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맹사성

[ 孟思誠 ]

요약 음악이론가. 젓대명인. 세종(1418~1450) 때 좌상(左相).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일월(日月).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출생 - 사망 1360년 ~ 1438년

1360년(공민왕 9) 충청도 온양(溫陽)에서 태어나 젓대명인으로 유명한 그는 우의정 시절 (慣習都監)과 (樂學)에도 관여하여 음악지도자의 능력을 발휘했고, 1427( 9) 악학의 책임자 직무를 수행하면서 (樂學別坐) (朴堧)을 거느리고 12(律管) 제작과 악기개량 및 제작, 신정아악(新定雅樂)의 창제를 지도하였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시작으로 예조의랑(禮曹議郞)·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1407)·한성부윤(漢城府尹 1408) 등을 거쳐 1432년 좌의정에 이른 맹사성은 음률에 해박하여 조선왕조의 건국 초기부터 궁중음악의 정비에 기여하였다. 1411년(태종 11) 맹사성이 충주판관, 황해도감사로 임명됐을 때, 예조와 영의정 (河崙)은 임금에게 제의하여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맹사성이 음률과 악보에 밝아서 선대 임금의 (正樂)을 복구시킬 만하다고 하면서 정악과 옛 악보를 (樂工)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권22). 그 후 맹사성은 박연·(鄭穰)·(南汲) 등의 음악이론가들과 함께 건국 초기의 혼란한 아악(雅樂)을 바로 잡고, 당악(唐樂)과 (鄕樂)의 모순된 점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신정아악을 창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당시 (卞季良) 등이 새롭게 한 들을 향악곡에 맞추어 악공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맹사성은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세종실록』 권2). 세종 때 (領樂學). 1429년(세종 12) (鑄鍾所)를 설립하여 (編鍾)을 제작할 때 (樂學提調) 유사눌(柳思訥), 악학별좌(樂學別坐) 박연(朴堧), 군기판관(軍器判官) 정양과 함께 참여하였다. 1430년(세종 12) 제향악(祭享樂)·(朝會樂)·(宴禮樂)에 쓰일 신정아악이 새롭게 제정됐을 때, 맹사성은 "이제 전하께서는 아악을 제정하여 조정에서 연주하게 함으로써 우리 조선에는 없었던 큰 음악을 마련해 놓았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음률에 해박한 음악이론가였을 뿐 아니라 젓대[大笒] 명수이기도 한 맹사성에 관한 기록은 『해동야언』(海東野言) 권2와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 권3에 이렇게 전한다. "젓대를 손에 쥐고 날마다 3~4곡조를 불곤 했을 때 맹사성은 대문을 닫아 매고 손님을 접대하지 않았고,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 밑에서 겨울에는 방안에서 젓대를 불었다. 그리하여 맹사성을 찾아오는 사람은 마을 입구에 당도하여 젓대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그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병조판서가 그의 집을 찾아왔을 때 비가 새는 것을 보고 돌아가서 자기 집 앞채를 허물어버렸다는 일화는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권3에 전한다.

시 짓기를 좋아하여 여러 편의 를 지은 맹사성의 시조 중에는 강호(江湖)의 봄·여름·가을·겨울 경치를 노래한 네 편이 『』(歌曲原流)에 전한다.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의 「맹감사현」(孟監司峴)에 전하는 맹사성 관련의 기사는 이렇다.

"맹감사현은 북산 아래 재동(齋洞) 접경에 있다. 옛날 문정공(文貞公) 맹사성이 살았으므로 동네 이름이 되었다. 맹사성은 세종 때 재상이다. 「무인기문」(戊寅記聞)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맹사성의 자는 성지(誠之)이고, 관향은 신창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솔직하여, 단아하고 묵중해서, 재상으로 있으면서 대체(大體)만 지켰다. 천성적으로 음률을 좋아해서, 언제나 젓대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두세 마디씩 불었다. 삽작문을 닫고 손님을 대하지 않았으며, 공사를 결재 맡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제야 문을 열고 접대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았으며, 방안에서는 부들자리를 깔고 앉았다. 좌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무로 왔던 사람이 돌아가면 곧 문을 닫았다. 공무로 오는 사람은 마을 어귀에 와서 젓대 소리를 듣고 공이 있는 줄 알았다"라고.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298~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