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황

생황

[ 笙簧 ]

요약 아악기(雅樂器)의 하나. 일명 생·화(和)·우(竽).
생황 본문 이미지 1

포부(匏部) 또는 공명악기(空鳴樂器, aero- phone)에 드는 이 관악기는 조선초기만 해도 몸통에 꽂힌 죽관(竹管)의 수에 따라서 13관의 화, 17관의 생, 그리고 36관의 우 이렇게 세 종류가 있었다. 모두 몸통과 취구(吹口) 및 죽관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17관의 생황이 널리 연주됐고, 현재까지도 그 생황이 연주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생황은 일본의 쇼(笙, shō)나 중국의 쉥(笙: shêng)과 역사적으로 서로 관련됐다. 입으로 부는 오르간(mouth organ)으로 영역된다.

『수서』(隋書) 권15, 『당서』(唐書) 권21 및 『구당서』(舊唐書) 권29에 의하면, 생황이 고구려음악과 백제 음악에서 연주됐다. 통일신라의 생황은 725년(성덕왕 13)에 제작된 상원사(上院寺)의 범종(梵鍾) 및 봉암사(鳳巖寺)의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에 보인다.

상원사의 범종에 부조된 수공후와 생을 연주하는 비천상의 탁본과 사진(직지성보박물관 제공)

상원사의 범종에 부조된 수공후와 생을 연주하는 비천상의 탁본과 사진(직지성보박물관 제공)

1076년(문종 30) 생을 가르치는 악사인 생업사(笙業師)가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에 있었다. 1116년(예종 11) 소생(巢笙)·화생(和笙)·우생(竽笙)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의 수입 때 고려조정에 들어왔다. 1406년(태종 6) 명나라 영락황제(永樂皇帝)가 보낸 생황을 박린(朴麟)이 가지고 귀국했다. 세종(1418~1450) 당시 생황의 그림이 『세종실록』 권128에 전한다.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과 부조된 악기의 탁본(생황·횡적·비파·동발·피리·박)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과 부조된 악기의 탁본(생황·횡적·비파·동발·피리·박)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2에 의하면, 세종 때 제조된 생황은 금(琴)·슬(瑟)·관(管)·약(籥)·화(和)·우(竽)·퉁소(洞簫)·지(篪)·훈(塤) 등과 함께 회례연(會禮宴)의 등가헌가에서 연주됐다. 성종(1469~1494) 때 종묘의 등가와 헌가에서 향비파(鄕琵琶)·해금(奚琴)·당적(唐笛)·대금(大笒) 등과 함께 연주됐다. 성종 당시 13죽관의 화는 12율(黃鍾~應鍾)을 냈고, 17죽관(竹管)의 생은 12율과 4청성(潢·汏·汰·浹)을 냈으며, 『악학궤범』 권6 소재 생황은 17죽관에서 나는 소리를 12율명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악학궤범』 권6 소재 17죽관의 생황

『악학궤범』 권6 소재 17죽관의 생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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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1592)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이후 황엽장(簧葉匠)의 사망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 생황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동지사(冬至使)가 북경(北京)으로 떠날 때 악사(樂師)를 동행시켜 중국 북경에서 구입하여 사용한 기록이 『악장등록』(樂掌謄錄)과 『영조실록』에 전한다.

조선후기 진연(進宴)·진작(進爵)·진찬(進饌) 때 생황이 연주됐음은 아래에 정리됐듯이 여러 의궤(儀軌)에 나오며, 생황이 민간에서 널리 연주됐음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풍속도(風俗圖)에서 확인된다.

조선후기 의궤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의 생차비 일람표

조선후기 의궤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의 생차비 일람표
서기(임금) 잔치명 생차비(笙差備),

1827년(순조 27)

진작(進爵)

문명신(文命新), 서봉범(徐鳳範), 유관득(劉寬得), 문명순(文命純)

1828년(순조 28)

진작

서봉범(徐鳳範), 신광호(辛光浩), 박경완(朴景完), 차성돌(車聖乭)

1829년(순조 29)

진찬(進饌)

유관득(劉寬得), 김문손(金文孫)

1848년(헌종 14)

진찬

김하성(金夏成), 안형원(安亨遠)

1868년(고종 5)

내진찬(內進饌)

안원형(安遠亨)

1873년(고종 10)

진작

안원형(安遠亨)

1877년(고종 14)

진찬

이용석(李龍碩)

1887년(고종 24)

진찬

강봉학(姜鳳學), 이금천(李今天)

1892년(고종 29)

진찬

강봉학(姜鳳學), 박봉남(朴鳳南)

1901년 5월(광무 5)

진찬

박봉남(朴鳳南), 이응룡(李應龍)

1901년 7월(광무 5)

진연(進宴)

이응룡(李應龍), 박봉남(朴鳳南)

1902년 4월(광무 6)

진연

이귀성(李貴成), 박봉남(朴鳳南)

1902년 11월(광무 6)

진연

박봉남(朴鳳南), 이귀성(李貴成)

신윤복의 생황도

신윤복의 생황도

김홍도의 취생도

김홍도의 취생도

조선후기 생황으로 연주된 악보는 『유예지』(遊藝志) 소재 생황자보(笙簧字譜)이다.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시절 김계선(金桂善)과 박창균(朴昌均)이 생황을 잘 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김태섭(金泰燮)과 정재국(鄭在國)이 생황을 연주하였다. 그것은 모두 17죽관짜리 생황이다.

옛날 생황의 몸통은 현행 것처럼 나무가 아니라 바가지였기 때문에 포부로 분류됐다. 현행 생황의 몸통은 모두 나무로 제작되나 역시 포부로 분류되고 있다. 몸통에 꽂힌 죽관의 끝에 하모니카 혀처럼 생긴 금엽(金鐷, reed) 곧 쇠청이 달려 있고, 이 쇠청 바로 위에 지공(指孔)이 뚫려 있으며, 취구(吹口)는 몸통에 달려 있다. 연주자는 취구로 바람을 불어 넣고 죽관의 지공을 막으면, 그 죽관에 달린 쇠청이 진동되어 소리를 내게 된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3.1186~89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195~96, 222, 258, 319, 346, 372, 403, 486, 589, 648, 710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방송, 215~16쪽
  • 『韓國樂器』 송혜진 글 강운구 사진, 서울: 열화당, 2001년, 188,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