로 하며 주술적인 의미를 갖는 달력과 365일로 된 태양력 등 2개의 주요역법이 중앙 아메리카 지역 전체에서 발견된다.

900~1200년의 것으로 보이는 멕시코 중부의 유적이 푸에블라의 촐룰라, 모렐로스의 호치칼코, 이달고의 툴라 등 3곳에 남아 있다. 테오티우아칸의 쇠퇴는 부분적으로 이들 중심지의 하나 또는 3개 모두의 발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툴라의 예술과 건축은 테오티우아칸 후기의 예술이나 조각과 놀랄 정도로 비슷하며 예술작품의 주제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관념과 행위양식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아스텍 문명

1519년 스페인의 정복기에 중앙 아메리카를 지배한 것은 아스텍족이었다.

이들의 고향은 면적 약 8,600㎢의 분지(해발 2,100m)로 최고높이 5,400m에 이르는 산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농작물 재배에 부적합한 토양과 지형뿐만 아니라 높은 고도 탓에 이 분지의 절반만 노동집약적 농업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나 1529년 무렵 이 지역은 100만~150만 명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늪지나 호수의 매립,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들, 새로운 영농기술, 전문적인 관개이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가장 주목할 점은 이런 기술들이 인력과 단순한 손도구만을 이용해 얻어졌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스텍족이 살던 분지에는 주요자원들이 있었는데 지역 내 소비와 교역을 위해 개발되었다. 석재도구를 만드는 데 이용된 흑요석, 현무암, 물새, 물고기와 기타 수산물, 목재를 제공하는 소나무숲 등이 주요자원이었다. 한편 높은 고도 때문에 목화, 종이원료, 열대 근채류 및 과일, 담배, 고무, 카카오, 꿀, 금속, 비취, 터키 등 열대산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스텍족이 다른 부족을 정복하게 된 주요동기는 이들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사회정치 조직체들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위계 수준에 따른 구별이었다. 아스텍의 사회정치 조직들은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더 복잡해졌다. 공동생활을 하는 1쌍의 성인과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 사회조직의 기초를 이루었다.

아스텍의 경우 적게는 몇 세대, 많게는 몇 백 세대에 이르는 많은 가족들이 칼풀리라는 복잡한 성격의 집단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칼풀리는 아스텍 제국의 행정단위이기도 했다. 수장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가족 우두머리들의 회의를 통해 칼풀리는 중앙정부에 대한 납세, 부역, 군대 단위 역할을 했다. 칼풀리 위에는 국가가 있었다. 모든 가족 우두머리들이 국가의 지배자인 관리들에게 충성과 존경을 바치고 납세의무를 수행했다.

사회계층은 생득적인 지위를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종적인 이동이 인정되기도 했다.

아스텍의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 전제요건으로서 희생물과 고행을 강조했다. 성직자들은 큰 존경을 받지만 단조로운 생활을 해야 했으며, 참회의 의미에서 일부러 피를 흘리는 등 자기희생을 하기도 했다(→ 색인:희생제의). 각 신전과 신은 부수적인 사제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고 각 사제는 일정한 의무를 지녔다.

아스텍족은 현재의 세계 이전에 4개의 세계가 있었다고 믿었다(→ 색인:창조신화). 4개의 태양으로 불리는 이 세계들은 그때 살던 인간과 함께 전부 대변동에 의해 파괴되었다. 새로운 5번째 세계의 사람들인 아스텍족은 태양이 하늘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태양에 '풍요'를 선사하기 위해 전쟁을 치를 신성한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안녕과 생존이 태양에 대한 피와 심장의 공양에 달려 있다는 관념으로 연결되었으며, 한편 태양에 한정되었던 공양은 그들이 섬기던 모든 신에게 확대되었다(→ 색인:우주론).

안데스 문명

개요

1532년 스페인이 페루를 침입하기 전 수천 년 동안 남아메리카의 서부 고산지대와 해안사막 여러 곳에 왕국이 발달했다.

이 지역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수천km나 뻗어 있는 해안사막과 같은 방향으로 솟은 안데스 산맥이라는 지형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이들 대조적인 두 지역은 오랜 시기에 걸쳐 여러 차례 단일한 정치적 공동체로 통합되기도 했다.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지속성과 그 비범한 예술적·기술적 업적을 바탕으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지역 문명을 한데 묶어 안데스 문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이 들어오기 이전 잉카가 통치했던 이 지역은 오늘날의 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 등에 해당한다.

잉카 제국 이전의 시기

BC 15000년경부터 고원지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BC 3500년경에야 이 지역의 서부 해안과 고원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BC 2500년경부터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고 여러 곳에서 안정된 정착생활이 이루어졌다. BC 2000년경 해안지대에는 100여 개의 부락이 있었으며, 주민은 전부 합쳐 약 5만 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BC 2100~1800년경 도기가 도입되어 문화적으로 진일보했다. 그러나 뜨거운 돌 위에 올려놓고 굽는 요리법이 여전히 계속되는 등 초기에는 일상생활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도기를 만들고 장식하는 방법이 발전하면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밖의 중요한 발전으로는 평직옷을 만드는 데 쓴 것으로 보이는 헤들 룸의 개발이었다. 이후 수천 년 동안 직조는 안데스 지역의 주요기술로 발전했다. BC 1800~AD 800년에 사회정치 질서가 발전하고 여러 부락이 도시로 통합되었다. AD 600년경 여러 계곡을 지배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중심지는 현재 페루의 도시 아야쿠초 근처에 있던 우아리였으며 우아리 문화가 남북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피지배지역의 문화양식이 일소되었다.

세력의 절정기에 이른 800년경 우아리 제국은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했고 우아리 시는 버려졌다. 약 1000년 이후 우아리 제국이 이루어놓았던 모든 통합의 표지들은 사라져버리고 스페인의 침입기까지 개별적인 왕국과 지역 문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청동합금이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북서부에서 페루 해안으로 전해졌지만 기술상의 진보는 거의 없었다. 표준화와 대량제작의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도기제작기술은 질적 개선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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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기원과 팽창

안데스 산맥 지역은 각 지역의 정치체들이 벌인 잦은 전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었으며, 이런 여건을 기반으로 잉카족이 세운 국가인 타완틴수유가 성립하게 되었다.

1532년경 잉카족은 지금의 에콰도르 북쪽 국경에서 아르헨티나 중서부와 칠레 중부의 마울레 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뉴욕에서 파나마 운하까지의 거리와 비슷함)을 지배하고 있었다. 해안과 고원을 통틀어 이들은 적어도 20여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1,2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지배했으며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100여 개 부족을 정복했다.

1세기 전만 해도 잉카족은 쿠스코 계곡을 지배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잉카의 기원과 초기 역사는 대부분 사실적이기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오늘날의 몇몇 안데스 부족들처럼 이들 역시 조상들이 땅에 난 구멍들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잉카의 기원지는 쿠스코 남쪽으로 24km쯤 되는 곳으로 짐작되는데 이곳에서 잉카 최초의 지도자였던 망코 카팍과 그의 3형제, 4명의 누이들이 동굴에서 나와 근처의 동굴에서 나온 10개 집단과 함께 얼마 동안인지는 모르지만 각처를 여행했다고 한다.

잉카족은 쿠스코 근처의 비옥한 땅에 정착하여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이웃 부족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게 했다. 잉카의 지도자들이 계속 바뀌고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여 땅이 몰수되었지만 피정복 부족사회에 수비대나 잉카의 관료가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이들은 잉카족 스스로 다시 공격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될 때까지는 아무 간섭도 받지 않았다.

15세기초 비라코차 잉카는 이들 정복민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를 확립했고 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1450년 이후 제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수많은 부족의 유지와 통치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다. 당시 잉카의 지배자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는 쿠스코를 제국의 정치·종교 중심지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는 더욱 확장되었다.

동시에 쿠스코 하곡 상류 전체에 수로를 내고 땅을 고르게 하며 주변 언덕으로 계단식 논을 만드는 농업계획이 취해졌다. 이와 더불어 강제 재정착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정책은 적어도 잉카족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에 충성하고 농업자원을 활용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파차쿠티 잉카 유판키는 잉카 제국 이전부터 내려오던 창조신 숭배를 기초로 사제의 위계와 의식을 결합하여 국가종교를 주창하기도 했다(→ 색인:비라코차). 그는 잉카족이 이 신성한 종교를 다른 부족들에 전파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설파했는데, 이는 잉카 군대가 창조신의 이름으로 다른 부족을 정복하는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정복된 부족들은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종용받는 것이 아니라 잉카의 신을 경배하도록 요구받았을 뿐이었다.

1471년경 토파 잉카 유판키는 중앙 안데스 대부분을 정복했다.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내적으로 반목해오던 중 황제 우아이나 카팍이 적법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채 1525년 죽자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제국 남부를 지배하던 우아스카르와 에콰도르 및 페루 북부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던 아타우알파 등 경쟁자의 전쟁은 우아스카르의 패배로 끝났다. 우아스카르는 나중에 아타우알파의 명에 따라 살해되었다. 그동안 스페인인들이 1532년초 페루 북부 해안지대의 툼베스에 상륙했고 그해 11월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납치하여 처형해버렸다. 스페인인들은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양측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을 황제로 지명했으나 실제로는 우아스카르파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몇 개월 만에 죽었으며 다시 우아스카르파의 지지를 받은 통치자가 즉위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새로운 황제가 대부분 아타우알파에게 여전히 충성을 바치고 있던 해안지대와 북부를 재지배하려 했으나 스페인인들이 적극 방해하면서 페루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잉카의 황제는 스페인 정착지를 공격했으나 패하여 결국 먼 산악지대로 쫓겨났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이 나라를 세웠으나 1572년 이 나라도 소멸했다.

스페인 정복기의 잉카 문명

잉카에는 유럽적 의미의 문자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끼리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색인:퀴푸). 구전(口傳)을 제외하고 연구결과를 기대해볼 만한 영역은 직물을 이용한 의사소통이다.

잉카의 도로체계는 매우 훌륭하다. 일부는 전(前) 잉카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던 반면에 단일한 정치경제체제 속에서 도로가 유지되고 통합된 것은 잉카 제국 시기였다. 예를 들면 짐을 실은 라마 또는 운반인의 속도에 맞게 체계화된 여행단위가 고원지대의 왕도에 아직도 남아 있다. 잉카 종교에는 복잡한 의식, 기도, 애니미즘, 마력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대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믿음, 자연숭배 등이 섞여 있다. 전잉카 시대의 종교적 관념과 행위들이 계속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의 종교는 태양숭배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사제들은 모두 신전에서 살았으며 사제의 명칭은 점술가·마법사·고해자·치료자 등 자신들이 맡은 기능에 따라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쿠스코의 사제장은 귀족 출신으로 결혼이 허락되었고 모든 신전과 사제들 위에서 완벽한 권위를 누렸다. 중요한 일을 실행할 때는 반드시 점을 쳤다. 점은 병의 진단, 전쟁 결과에 대한 예측, 죄인의 추적 등에 쓰였다. 또 어떤 신에게 무슨 제물을 바쳐야 하는가를 결정할 때도 점을 쳤다(→ 색인:희생제의). 중요한 의식에는 언제나 동물이나 인간이 제물로 바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