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미술품에 찍힌 키스자국, 어떡하지?

억대 미술품에 찍힌 키스자국, 어떡하지?

주제 화학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0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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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은 만들어진 순간부터 끊임없이 훼손될 위험에 노출된다. 사고로 인해 그림이 망가질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작품이 낡아 가기도 한다. 그림의 색은 변하고, 캔버스와 천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이런 그림들을 되살려 내는 작업이 바로 미술품 복원인데 미술품 복원은 박물관의 구석진 곳에서 세밀한 붓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행해지는 작업이 아니다.

미술품을 되살려내는 데에는 과학 지식이 필수적이다.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에 근무하는 엘렌 박스터는 어느날 아침 미술관 안을 둘러보다 워홀의 작품 중 하나인 ‘욕조(Bathtub)’ 앞을 지나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림 한 구석에 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 어느 관람객이 경비원의 눈을 피해 찍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공교롭게도 ‘욕조’에는 아직 보호용 코팅이 씌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이 립스틱 자국을 어떻게 지워야 하나? 물에는 지워지지 않고 알코올이나 벤젠 등의 유기용매를 사용하면 립스틱 자국을 녹일 수는 있겠지만 녹은 립스틱이 캔버스 천속으로 더 깊이 침투해 보기 흉한 핑크빛 자국을 남길 지도 모른다.

몇 개월을 고민하던 미술관 관계자들은 ‘미국 미술품 보존 협회’의 연례학회에서 발표되었던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연구결과를 기억해냈다.

과학자들은 가끔 아주 우연한 발상에서 탁월한 결과를 끌어내는데 NASA와 미술품 복원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NASA의 연구진들은 우주왕복선이나 인공위성의 표면을 망가뜨리는 산소원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우주선이 떠 있는 높은 고도에서는 자외선에 의해서 산소분자(O2)가 원자 상태의 산소(O)로 분해되는데, 이 산소원자들이 우주선의 보호막을 녹여버린 것이다.

이에 NASA는 산소원자의 공격으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연구 내용을 뒤집어 생각해 보았다. 산소원자는 우주왕복선의 표면 보호막을 분해시킬 만큼 강력한 반응력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능력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들은 손상된 예술품, 예를 들면 화재로 망가진 미술작품을 복원하는 데에 산소원자의 분해능력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내기에 이르렀다.

사실 미술품은 화재에 속수무책이다. 1992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거주하는 윈저성에 불이 났을 때도 영국 왕실은 수집해 온 많은 미술품들을 화마에 잃었다. 불길이 그림의 표면에 그을리기만 해도 복원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을림을 벗겨내기 위해 벤젠이나 알코올 같은 유기용매를 사용하면 그림 표면이 부풀어오르고 탈색이 일어나는 등, 원작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기용매 대신 산소원자를 사용하면 천이 부풀어오르거나 색상이 번질 염려가 없다. 그을림과 산소원자 사이의 반응은 그림의 표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원래의 그림이나 캔버스 천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는다. 원작 그림의 성분은 산화금속인데 산화금속은 산소원자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그 위에 시꺼멓게 묻은 검댕, 즉 탄화수소는 산소원자와 반응해서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을림 위에 산소원자를 쐬어주면 그을림은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 그리고 수증기가 되어 ‘마법처럼’ 날아가 버린다.

앤디 워홀 미술관이 기억해낸 것은 NASA의 이같은 연구성과였다. NASA는 이미 화재로 그을린 19세기 유화 두 점을 복원시킨 전력을 갖고 있었고 ‘욕조’의 경우도 복원을 자신했다. 립스틱의 성분 역시 화재의 검댕과 마찬가지로 탄화수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립스틱 낙인에 이어 NASA의 실험마저 실패한다면 수십만 달러나 하는 그림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따라서 몇 번의 모의실험을 거친 후에야 립스틱 자국이 찍힌 ‘욕조’가 NASA 연구진의 손에 넘어왔다. 캔버스 천 한 올 한 올에 산소원자총을 쏘는 작업이 하루종일 계속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빨간 립스틱 자국이 사라져갔다. 자칫하면 지하창고에 처박힐 운명이었던 ‘욕조’가 다시 미술관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미술품 복원에 첨단과학이 동원된 예는 이외에도 많다. 워싱턴 D.C.에 있는 프리어 미술관(Freer Gallery of Art)은 실크에 그려진 아시아 미술품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데, 실크에서 자꾸 노화 현상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민하고 있었다. 실크는 500년에서 1,000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노화가 일어나 구멍이 생기는데 이 부분을 수선하려면 다른 실크를 덧대고 소실된 부분을 다시 그려넣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정확한 복원 방법은 미술품이 그려진 실크와 같은 시대에 제작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번에는 미국 표준연구소(NIST) 물리학자가 나섰다.

NIST의 과학자들이 선택한 것은 실크를 인공적으로 ‘늙게’ 하는 방법이었다. 실크에 감마선과 전자를 쬐어주면 천의 노화가 빨리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체에 해로운 수준보다도 50,000배 정도 강한 감마선과 전자를 실크에 쬐어서 실크천의 강도와 유연성을 떨어뜨렸다. 미술관 측은 이렇게 노화시킨 실크천을 이용해서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해낼 수 있었다.

사실 미술품 복원 자체도 여러 가지 과학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우선, 복원을 위해서는 미술품의 제작 당시 사용한 물감과 천 등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하는데 이때 복원사들은 분광학 장치를 사용한다. 또 그림에서 아예 소실되어 버린 부분을 추정해서 그려넣을 때는 수학적 알고리즘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몇몇 미술관 측은 과학적 복원방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NASA의 한 연구진은 디스커버리 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대다수의 미술관들은 기존의 복원방법을 쓸 수 있는 경우라면 절대로 ‘이상한’ 신기술을 쓰지는 않지요.” 그러나 과학적 복원법은 이상한 신기술도, 마법도 물론 아니다. 현대 과학이 이루어낸 수많은 진보 중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 이식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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