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

찰스 디킨스

다른 표기 언어 디킨스 , Charles (John Huffam) Dickens
요약 테이블
출생 1812. 2. 7, 잉글랜드 햄프셔 포츠머스
사망 1870. 6. 9, 켄트 채텀 근처 개즈힐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소설가.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이다. 대표작으로 《데이비드 코퍼필드》,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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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디킨스의 초기생애
    1. 유년시절
    2. 작품활동 시작
    3. 초기소설들
  2. 디킨스의 중기생애
    1. 저널리즘
    2. 소설
    3. 개인적인 불행
    4. 이야기 낭독
  3. 디킨스의 후기생애
  4. 디킨스에 대한 평가
    1. 당대의 견해
    2. 현대의 비평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그의 작품들은 소박한 평민이나 교양있는 사람들, 빈민이나 여왕을 막론하고 호소력을 가졌고, 작품성뿐만 아니라 당시의 과학기술의 진보가 그의 명성을 빠른 속도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긴 작가 경력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은 각기 판매부수나 비평적 평가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어느 작품도 디킨스 특유의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

현대에 와서는 그 관점과 전개의 탁월함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도 당대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적도 있으나 그는 지속적 인기를 누려왔고 문학사적 위치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디킨스는 영국작가들 중에서 가장 희극적인 작가임과 동시에 출중한 예능인이었다. 당시 사회와 부조리에 대한 이해의 범주 및 그가 지닌 연민과 명석한 두뇌는 그의 소설을 더욱 풍요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19세기 문학의 위대한 힘이자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영향력있는 작가로 만들었다.

디킨스의 초기생애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유년시절

디킨스는 포츠머스에서 태어났으나 유아시절에 그곳을 떠나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채텀에서 보냈는데(1817~22), 그곳은 후에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1822년부터 계속 런던에서 살다가 1860년경에 채텀 근교에 있는 전원주택 개즈힐에 정착했다. 중류층 출신의 영국해군 경리국 사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상당한 봉급을 받았으나 사치와 낭비가 심해 가족은 재정적으로 항상 궁핍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의 재정적 실패와 소비성향의 일부는 다분히 자서전적인 경향이 있는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에서 미코버라는 인물로 각색된다.

1824년 디킨스 가족은 완전히 재정적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큰아들 찰스는 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의 수공업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채무관계로 인해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어린 디킨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짧은 기간이나마 노동자계급으로의 전락은 돌이키기 싫은 경험이었으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고통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감옥의 이미지나 상실과 억압 속에서 방황하는 어린이의 이미지가 많은 소설 속에서 되풀이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디킨스의 성격과 예술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20세기 소설가 앵거스 윌슨이 주장하듯이, 디킨스가 후에 한 남자로서, 또는 작가로서 여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보인 것도 포함된다.

이런 성향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당시 그가 느끼기에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돈을 벌어 오기만을 강요했던 어머니에 대한 심한 분노에서 비롯된 듯하다. 아버지의 출옥과 함께 다시 시작된 디킨스의 학교생활은 결국 15세에 끝나게 된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로 취직했다가 법정의 속기사가 되는데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법률세계에 관한 지식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의회 및 신문사 기자가 된 그는 저널리즘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과 법조계 및 의회에 대한 경멸감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개혁기였던 1830년대에 성년이 되고, 특히 자유공리주의계의 〈모닝 크로니클 Morning Chronicle〉지에서 일한(1834~36) 경험은 그의 정치적 견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에게 일어난 또다른 중요한 사건은 마리아 비드넬에게 구혼했다가 그의 가문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거절당한 일이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희망과 그녀를 잃은 데 대한 분노는 성공에 대한 결의를 더욱 부채질했다. 당시 마리아에 대한 감정과 뒤에 다시 그의 인생에 짧게 개입하여 환멸감을 주는 그녀의 모습은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도라 스펜로에 대한 동경과 〈어린 도릿 Little Dorit〉에 나오는 중년의 아서 클레넘이 한때 매혹적으로 보였던 를로라가 "주책맞고 어리석다"고 느끼며 "백합인 채 남겨두었던 플로라가 작약이 되어 있었다"고 표현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작품활동 시작

연극에 많은 매력을 느낀 디킨스는 1832년 거의 직업배우의 길을 택할 뻔하기도 했다.

1833년 그는 잡지와 신문에 단편소설과 수필들을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많은 관심을 끌어 1836년 2월 〈'보즈'의 스케치집 Sketches by 'Boz'〉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같은 달에 그는 한 유명한 화가의 판화와 함께 실을 희극 연재물을 청탁받았다. 그로부터 7주 후에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Pickwick Papers〉 연재물의 1회분이 나왔다.

보즈의 스케치집(Sketches by Boz)
보즈의 스케치집(Sketches by Boz)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몇 달만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고 디킨스는 일약 당시의 최고 인기작가가 되었다.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월간지 〈벤틀리 미셀러니 Bentleys Miscellany〉의 편집을 시작하면서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를 연재하여(1837~39) 매달 2가지의 연재물을 쓰게 되었다. 1836년 4월 스코틀랜드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이던 조지 호가스의 장녀 캐서린과 결혼했던 그에게는 이미 그의 9명의 아이들 중 첫번째 아이가 태어난 때였다. 이때부터 수년간 그의 인생은 계속 분주하고 빠른 속도로 지속되었다.

연재물 형식의 글이 자신의 기호에도 맞고 재정적 보탬이 된다고 판단한 그는 〈니콜러스 니클비 Nicholas Nickleby〉(1838~39)를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과 같은 양식으로 20회에 나누어 썼고 또다시 〈골동품 가게 The Old Curiosity Shop〉(1840~41)와 〈바너비 러지 Barnaby Rudge〉(1841) 등을 더 짧은 분량의 주간물로 썼다. 결국 과로에 지친 그는 5개월 동안 미국을 여행했는데, 그의 문필적 지명도 덕분에 거의 왕실의 칙사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미국의 저작권 보호법 부재에 항의함으로써 국민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영국의 제반 제도를 과격하게 비판했던 그는 '나의 상상 속의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기대했으나 권장할 만한 사회제도보다는 저속함과 혐오스러울 만큼 약삭빠른 관행 등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러한 감정의 일부는 〈미국 인상기 American Notes〉(1842)와 〈마틴 처즐윗 Martin Chuzzlewit〉(1843~44)에도 잘 나타나 있다.

초기소설들

이러한 다작 기간 동안에 나온 작품들은 매우 다양하며 희곡들을 제외하고는 꽤 훌륭한 수입원이 되었다.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생동감 넘치는 익살극 형태로 시작하는데, 전통적인 희극적 풍자나 재담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의 다른 초기작품들처럼 이 작품은 당대의 연극이나 18세기 영국 소설가들, 〈돈 키호테〉를 포함한 몇몇 고전들의 영향을 현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진부한 인물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전초적 단계이긴 하지만 앞으로 그의 소설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다양한 경향들이 혼합된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악이나 부적절한 제도에 대한 풍자적이거나 비난섞인 고발, 시국문제에 관한 언급, 그의 소설 대부분의 배경이 되는 런던에 관한 백과사전적 지식, 페이소스, 다소 으시시한 공포 분위기,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서민들의 기쁨, 작품마다 넘쳐흐르는 훈훈한 정감,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 상상력을 가미해 더욱 고조시키는 각 인물 특유의 독특한 대화체와 그것을 놓치지 않는 훌륭한 귀, 강력한 서술적 추진력, 아직 희극적 매너리즘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는 해도 매우 개성있고 창의적인 산문체 등의 조짐이 이미 초기작품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잡지발행에 앞서 불과 몇 주일, 또는 며칠 전에 즉흥적으로 쓴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은 미숙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띄며 전체적으로 볼 때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작품이다. 이는 저술과 출판을 동시에 하면서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단시간 내에 발전시켰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놀랄만한 사실은 그렇게 씌어진 처녀작이 디킨스 작품을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고 대중문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는가 하면 작품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자신감과 예술적 야망이 더욱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은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이다.

이 작품은 희극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빈민 수용소나 범죄세계 같은 사회적·도덕적 악에 더욱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 사실 디킨스 작품의 인물들과 배경에 관한 상상적 효과는 독창적인 삽화가들에 의해 한층 더 증가되었다. 가령 〈'보즈'의 스케치집〉과 〈올리버 트위스트〉의 크룩생크, 1860년대까지 다른 대부분의 소설의 삽화를 맡은 '피즈'(해블롯 K. 브라운)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디킨스의 소설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효과적이고도 쉽게 연극으로 각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런던의 20개의 극장이 동시에 그의 최근 소설을 각색, 무대에 올리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짧게 압축된 작품 내용에 친숙해질 수 있었다. 잔인한 요크셔 학교에 관한 고발과 같이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타난 버림받고 억압받는 어린아이를 페이소스와 사회비판의 근거로 삼는 등의 영국소설에서의 중요한 혁신은 〈니콜러스 니클비〉 같은 작품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이런 경향은 〈골동품 가게〉에서 더욱 심화되는데 이 작품에서 어린 넬의 죽음은 비록 수십년 후에는 '빅토리아 시대적 감상'으로 일축되고 있긴 하지만, 당대에는 대단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바너비 러지〉에서는 새로운 장르인 역사소설을 시도하고 있는데, 같은 부류로서 후기의 역작 〈두 도시 이야기 A Tale of Two Cities〉처럼 이 작품은 18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대규모 민중폭동의 참상을 매우 힘있고 심도있는 필치로 다루고 있다.

폭넓은 분위기와 소재,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는 여러 개의 복잡한 플롯을 갖고 예술적 일관성을 창출한다는 것은 디킨스가 연재물로 글을 쓰고 출판하기 때문에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1844년판의 〈마틴 처즐윗〉의 서문에서 그는 "이번 달 호의 유혹을 물리치고 전체적인 목적과 구성에 더 꾸준한 관심을 두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전체적 목적과 구성'에 관한 집중은 그 다음 소설 〈돔비와 아들 Dombey and Son〉(1846~48)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길이가 비교적 짧고 연재물로 발간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들을 쓴 경험은 그에게 좀더 소설적인 일관성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1843)은 착안한 지 몇 주만에 완성된 이야기로 우연찮게 새로운 문학적 장르를 창출한 작품이다.

이는 그의 여러 크리스마스 이야기 중 첫 작품이 되었다. 〈마틴 처즐윗〉을 쓰는 동안 막간을 이용해 단숨에 쓰다시피 한 이 작품은 현대문학의 위대한 크리스마스 신화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업적이었다. 디킨스는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크리스마스에 매우 의미심장한 가치를 부여했으며, 이는 대중적 인기에도 큰 공헌을 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일반적 의식 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한 평론에서 W. M. 새커리는 이 작품을 가리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득이요, 그것을 읽는 모든 이에게 주는 개인적 애정표현"이라고 썼다.

이후에는 더 많은 크리스마스에 관한 책·수필·단편들이 1867년까지 거의 해마다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출판되자마자 일시적 인기를 누렸지만 그 어느 작품도 〈크리스마스 캐럴〉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디킨스만이 시도한 크리스마스 기념비가 되었다.

초기 창작 시절에 디킨스가 얼마나 당대 사람들을 매료시켰는가는 R.H. 혼의 〈새로운 시대정신〉(1844)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첫번째이자 가장 긴 장(章)은 디킨스에 대한 호평으로 할애되어 있다.

"뚜렷한 이 시대의 산물…… 총체적이고 완벽한 시대정신에서 나온 천재적 발상…… 그는 이 사회 속에 널리 지속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없이 이루어지는 자선모임은 거의 없다. 그는 달변가이다…… 그가 이 시대에 끼치는 영향력은 유쾌하고, 교육적이며, 건강하고 개혁적일 정도로 폭넓다…….

개인적으로 볼 때 디킨스는 그의 작품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대화는 온유하고…… 독특한 개인적 행동양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실용적 기술을 요하는 게임을 좋아한다. 또한 걷기를 즐기고 '로저 드 커벌리' 춤을 매우 좋아하며 허튼 구석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수준높은 실천적 지성인의 인상을 풍긴다."

그는 여러 면에서 진정한 공인(公人)이었으며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적극적인 중심체 역할을 하고,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당시의 가장 훌륭한 만찬 연설가로 인정받았으며 그밖에 그를 묘사하는 최상급형용사로는, 런던 신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속기사였다는 것과 가장 탁월한 아마추어 배우였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후에는 매우 훌륭한 잡지 편집인이자 최고의 연극 낭송가가 되기도 했다. 천부적으로 많은 재능을 타고난 그에 대해 1870년 6월 10일 〈타임〉지에 실린 사망기사에서 한 기자는 "문학적 천재성은 빼고라도 그는 능력있고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고 몰입하기만 하면 어떤 직업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가정과 사회생활을 사랑했으며 매우 모범적이고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한 번은 요리책을 쓸 생각까지 했을 정도이고,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기는 했어도 1844~45년 이탈리아 생활, 1846~47년의 스위스와 프랑스 체류를 빼고는 줄곧 런던에서 살다가 수입이 늘고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퍼니벌즈인에 있는 아파트에서 더 큰 저택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유명한 작가, 신문기자, 배우, 예술가 등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법률가나 사업가, 몇몇의 귀족계층 등 다른 직업의 사람들도 접대했다.

그는 허식없는 사교모임이나, 온화하고 양식있으며 너무 현학적이거나 문학적이지 않은 대화들을 즐겼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광채나는 눈빛과 단정하고 신사다운 외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스스로 "나는 세련된 옷과 장식을 끔찍히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절친한 친구이며 후에 그의 전기를 쓴 존 포스터는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당시의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얼굴의 각 부분에 나타나는 명민함, 날카로움, 실천력, 열정적이고 활동적이며 원기찬 모습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작가라기보다는 행동파 사업가 같은 인상을 주는 듯했다.

광채와 활기가 얼굴 전체에서 번득였다."

디킨스는 자신의 예술에 자부심을 가졌고 그것을 향상시키고 좋은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대중문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작품을 썼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만 쏟아붓거나 편협하게 문학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비록 성공으로 끝나지는 못했지만 그 주목할 만한 예가 1846년 〈데일리 뉴스〉(얼마 후 대표적인 진보적 신문이 됨)의 창립 편집자가 된 것이다. 신문기자로서의 경험과 정치적 신념, 여론의 주창자로서 대처할 수 있는 자세, 문학적 창작력을 살리고 소설 독자층의 변덕스러운 기호에 의존하지 않고 고정된 수입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1840년대에 여러 번 정기간행물을 기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간신문 일은 곧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실용적 재능이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 기회가 곧 주어졌다. 디킨스는 약 10년 이상 비범한 통찰력과 애정을 가지고 아주 정력적으로, 부유한 친구 안젤라 버뎃커츠로의 재정적 원조 속에서 어린 비행소녀들을 위한 감화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그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자선정신은 연설이나 기금모금 활동, 사적인 자선활동을 통해서 실천되기도 했다.

〈돔비와 아들 Dombey and Son〉(1846~48)은 그가 소설가로서의 발전에 있어 비중 높은 작품으로, 훨씬 철저한 구상과 성숙한 사고의 산물이자 "당시 사회에 널리 스며 있는 일반적 불만이 구체적인 사회적 부조리에 관한 관심으로 변하는 첫 작품"(캐슬린 틸롯슨)이었다.

돈으로 인한 타락, 높은 지위에 대한 자만심, "존경할 만한" 가치의 한계 등이 파헤쳐지고, 디킨스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소박하며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자주 인간의 미덕과 가치가 발견됨을 지적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어린 폴의 죽음은 디킨스의 또다른 유명한 페이소스 넘치는 에피소드를 제공하고 있고 돔비라는 인물에서는 이전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고 내적인 인물묘사에 대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 David Copperfield〉(1849~50)는 이러한 심화된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잠시 떠난 작품인데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유년기를 다룬 부분이 가장 유명하다.

에드먼드 윌슨은 "그의 문학 생애에서 전무후무한 매혹적 분위기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와 작가의 자서전적인 요소 때문에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디킨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당시에 착수했다가 그만둔 자서전으로부터 소재를 빌려왔고 그에게는 새로운 기법인 1인칭 시점으로 씌어졌다.

그러나 비록 작가 자신에게 의미깊었던 여러 가지 어릴 때의 경험, 즉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때 공장에서 일했던 일, 학교수업과 독서, 마리아 비드넬에 대한 열정, 의회 서기에서 성공적인 소설가로의 변신 등을 다루고 있지만 데이비드는 디킨스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이작품은 미코버라는 인물을 통해 줄거리의 내용보다 훨씬 뛰어난 상상적 효과를 지닌 '디킨스 인물들' 중의 하나를 소개했다. 피크위크, 샘 웰러, 갬프 여사, 펙스니프, 스쿠루지 등도 이러한 인물들에 속한다(교양소설).

디킨스의 중기생애

저널리즘

디킨스의 저널리즘에 대한 야망은 마침내 〈가정담화 Household Words〉(1850~59)와 〈사시사철 All the Year Round〉(1859~88)에서 그 지속적인 형식을 발견해냈다.

폭넓은 주제를 다룬 소설·시·수필 등을 담은 주간물로서 이들은 상당한 부수가 팔렸고 그 수는 점차 증가하여 몇몇 크리스마스 특집호들은 30만 부에 가까운 부수가 유포되었다. 디킨스는 별로 수작이라고 할 수 없는 또다른 연재물들인 〈어린이 영국 역사 Child's History of England〉(1851~53)·〈어려운 시절 Hard Times〉(1854)·〈두 도시 이야기〉(1859)·〈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1860~61)과 수필 등을 기고했고 이들 중 몇 편은 〈다시 보는 소품집 Reprinted Pieces〉(1858)과 〈The Uncommercial Traveller〉(1861, 후에 증보판으로 발행)에 수록되었다.

특히 1850~52년의 크림 전쟁 동안 당시의 많은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쟁점화하여 글을 썼다. 후반기에 그의 집필량은 급격히 줄었으며 더욱이 정치에 관한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당시에 연재물을 기고했던 소설가들로서는 개스켈 부인, 윌키 콜린스, 찰스 리드, 벌윅 리튼 등이 있다.

시 부문은 전반적으로 미약했는데 디킨스는 시에 대해서는 수준급 이상의 식별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견고하게 구성된 르포 기사들은 그 방법과 내용에서 기지가 넘쳤다. 이러한 주간물들은 편집자나 저널리스트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했으나 그의 기호나 지적 야망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디킨스와 필적할 만한 영국작가 중 아무도 그렇게 꾸준하게 편집 작업에 20여 년이나 원숙한 능력을 바친 이는 없었다. 주간잡지의 성공은 그의 명성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기민성과 뿌리깊은 근면성 덕분이었다.

이는 창작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디킨스의 큰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어떤 시 공무원도 아버지만큼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평범하고 단조롭고 관습적인 업무도 이보다 더 정확하고 신속하고 규칙적으로 수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이 시기의 소설들 〈황량한 집 Bleak House〉(1852~53)·〈어려운 시대〉(1854)·〈어린 도릿〉(1855~57) 등은 이전의 작품보다 훨씬 어두운 색채를 띤다.

당대의 사회를 지극히 포괄적으로 점점 더 암울한 시각으로 드러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은 일시적인 주제들에 대한 허구적 선전물로 오해받기 쉽다. 디킨스의 상상력이 어떻게 이 소설들에 담긴 많은 시사적 문제들을 당면한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시종일관 예술적 비전으로 바꾸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는 힘들다. 또한 소설 속의 인물·장소·기관 등을 실존하는 인물이나 장소에 기초를 둔 것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디킨스는 그의 마음이 한 장면을 포착하는 것을 "공상적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진적 사실주의와 '공상'(또는 상상력)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858년 월터 배젓은 "그는 마치 후세들을 위한 특파원처럼 런던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후세들은 분명히 그의 소설에서 '격동하는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발달에 대해 날카롭고 해박하면서도 관심있는 눈으로 관찰하는 작가의 반응을 발견해왔다.

1850년대의 소설은 전보다 더 정치에 대한 실망이 두드러지고 감정적으로는 비극적 경향을 띠었다.

초기소설에 비해 풍자는 더욱 직접적이고 유머는 양적으로 감소했을 뿐 아니라 특유의 온화함을 잃고 있고, 해피엔딩의 결말도 이전보다 많이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기술적인 면에서 후기소설은 구성에서 더 일관성이 있고, 주제는 플롯과 더욱 긴밀히 밀착되며 대부분 〈황량한 집〉의 안개나 〈어린 도릿〉의 감옥과 같은 어두운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다. 여기서 그의 예술은 사진적이며, 저널리즘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디킨스식'의 인물묘사는 〈황량한 집〉의 채드밴드나 〈어려운 시절〉의 스파싯 부인처럼 두드러지고 단순화된 형태의 아주 괴팍하거나 희극적 인물로 맥락을 이어가지만 이러한 유형으로서 큰 스케일의 인물들은 많지 않다. 인물구성은 '보편적인 목적과 구성'에 비해 부수적인 요소가 되며 윌리엄 도릿과 같은 복잡한 성격의 인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세속적인 희망이 점차로 줄어들면서 디킨스는 '모든 삶의 위대하고 궁극적인 비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비평가들은 그처럼 세속적인 소설가가 그의 시각을 종교적인 차원까지도 포함시키는 데 있어 예술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는가에 대해 의견을 달리 하고 있다.

개인적인 불행

미래에 대한 디킨스의 의지와 자신감은 점차 사라져 갔다.

1855년은 그에게 "매우 불안정하고 불만스러운 한 해"였다고 친구인 포스터는 회상했다. 그렇게 된 부분적 원인은 정치적인 이유에 있었는데 포스터가 암시했듯이 개인적인 불만 때문에 정치에 대한 분노가 더욱 깊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크림 전쟁은 정부의 무능력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빈곤, 배고픔, 무지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켰다. 〈어린 도릿〉에서 그는 "나는 분개감을 어느 정도 발산시켰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 분노가 나를 폭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정치적인 신념이나 희망을 티끌만큼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디킨스는 다른 일관성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절망감은 공교롭게도 심각한 개인적인 불행과 때를 같이 했다. 1855년에 만난 마리아 비드넬과는 결국 짧은 희비극으로 끝났지만 그가 간직하고 있던 한가닥 환상적 향수는 깨져버렸고 위험스러운 감정의 미성숙과 갈망만이 남게 되었다. 그는 성인이 된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느낀 비애와 슬픔을 공공연하게 자신의 감정과 일치시켰다.

"가련한 데이비드처럼 이렇게 우울함에 빠져들 때면 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을 놓치고 단 1명의 친구나 동료도 사귀지 못했던 것 같은 느낌이 나를 짓누르니 도대체 왜 이럴까?"

이는 1854~55년에 포스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것인데 처음으로 결혼생활의 불행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56년에 그는 "나의 집 벽장 속에 숨어 있는 해골이 자꾸 커져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고 쓰고 있다. 1857~58년이 되자 이 '불안한 감정'은 거의 습성이 되었고 포스터가 말했듯이 "가정이 제공해주어야 할 만족감, 실제로 그의 성격상 몹시 필요로 했던 그 만족감을 가정에서 찾을 수 없었다." 급기야는 1858년 5월부터 그와 캐서린 디킨스는 별거하게 되었고 여러 우정관계가 와해되었으며 사교의 폭도 좁아졌지만, 놀랍게도 대중의 인기에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듯했다.

캐서린 디킨스는 계속 품위있게 침묵을 지켰고 디킨스의 공식 전기작가인 포스터를 포함하여 그의 대부분의 가족과 친구들도 별거에 대해 신중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3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녀 중 1명인 케이티가 녹음된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당시의 내막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것은 디킨스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으며 자기변명을 담은 디킨스의 편지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결혼생활의 불행을 183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부인의 여러 가지 성격적 '별난 특성'을 가진 탓으로 돌리고, 그녀 또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부적절하게 느낀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녀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좀 감정이 절제된 듯한 편지에서는 그녀가 상냥하고 유순한 성격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과 그녀의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는데, 아마 이것을 더욱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녀는 상냥한 성격의 여인이었지만 남편의 예술적인 기질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참아내지 못한 듯하다.

디킨스의 자기합리화가 담긴 편지들은 자신보다 27세 연하의 여배우 엘렌 터넌에 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솔직성이 결여되어 있다.

사실은 그녀에 대한 그의 열정이 느닷없는 별거를 하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그런 자기변명이 담긴 편지를 쓰기 2개월 전에 절친한 친구에게 솔직한 편지를 보낸 바 있다.

"가정생활의 불행으로 너무도 강하게 짓눌려 있어서 나는 글을 쓸 수 없네. 깨어 있는 동안 단 1분도 편안히 휴식할 수 없어. 〈얼어붙은 바다〉의 마지막 밤 공연 이후로 나는 한 순간도 평화나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네."

〈얼어붙은 바다 The Frozen Deep〉는 그와 넬리(엘렌의 별칭)가 1857년에 함께 공연한 연극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이지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에 균형잡힌 몸매를 지녔다고도 하고, 그런대로 준수한 용모이지만 배우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도 평해진다. 그녀는 1860년에 무대를 떠났고 디킨스의 죽음 이후 목사와 결혼하여 함께 학교를 경영하며 살았다. 디킨스와 그녀의 관계는 1930년대까지 공식적으로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지만, 불충분한 어떤 증거에 의하면 디킨스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으며 그들의 관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 듯하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후기소설에 등장하는 연인들이 겪는 고뇌가 디킨스 자신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도 추측일 뿐이다. 사실 이전의 대부분의 여주인공들에 비해 생기있고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후기작품의 여주인공과 넬리를 연관짓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엘렌 로리스라는 그녀의 이름이 그의 마지막 세 장편소설 여주인공들의 이름 에스텔라, 벨라, 헬레나 랜드리스에 반영되어 있는 듯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디킨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또는 이러한 후기의 사랑 이야기들이 그들 관계의 양상 내지 단계와 얼마나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야기 낭독

긴 안목에서 캐슬린 틸롯슨이 "그가 일생 동안 독자와 했던 연애야말로 생애에서 가장 흥미로운 연애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논평은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애정관계는 아내와 별거하기 시작할 무렵 작품들을 대중 앞에서 낭독하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다. 디킨스는 이러한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을 합리화하려는 듯, "나와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관계"를 언급했는데, 이 말은 디킨스가 대중의 애정을 창작력의 자극과 상업적인 성공의 조건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찾지 못한 사랑에 대한 대체물로서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고 있었는가를 암시한다.

그는 자선사업을 돕기 위해 이야기 낭독을 시작했던 1853년부터 장난삼아 가끔 직업 낭독가로 전향할 생각을 해왔다. 1858년 4월에 시작된 이러한 유료낭독회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잊고 열정의 분출구를 찾으려는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낭독에는 놀라운 연극적 재능, 연극공연에 대한 사랑, 청중을 직접 보고 즐겁게 해주려는 애정, 탁월한 극적 성향 등의 예술 요소들이 깃들어 있었다.

더욱이 글쓰기보다 낭독으로 더욱 많은 고정수입을 갖게 되었으며 창작하는 것보다 공연을 반복하는 것이 한결 쉬운 일이었다.

처음 레퍼토리는 순전히 크리스마스에 대한 작품으로 구성되었지만 곧 장편소설에서 뽑은 일화들도 포함되어 확대되었다. 한 공연은 흔히 두 이야기로 구성되며 최후까지 남은 16개의 공연물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의 '재판장면'과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희극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가 고안한 마지막 낭독에서는 놀랍게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도 도입되었다. 〈사이크스와 낸시 Sikes and Nancy〉 낭독은 청중들을 공포로 얼어붙게 했고 디킨스 자신도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로 열정을 다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정기적으로 런던에서 낭독했으며 지방을 순회하고 1867~68년에는 미국에서도 공연을 했다. 일생 동안 공연한 횟수는 471번에 이른다.

그는 훌륭한 공연가였고, 예술의 중요 요소인 구술적이며 극적인 특성들이 이런 낭독회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2시간 공연에 알맞게 요약된 일화나 단편소설들에서는 부득이 더 광범위하고 깊이있는 사회비판이나 분석 같은 효과들이 배제되었고, 후기 소설들은 거의 상연되지 않았지만 디킨스는 그것들이 상연에 부적합하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이전에 소설들을 통해 얻었던 수입과 창의적인 만족감 및 관객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낭독을 통해 얻었고 이는 그의 기력을 쇠잔하게 했다. 몇몇 친구들은 이것이 너무 유치한 만족이며 쉽게 얻은 승리이고 더 하찮고 덧없는 예술로 빠져드는 슬픈 쇠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낭독이 어떠한 식으로 평가되든 여기에는 대중과의 접촉, 사업적 감각, 정력, 비문학적인 재능에 대한 긍지, 독창성 등 그만의 독특함이 있었다.

비평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적어도 호메로스 이래로 그 어느 중요한 작가도, 특히 그와 필적할 만한 많은 시간과 정력을 이런 낭독활동에 바친 작가는 없었다. 유일하게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은 마크 트웨인인데, 그도 디킨스를 일컬어 선구자라고 불렀다.

디킨스의 후기생애

지치고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디킨스는 마지막 소설을 집필하면서 여전히 창의적이고 모험적이었다.

〈두 도시 이야기〉(1859)는 예전의 작품만큼 성격묘사·대화·유머가 크게 돋보이지 않는 실험작이었다. 흥미진진하고 압축적인 구성이 인상적이지만 주요작품으로 꼽히기에는 디킨스 특유의 장점이 부족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장면은 비록 역사적인 이해가 피상적이었지만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1860~61)은 1인칭 화자의 서술로 씌어지고 디킨스 자신의 성격과 경험의 일부가 그려졌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카퍼필드〉와 비슷하다.

〈위대한 유산〉에는 여전히 탄탄한 구성이 돋보이지만 〈황량한 집〉·〈어린 도릿〉·〈상호간의 친구 Our Mutual Friend〉 등에서 볼 수 있는 파노라마적인 포용성은 부족하다. 이 작품은 그가 쓴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완성된 소설이다. 주인공 핍의 심리가 매우 섬세하게 탐구되었으며,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의 어려운 시련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격 발달이 비판적이면서도 동정어린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위대한 유산'들은 그 근본이 잘못되어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인물들의 약점과 불운뿐만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에 대한 그의 논평이다. 〈상호간의 친구〉(1864~65)는 방대하고 포괄적인 소설로서 배금주의와 계급을 중시하는 가치관에 대한 비판은 이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런던은 그 이전보다 더욱 음산한 도시로 그려지고 부패, 음모, 상류계층의 위선이 신랄하게 공격받는다.

많은 새로운 요소들이 디킨스의 소설세계에 도입되고 있지만 보핀, 웨그, 비너스 같은 구태의연한 희극적 괴짜인물들은 이따금 지루할 정도로 개성없이 그려져 있다. 미완성 작품인 〈에드윈 드루드 Edwin Drood〉(1870)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불확실한데, 이 작품에서도 그는 파노라마적인 소설형식을 버리고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을 집중 묘사하고 있다.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존 재스퍼인데 성당 오르간 연주자로서 탁월한 존경을 받을 만한 그의 지위는 빈민층 아편 소굴에 드나들고 격렬한 성적 질투심으로 조카를 살인하는 모습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이 작품은 디킨스의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범죄, 악, 심리적 비정상의 주제들이 가장 치밀하게 다루어진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삶에 대한 위대한 찬양가였지만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도 가지고 있었다.

비평계의 견해는 점점 적대적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지속되었다.

H. W. 롱펠로는 미국 여행 도중 디킨스가 받은 엄청난 열광을 주목하면서 "사람들은 이에 대한 모든 진실을 이해하기 어렵고, 그의 명성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느끼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디킨스는 겉보기와는 달리 절대로 마음이 평온하거나 여유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옛 친구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거나 소원해졌고 또는 다른 여러 이유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또한 그의 아들들은 많은 근심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의 모든 명성들은 이제 소용이 없다.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식들에 관한 한 그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한 친구는 말했다. 그러나 만년의 그의 인생이 완전히 암울했던 것은 아니었다. 개즈힐이라고 이름붙인 자신의 전원주택을 사랑했고 여전히 "밝은 빛으로 그가 나타나는 곳 어디에서나 사교 분위기를 푸근하게" 만들 수 있었다. 소설가 앤터니 트롤럽의 형이며 디킨스의 〈사시사철〉에 글을 기고했던 T.A.트롤럽은 디킨스를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면모를 잘 알리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그가 지닌 태도의 보편적인 매력…… 그의 웃음은 즐거움에 넘쳤고, 그의 열정은 끊임없었으며, 다정했고 호탕했으며, 진정으로 사나이다운 사람이었다."

무리한 미국 순회낭독회 여행 이후 악화된 건강은 〈사이크스와 낸시〉 낭독에 쏟은 열성 때문에 위험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후 다른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런던에서 짧은 고별 낭독 기간을 가졌는데 그것은 유명한 구절인 "이 눈부신 불빛으로부터 나는 영원히 사라집니다"로 끝맺는다. 이 말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부고장에 다시 인용되었다. 1870년 6월 9일 개즈힐에서 갑자기 숨을 거둔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묻혔다. 전세계 사람들은 위대한 예능인이자 왕성한 창작력을 지닌 예술가, 시대정신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친구'를 잃은 것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디킨스에 대한 평가

당대의 견해

랠프 월도 에머슨은 보스턴에서 열린 디킨스의 낭독회에 참석하여 "온몸이 부서져 나갈 듯이 웃었다"고 말했지만 후에 디킨스에 대해 논할 때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천재인 그는 너무나 많은 재능을 지닌 것 같다.

그 재능은 그에게 묶여져 있는 무서운 기관차같아서 그는 거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는 나를 압도한다!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

"디킨스의 소설이 실질적이고, 대중지향적이고, 웅변에 능하고, 연극적 기질을 가진 그의 재능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또한 그의 소설에 담긴 온화함과 탁월한 희극적 요소는 작가의 고통, 실패, 자기연민뿐만 아니라 사회악과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슬픔과 한계감과도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그의 소설들은 사회적·도덕적·감정적·심리적으로 넓은 영역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성향, 예를 들면 괴팍함, 도덕적 타락, 광기, 환상, 몽상적인 상태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디킨스는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면서도 시사적이고 다큐멘터리에 능한 작가였다. 그러나 비평적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고르지 못하다. 놀랄 만큼 창의적이며 시적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성숙기 소설들에서도 지루할 만큼 느슨하고, 틀에 박힌 형식을 사용하기도 했다(문학비평).

그의 전기작가들은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그의 성격의 복잡성을 깊이 연구할 만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의 작가경력의 시초부터 그의 인기를 보증할 만한 요소들, 즉 명백한 기술과 재미가 있었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예술을 논하는 데 늘 어려움을 표시해왔다. 전반적으로 디킨스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로 계속 인정받아온 것은 초기 작품들인데,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올리버 트위스트〉·〈마틴 처즐윗〉·〈크리스마스 캐럴〉·〈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들 수 있다. 비평가들은 후기소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좀더 자유분방한 희극정신이 상실된 점을 아쉬워했고, 디킨스가 상징적인 예술양식을 사용한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했다. 또한 개별적인 논쟁점들에 획일적인 개혁주의적 입장을 보이던 그가 사회의 제반 전체와 제도들에 관하여 더욱 과격한 추궁을 하게 된 것을 어색하게 여겼다. 그는 절대로 소홀히 여겨지거나 잊혀지거나 인기를 잃은 적은 없었으나 조지 기싱, G.K. 체스터턴, 조지 버나드 쇼를 제외하곤 사후 70년 동안 거의 진지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훗날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기는 했지만 F.R.리비스가 1948년에 "성인들은 대체로 디킨스의 작품에서 심각성을 발견할 수 없다. 디킨스는 정말 위대한 천재였지만 그가 가진 천재성은 위대한 예능인으로서의 천재성이었다"고 주장한 것은 많은 사람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었다.

현대의 비평

디킨스에 관한 현대 비평은 1940~41년에 시작되었는데 조지 오웰, 에드먼드 윌슨, 험프리 하우스의 서로 다른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대에는 작품에 대한 실질적인 재평가와 재편집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제는 후기소설 〈황량한 집〉·〈어린 도릿〉·〈위대한 유산〉에서 가장 탁월한 예술성과 위대한 문학적 깊이가 발견되고 있으며 다소 이의가 있기는 해도 〈어려운 시절〉·〈상호간의 친구〉도 그런 훌륭한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학자들은 디킨스의 창작방식과 대중과의 관계,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방법을 심도깊게 연구해오고 있다.

전기적인 면에서도 1952년 에드가 존슨의 전기에 엘렌 터넌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시킨 것을 제외하면 포스터가 지은 방대하며 지적인 〈전기 Life〉(1872~74)의 내용에 별로 덧붙여진 것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비록 조지프 골드(1972)와 프레드 캐플런(1975)의 전기를 포함하여 몇 편의 전기물이 독특한 단계나 면모를 중심으로 씌었지만 획기적인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1970년 그의 죽음을 기리는 100주기 기념일에는 그가 영문학사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어 2번째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비평적인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당시 40년, 아니 20년 전만 해도 전혀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의견으로 일축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디킨스는 아직 20대였을 때 폭넓은 상상력과 창작력으로 셰익스피어에 비유되곤 했었다. 그와 셰익스피어는 영국이 내놓은 가장 독창적이며 단 한 편의 인기작으로 기억되는 작가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심각함에서 우스꽝스러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태가 다 그려져 있고, 각양각색의 인물들로 가득찬 수많은 작품들로 형성된 창작 세계가 돋보인다.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셰익스피어와 디킨스는 그들의 작품 속의 성격묘사를 통해 살아 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것을 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더욱 깊고 폭넓은 영역을 다루고 있으며 디킨스는 정부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새롭게 인식되던 산업화된 도시에서 살았으므로 그러한 세계에 대해 쓸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디킨스가 그렸던 세계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는 시점에서도 그의 모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여전히 지속되는 수많은 문제와 희망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