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샤토브리앙

프랑수아 샤토브리앙

요약 19세기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그리스도교의 정수》(1802)는 그리스도교를 고양하는 범신론적 경향이 강했다. 대혁명 후 황폐한 민심에 큰 영향을 끼쳤고, 낭만주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게 하였다.
원어명 FrançoisAuguste-René de Châteaubriand
출생-사망 1768.9.4 ~ 1848.7.4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생말로
주요작품 《그리스도교의 정수》(1802)

브르타뉴 해변 생말로의 유서 깊은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 몰락한 귀족의 어두운 그늘이 감도는 집안에서 오직 모래와 파도만을 벗하면서 자랐다. 1786년 아버지의 명을 받아 육군에 입대, 소위로 나발 연대에 근무하다가 같은 해 가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군에서 제대, 1789년부터 파리로 나와 많은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791년 단신으로 도미(渡美), 북미의 자연을 만끽하면서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792년 귀국, 반혁명군에 참가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망명(1793)하였다. 이 때부터 7년 동안 망명귀족의 쓰라림을 겪으면서 《혁명론 Essai sur les ré volutions》(1797)을 써 18세기사상을 간명하게 요약하였다.

원래 그는 루소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부정하였으나, 1798년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옥중에서 희생당하자 그리스도교에 복귀, 호교론(護敎論)의 열렬한 투사가 되어 대저 《그리스도교의 정수 Le gé nie du christianisme》(1802)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문학·예술·고딕 건축 및 제식(祭式) 등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그리스도교를 고양(高揚)하는 범신론적 경향이 강한 것이었는데, 대혁명 후의 황폐한 인심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였다. 이 책의 1부인 《아탈라 Atala》(1801)와 《르네 René》(1802)는본편과 전후하여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모두가 원시적 자연에 대한 동경, 연애지상주의적 정열, 청년의 허무주의적 번민 등을 화려한 필치로 엮어나간 것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게 하였다.

이 밖의 작품으로 《순교자》(1809) 《예루살렘 기행》(1811) 등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정수》로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아 1803년에 로마 대사관의 비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외교계에 진출, 왕정복고 후에는 대사로서 각지에 부임하고, 한때는 외무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1830년 7월혁명 이후는 관계를 물러나 방대한 자서전 《무덤 저편의 추억 Mé moires d'outre-tombe》(1848∼1850)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