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문학

낭만주의문학

[ romantic literatures , 浪漫主義文學 ]

요약 감성(感性)의 해방, 무한에 대한 동경과 불안, 질서와 논리에의 반항을 특징으로 하는 문학.

고전주의문학과 대립되는 말이다. 그 기원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래 되었으나 특히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유럽 전역에 걸쳐 여러 나라의 민족정신의 각성과 때를 같이하여 발생한 문학사조이다.

절대왕정과 가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그리스·로마에서 규범을 찾으려는 고전주의가 우세하였던 프랑스에 비해, 종교개혁이 개인주의를 조장하고 감정적 신비주의를 발생시킨 영국·독일에서 먼저 싹이 먼저 트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J.로크의 경험철학, S.리처드슨의 감수성 풍부한 사실소설(寫實小說), 시인 E.영과 T.그레이의 우수(憂愁)가 그것이며, 특히 J.맥퍼슨이 3세기경의 시인의 작품이라 칭하며 소개한 《오시언의 시》는 중세적인 환상과 켈트혼(魂)의 표현으로서 충격을 주었다. 또 스위스의 시인 S.게스너의 감상적 전원취미, 독일에서는 레싱의 셰익스피어 예찬, 클롭슈토크의 애국주의, J.G.헤르더의 게르만 정신에의 회귀를 거쳐 괴테와 실러의 슈투름 운트 드랑(疾風怒濤) 운동에 이른다.

프랑스의 루소 또한, 신교적(新敎的) 색채가 짙은 제네바 태생인데 그가 리처드슨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문체로 청순한 사랑을 그린 《신(新)엘로이스》는 전 유럽을 풍미하였고, 다시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와 주인공을 모방하여 자살하는 자가 나올 정도로 유행하여 낭만주의의 기운(機運)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1789∼94)으로부터 나폴레옹 제정시대에 걸쳐, 전쟁과 내정의 혼란을 거듭하던 프랑스에서는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 스탈 부인의 《문학론: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본 문학》 《독일론(獨逸論)》, 샤토브리앙의 《그리스도교 정수(精髓)》 이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으나 그 동안에 영국·독일은 낭만주의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호반시인(湖畔詩人)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공저 《서정민요집(敍情民謠集)》(1798)의 뒤를 이어 영국에서는 바이런, 셸리, 키츠 등 제2기의 시인이 나타났는데, 특히 바이런의 반역적 정열은 W.스콧의 역사소설과 더불어 프랑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는 괴테와 실러가 고전주의로 복귀한 뒤를 이어, 최초로 절대적 심미주의를 표방하는 L.티크, F.노발리스, 이어서 환상적 사실주의와 민족주의를 특색으로 하는 A.아르님, 푸케, 샤미소, 또 이어서 독일 낭만파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J.파울, 횔더린, 클라이스트 등의 작가와 탐미주의적 환상소설의 호프만이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낭만주의 운동이 시작된 것은 라마르틴의 《명상시집(瞑想詩集)》(1820)에서 비롯되는데, 그 때는 이미 영국·독일에서는 이 사조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문학운동으로서 가장 활발한 전개를 보였고 큰 영향을 끼친 것도 프랑스였다. 문학과 사회와의 상관관계를 강조한 스탈 부인과, 그리스도교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샤토브리앙을 선구자로 하고, 라마르틴, 위고, 비니, 뮈세 등의 시인이 결속하여 서정시와 연극 분야에서 고전주의의 아류를 타도하였다.

처음에는 스탕달 등 자유주의파와 위고 등 왕당파(王黨派)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맹주(盟主) 위고가 “낭만주의란 문학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통합이 완성되었다. 그의 사극(史劇) 《에르나니》를 초연하는 날, 고전극에 대한 논쟁에서 낭만주의파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낭만주의 문학운동은 19세기 전반밖에 계속되지 못했으나 무엇보다도 이성적 질서와 균형잡힌 형식미를 존중하여, 정적(靜的)이며 조각적이었던 고전주의에 반하여 낭만주의는 정열적 자아의 해방, 국민적·지방적 전통에의 복귀, 자연에 대한 사랑, 명상적 신비주의, 미적 회고취미(懷古趣味), 이국정서 등을 통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혔고, 서정시에 음악성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현실에의 관심을 자각시켜 상징주의와 사실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한국의 낭만주의문학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1920년대에 동인지(同人誌) 《백조(白潮)》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였으나, 불과 2년도 안 되어 퇴색하기 시작하여 1924년도에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다만 그 영향만이 1930년대의 서정시인들에게 미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민적 희망을 잃고 식민지 지배하에 놓이게 된 문인들은 실의와 허탈에 빠져 자포자기적이고 퇴폐주의적인 문학을 낳았다. 《백조》에 앞서 발간된 《폐허(廢墟)》지에서 염상섭(廉想涉)·김억(金億) 등의 문인들은 퇴폐문학의 지양을 부르짖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시인들, 특히 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 등의 작품에는 퇴폐적 ·허무적 ·유미적 색채가 짙었고, 이런 경향이 마침내 낭만주의 문학의 온상을 이루게 되었다.

1922년 1월 동인지 《백조》가 발간되어 홍사용(洪思容)·박종화(朴鍾和)·현진건(玄鎭健)·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노자영(盧子泳)·박영희(朴英熙) 등이 이에 관여하면서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본격적으로 싹트게 되는데, 이들도 《폐허》의 동인들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이상과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여건 속에서 절망에 빠진 결과, 그 도피구(逃避口)로서 몽상(夢想), 즉 낭만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박종화의 《영원의 승방몽(僧房夢)》(백조 창간호) 《흑방비곡(黑房祕曲)》(백조 2호)과 같은 신비적 세계, 홍사용의 《봄은 가더이다》(백조 2호)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 3호)와 같은 염세적 감상주의,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영희의 《꿈의 나라》, 나도향의 《젊은이의 시절》과 같은 동경(憧憬)과 꿈의 세계를 다룬 낭만문학이 꽃피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문학사상 하나의 문예사조로서는 가장 찬연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또한 싫건 좋건 오랫동안 그 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서구문학에서처럼 역사적인 필연성에서 생긴 근대적 자아의식의 각성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서구사조(西歐思潮)의 단순한 외형적 모방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한국 초기의 여러 문예사조와 함께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런대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