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펠로

롱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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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07. 2. 27, 미국 매사추세츠(지금의 메인 주) 포틀랜드
사망 1882. 3. 24,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국적 미국

요약 19세기 미국의 대중적 시인으로 꼽힌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모방해 1863년에 출판한 <웨이사이드 주막 이야기>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재능을 보여줬다. 첫 번째 시 <폴 리비어의 승마>는 국민적 애송시가 되었다. 보든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가 되었다. 교과서를 집필·편집했고 시와 산문을 번역했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문학에 관한 글도 썼다. 이후 18년 동안 하버드대학교의 현대언어 교육과정을 주관했다. 1835년 첫 번째 아내가 죽자 비탄에 잠겼던 롱펠로는 1843년 재혼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내마저도 옷에 불이 붙어 타 죽자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나온 가장 훌륭한 번역본 중 하나이며, 단테에 관한 그의 소네트 6편은 수작으로 꼽힌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9세기 미국의 대중적 시인이었다.

사립학교와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다녔으며 1825년 보든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에서는 월터 스콧 경의 소설과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 북 Sketch Book〉에 특히 매료되었고 잡지에 시를 발표했다. 번역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졸업하자마자 먼저 유럽 유학을 마치는 조건으로 현대언어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를 배웠으며, 여러 대학교로부터 연구장학금 지급 제안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1829년 미국으로 돌아와 보든대학의 교수 겸 사서가 되었다. 교과서를 집필·편집했고 시와 산문을 번역했으며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문학에 관한 글도 썼지만 고립감을 느꼈다. 롱펠로는 하버드대학교로부터 해외여행 기회와 함께 교수직을 제의받자 이를 받아들여 1835년 독일로 떠났다. 여행 도중 영국·스웨덴·네덜란드를 방문했다. 한편 1831년 그와 결혼한 아내가 1835년에 죽자 비탄에 잠겨 하이델부르크에 머물렀는데, 이때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836년 롱펠로는 하버드대학교로 돌아와 유명한 크레이기 하우스에 살기 시작했으며 1843년 재혼했을 때에는 이 집을 결혼선물로 받았다.

기행문 〈바다 건너 Outre- Mer〉(1835)는 성공하지 못했다. 1839년 낭만주의 소설 〈히페리온 Hyperion〉과 시 〈인생 찬가 The Psalm of Life〉·〈별빛 The Light of the Stars〉 등이 실린 시집 〈밤의 소리 Voices of the Night〉를 출판했는데 〈밤의 소리〉는 즉시 인기를 얻었다. 1841년 〈헤스페러스 호의 난파 The Wreck of the Hesperus〉가 실린 〈민요 외(外) Ballads and Other Poems〉는 전국을 휩쓸었지만 〈노예제도에 관한 시 Poems on Slavery〉(1842)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옛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의 목가적인 이야기 〈에반젤린 Evangeline〉(1847)이 훨씬 자연스러운 작품이다.

18년 동안 하버드대학교의 현대언어 교육과정을 주관한 뒤에 1854년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1855년에는 헨리 로스쿨크래프트가 북아메리카 인디언족들에 관해 쓴 2권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핀란드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의 강약격 운율을 사용하여 〈히아와타의 노래 The Song of Hiawatha〉를 내놓아 즉각적인 호평을 받았다.

1861년 2번째 아내가 옷에 불이 붙는 사고로 타죽자 우울증에 빠졌다.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해 단테의 〈신곡 The Divine Comedy〉을 번역했다. 이것은 그때까지 나온 가장 훌륭한 번역본 중 하나이며, 단테에 관한 그의 소네트 6편은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Canterbury Tales〉를 모방하여 1863년에 출판한 〈웨이사이드 주막 이야기 Tales of a Wayside Inn〉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준다.

첫번째 시 〈폴 리비어의 승마 Paul Revere's Ride〉는 국민적 애송시가 되었다. 1872년에는 그리스도교를 그 시초부터 다룬 야심적인 3부작 〈크리스터스 Christus:A Mystery〉를 출판했고, 뒤이어 2편의 단편적인 극시(劇詩) 〈마카베의 유다 Judas Maccabaeus〉·〈미켈란젤로 Michael Angelo〉를 썼다.

그러나 일찍이 〈스페인 학생 The Spanish Student〉(1843)에서 드러났듯이 희곡적 재능은 없었다. 그러나 1882년 그가 죽은 지 오래 뒤에는 이런 후기 작품 중 몇 편이 다시 빛을 보았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기념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