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

박연

[ 朴堧 ]

요약 음악이론가. 세종(1418~1450) 때 문신(文臣). 본관은 경남 밀양(密陽).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문헌(文獻). 충북 영동(永同) 출생.
출생 - 사망 1378년 ~ 1458년

1378년(우왕 4) 출생한 박연은 1405년(태종 5) 생원에 급제했고,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진사·집현전 교리·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냈으며, 1426년 봉상판관(奉常判官) 겸 악학별좌(樂學別坐)를 지냈다. 1432년(세종 14) 관습도감 별감, 1439년(세종 21) 악학제조(樂學提調), 1453년(단종 1)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1455년(세조 1) 중추원 제조를 역임하고, 1458년(세조 4) 향년 81세로 고향 영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업적은 악서편찬, 율관제작 및 조회아악(朝會雅樂)과 회례아악(會禮雅樂) 제정, 그리고 제향아악(祭享雅樂) 정정으로 요약된다.

왕산악(王山岳)·우륵(于勒)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박연은 1378년(우왕 4) 양광도 영동(충북 영동군)에서 박천석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오로지 음악에 뜻을 두고 피리·젓대에 정통하고 음악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 1405년(태종 5)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411년(태종 11) 문과시험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 등의 벼슬을 지냈고, 1418년(태종 18)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이 되어 충녕대군(세종)에게 글을 배워주었다. 이해 8월 왕위에 오른 세종은 봉상시(奉常寺) 판관직을 맡았던 박연을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음악에 관한 일을 겸해서 맡아보게 하였다.

1425년(세종 7) 가을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율관제작에 필요한 거서(秬黍: 기장)가 나왔고, 그 이듬해(1426) 경기도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당시 궁중음악인 제향악·조회악·연향악을 새롭게 제정하기 위해 12율관을 제정하고 그에 의거하여 여러 아악기를 제작하고 개량할 수 있었다.

박연의 율관 제작은 세 차례 시도되었다. 1차는 1425년, 2차는 1427년, 3차는 1430년이다. 두 차례의 실패 후 그는 자연산 기장 대신에 밀랍(蜜蠟)으로 빚어 만든 인조(人造) 기장으로 황종율관을 제작하여 그 음이 맞는지를 중국의 종경(鐘磬)을 기준으로 삼았다. 기장 한 알을 1푼(分)으로 삼고 10알을 1촌(寸)으로 삼았다는 것과 1촌을 더한 것이 황종척(黃鍾尺)이라고 한 횡서척(橫黍尺), 즉 10분척으로 기준을 삼았다. 황종관의 길이 9촌이 90분이라고 한 것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근거한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 소재 황종관장(黃鍾管長)과 같다.

1429년(세종 11) 주종소(鑄鍾所)를 설립하여 편종(編鍾)을 제작할 때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 악학제조(樂學提調) 유사눌(柳思訥), 군기판관(軍器判官) 정양(鄭穰)과 함께 참여하였다. 중국 편경(編磬)의 황종(黃鍾)에 맞추어 1427년(세종 9) 12매의 편경 한 틀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 제정한 12율관에 의해 제작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1430년(세종 12) 남양(南陽)의 경석(磬石)으로 표준 황종율관(黃鍾律管)에 맞추어 편경을 제작했고, 이어서 편종을 만들었다. 이렇게 편종과 편경을 새로 제작한 박연은 악기도감(樂器都監)의 총 책임자로 임명되어 남급(南汲)·장영실(蔣英實) 등과 함께 수많은 아악기를 제작하였다. 새로 제정된 조회악은 1431년(세종 13) 1월 초 하루 날 근정전에서 진행된 조회의식에서 처음으로 연주됐고, 연례악은 1433년(세종 15) 1월 근정전에서 벌린 회례연 때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봉상판관 시절 박연은 향악곡 40여 곡을 수집했으니, "최자"(嗺子)·"탁목"(탁木)·"우식"(憂息)·"다수희"(多手喜)·"청평"(淸平)·"거사련"(居士戀)·"노중선"(露中仙)·"상춘광"(賞春光)·"망춘천"(望春天)·"낙춘천"(樂春天)·"희춘원"(喜春苑)·"상춘곡"(賞春曲)·"장하편"(長河篇)·"진아우"(陳鴉羽)·"천쌍조"(天雙鳥)·"춘계인"(春桂引)·"운선곡"(雲仙曲)·"수선곡"(壽仙曲)·"실상곡"(實相曲)·"휴목"·"구묘"(狗墓) 같은 거문고곡과 눈죽조(嫩竹調)·하림조(河臨調)로 된 가야금곡이 그것이다. 이러한 향악곡들을 그 가사와 곡조로 보아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1453년(단종 1) 그의 아들이 계사년 사건에 연좌되어 벼슬을 박탈당한 박연은 그 후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 자리에 오르게 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영동에 내려가 1458년(세조 4)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집으로는 『난계선생유고』(蘭溪先生遺稿) 일명 『난계유고』(蘭溪遺稿)가 있다.

박연 초상화(국립국악원 소장)

박연 초상화(국립국악원 소장)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54쪽
  • 『朝鮮時代 樂律論과 詩樂和聲』 김수현, 서울: 민속원, 2012년, 7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