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 興宣大院君 ]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

시대 근대/개항기
출생 - 사망 1820(순조 20) ~ 1898(광무 2)
본명 이하응(李夏應)
이명 : 시백(時佰)
: 석파(石坡)
시호 : 헌의(獻懿)
직업 정치가

조선 말의 왕족·정치가. 이름은 하응(昰應), 자는 시백(時佰), 호는 석파(石坡), 시호는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20살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63년(철종 14) 후사 없이 철종이 죽자 조대비(趙大妃, 익종비(翼宗妃))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로부터 10년간 대원군 집정시대를 맞아 안동김씨의 세도를 제거하고 당쟁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사색(四色, 남(南)·북(北)·노(老)·소(少))을 신분 · 계급 · 출생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했으며, 부패관리를 적발 · 파직시켰다. 국가재정을 좀먹고 당쟁의 소굴이 되고 있는 서원을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함으로써 민생을 다소 안정시키고 국고도 충실하게 만들었다. 또한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법전을 편수,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하는 한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다.

반면 실책으로는, 경복궁을 중건 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죽임으로써 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일으킨 데 이어, 국제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71년 신미양요 등을 일으킴으로써 국제 관계를 악화시키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했다. 이러한 실정은 국민의 원성을 사서 마침내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탄핵으로 집권 10년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민비(후일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고, 그는 마건충(馬建忠)에 의해 천진으로 납치되어 보정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대원군 피랍사건). 85년 귀국하여 운현궁(雲峴宮)에 칩거하다가 87년 청의 원세개(袁世凱)와 결탁,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했다. 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인해 청 · 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옹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몰아내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일을 꾸미다가 쫓겨났다.

청 ·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정국은 일본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간섭으로 친로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95년 일본의 책략에 의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어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