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음악

고구려음악

[ 高句麗音樂 ]

고구려는 중국 대륙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보다 일찍 음악문화를 발전시켰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고구려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 고구려의 악공과 무용수를 파견했다. 또한 일본에 보낸 고구려음악은 고마가쿠(高麗樂, Komagaku)로 불리었다.

고구려음악은 5세기를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해 서술할 수 있다. 5세기 이전의 고구려음악은 왕산악(王山岳)의 거문고와 안악(安岳) 제3호분을 중심으로 서술될 수 있다. 5세기 이후의 고구려음악은 여러 고분벽화에 나오는 악기와 일본의 고마가쿠에 의거하여 서술될 수 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같은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연행된 노래와 춤은 고구려 초기 음악문화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4세기 무렵 왕산악이 거문고라는 새로운 악기를 창제함으로써 고구려음악은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초창기 거문고의 모습은 무용총(舞踊塚)이나 5회분4호묘의 벽화에서 발견되고, 거문고와 왕산악 관련 기사는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전한다.

357년(고국원왕 27)에 건립된 안악(安岳) 제3호분의 회랑 벽화에서는 고구려가 수용한 중국의 음악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즉 4세기 무렵 이미 고구려에는 중국 한(漢)나라의 황문고취(黃門鼓吹)와 단소요가(短簫鐃歌)를 수용한 고취악대(鼓吹樂隊)가 연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후실(後室) 주악도는 무용반주악기로 완함(阮咸)·장적(長笛)·거문고가 연주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5세기 이후의 고구려음악은 중국 북부를 거쳐 들어온 서역악기를 수용한 오현(五絃)·금(琴)·쟁(箏)·피리(觱篥)·횡취(橫吹)·소(簫)·고(鼓)에 의해서 발전됐는데, 이러한 악기들은 『수서』(隋書) 권81과 『북사』(北史) 94에 전한다.

고구려의 새로운 악기들은 집안(輯安)의 5회분4호묘와 5호묘(옛 집안 제17호분)·무용총(舞踊塚)·삼실총(三室塚)·장천(長川) 제1호분·덕흥리(德興里)고분·평양역전고분(平壤驛前古墳)·수산리(修山里)고분·감신총(龕神塚)·대안리(大安里) 제1호분·팔청리(八淸里)고분·약수리(藥水里)고분·강서대묘(江西大墓)의 벽화에서 발견된다.

이 무렵 고구려의 음악인이 중국과 일본에 파견됐고, 여러 고구려 악기가 중국과 일본에서 연주됐다.

일본에 소개된 횡적(橫笛)·군후(군篌)·막목(莫目) 같은 고구려 악기는 고마가쿠에서 연주됐다. 군후는 거문고이고 막목은 도피피리로 밝혀졌다. 또한 고구려인들은 신조소(新鳥蘇, Shintoriso)·진주독(進走禿)·납소리(納蘇利, Nasori)·소리고(蘇利古)·곤륜팔선(崑崙八仙, Konron Hassen)·호덕악(胡德樂)·왕인정(王仁庭)·귀덕후(歸德侯, Kitokugo)·능절(綾切)·지구(地久, Chikyū) 같은 부가쿠(舞樂, Bugaku)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수나라 개황(開皇 589~600) 때의 칠부기(七部伎)와 대업(大業 605~617) 때의 구부기(九部伎)에 든 고려기(高麗伎) 곧 고구려음악에서 탄쟁(彈箏)·와공후(臥箜篌)·수공후(竪箜篌)·비파(琵琶)·오현(五絃)·적(笛)·생(笙)·소(簫)·소피리(小篳篥)·도피피리(桃皮篳篥)·요고(腰鼓)·제고(齊鼓)·담고(擔鼓)·패(貝), 이상 14종의 고구려 악기가 연주됐다. 당나라 태종(626~649) 때의 십부기(十部伎)에 든 고구려음악에서 연주된 탄쟁·추쟁(搊箏)·와공후·수공후·비파·의취적(義嘴笛)·생·소·소피리·대피리(大篳篥)·도피피리·요고·제고·담고·패, 이상 15종의 고구려 악기는 수준 높았던 고구려음악을 입증해준다.

이러한 악기 중에 비파(琵琶)·피리(觱篥)·횡적(橫笛) 같은 악기는 서역악기를 수용한 고구려 악기이다. 이러한 악기들은 5세기 이후 고구려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 백성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서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州) 같은 민요는 『고려사』 권71(「악지」)에 전한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1.165~69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38~52, 76~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