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리 유적

전곡리 유적

[ 漣川 全谷里 遺蹟 ]

지역 연천
전곡리 출토 석기류

전곡리 출토 석기류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현재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1978년에 당시 동두천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9년 이후 1993년 사이에 모두 9차례의 조사가 있었으며, 1980년에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하고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그리고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하고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 03′, 그리고 북위 38° 01′에 해당된다.

전곡리 유적은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 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 그리고 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에는 중생대의 쥬라기에 분출된 대보거정화강암류가 분포하고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과 임진강 연안지역에는 강을 따라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오리산)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한탄강·임진강을 따라 분포하는 저지를 메우며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하여 있다. 이 현무암분출은 중부홍적세동안 여러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류에서는 6매, 하류인 문산에서는 1매의 용암류층이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는데 이 2번의 분류가 가장 많은 양의 용암을 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전곡리의 2매 중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그리고 상부의 현무암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흔히 전곡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Bruhnes)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로 나타나고 있다.

전곡현무암 분출 이전의 고기 한탄강의 퇴적은 현재의 한탄강을 따라서 여러지점에서 현무암 아래의 미고결의 사력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전곡의 동쪽에 있는 백의리에서 잘 관찰되고 있어서 백의리층으로 부르고 있다. 현무암분출 이후 저지를 따라 넓게 형성된 현무암 하상 위에 새로운 유로가 형성되어 상당기간동안 흐르면서 넓어진 하폭 내에 퇴적을 이루게 되고, 한편으로는 하상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현무암을 침식하면서 강은 점진적으로 현재의 유로의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고 하상침식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결국 오늘날의 한탄강으로 안정되었다.

전곡현무암은 냉각시 수축의 차이로 인하여 발달하게 된 주상절리 등의 절리구조로 균열이 있어서, 서리작용과 집중호우의 기후현상이 특징인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짧은 기간동안 큰 침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대지 위에 존재하는 구석기 포함층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대지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간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빠른 속도의 현무암 침식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현무암이 30만년 전경에 분출된 것으로 본다면 대지 위의 구석기 포함층의 형성연대는 적어도 20만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전곡의 적색점토층이 더운 기후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기후가 18만년 전과 21만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으리라고 보는 중국 낙천(洛川)뢰스층의 적색토띠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연대관과는 별도로 퇴적층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escence dating method)에 의하여 얻어진 45000 B.P.를 유적의 연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한편으로 지질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전곡리의 퇴적물이 마지막 간빙기에 퇴적되고 이 후 빙하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침식되어 현재의 지모를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전곡리의 연대는 앞으로 층위 내에서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연대를 얻어내고 이러한 연대가 지질적인 변화과정과 합치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가 전곡리 연대 이해의 관건이라고 하겠다.

퇴적층은 지점에 따라 1m 미만의 깊이에서 6~8m 내외의 깊이까지 드러나고 있다. 제2지구의 발굴에서는, 현재의 강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동편 언덕에서는 점토층으로만 이루어진 퇴적이 있는가 하면, 서편의 강쪽 능선에서는 두터운 굵은 모래층이 점토층 아래에 드러나고 있으며 이 모래층은 다시 미세사층을 덮고 있다. 이 회색 또는 황색의 미세사층은 제2지구 서편에 버려진 유로(流路)에 형성된 우각호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퇴적물은 전곡리 전역을 걸쳐서 군데 군데 발견되고 있어서 초기 퇴적에 있어서 소규모의 호수환경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는데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하여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퇴적으로 보여지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그래서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하여 사냥과 채집을 하는 동안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이 보이지 않고 있다.

10차 걸친 발굴에서 4,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외에도 현무암, 편마암 그리고 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川石)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인데 양면가공된 것과 단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형태적인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석기가 존재하고 있다.

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단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여러면석기(多角面圓球)는 상당히 구형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모양의 것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의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록날, 그리고 오목날 등의 형식이 보이며 몸통이 두툼하고 급경사인 볼록날의 긁개가 보다 정형화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형석기들은 집중가공된 것이 적어서 제작상의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몸돌은 2~3매의 박편을 떼어낸 변형된 냇돌 또는 막몸돌(casual core)에서부터 보다 정형화한 반원추형몸돌에까지 다양한 양상이다. 막몸돌류가 정형화한 형태의 것들보다도 훨씬 많으며 다량의 박편을 떼어낸 경우라 하더라도 일정타격면을 반복 또는 규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불규칙하게 박편제작한 경우가 훨씬 많다. 박편제작이나 가공에는 직접타격법(돌망치를 사용한)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주먹도끼 또는 가로날도끼 등의 대형석기제작을 위한 대형박편의 제작에는 대석법(모루떼기 기법)도 사용되었다.

박편은 대부분 천석의 자연면평면이나 박리흔평면을 이용하여 떼어냈으며 소수의 다각모서리 타격면(facetted striking platfirm)이 보이나 조정타격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많은 수의 박편이 등면(dorsal face)에 자연면이 남아 있으며, 박리각이 100~105°와 110~115° 2개의 범위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한 타격면을 2차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 중 다듬은 석기는 대체로 5~15% 내외이며 약간의 몸돌과 박편이 존재하고 대형 또는 소형의 석편과 부스러기가 많은 수(8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량의 자연천석도 존재한다. 주먹도끼 등의 양식적으로 발달한 석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법으로는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라고 보여진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이러한 석기의 존재 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2분하던 모비우스(H.Movius Jr.)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로, 세계 구석기학계의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구석기공작 이해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홍적세 동안 고인류의 서식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한편 절대연대와 지층 토양쐐기분석 결과, 지질분석 등의 최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25000년 전을 넘지 않는 중기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재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참고문헌

  • 전곡리 구석기 유적 1994-95년도 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경기도 연천군, 1996년)
  • 보성강·한탄강 유역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보고서-전곡리 5지구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보고-(문화재관리국문화재연구소, 1994년)
  • 전곡리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보고서-1992년도-(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경기도 연천군, 1993년)
  • 전곡리-1986년도 발굴조사보고-(서울대학교박물관, 1989년)
  • 전곡리(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