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문화

프랑스의 문화

오르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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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문 어느 면에서도 다양성이 풍부한 프랑스가 정치·행정면에서 재빨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것은 언뜻 보면 역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주변 국가들과의 접촉이 쉬워 다른 문명·제도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은 데다(예컨대 일부에서 게르만의 관습법을 채용한 사실 등), 지역적 차이가 컸기 때문에, 이를 통일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프랑스인의 본질적인 기질로 알려진 주지주의(主知主義)와 법률주의(法律主義)의 2대 흐름이 이와 같은 체제 확립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주지주의야말로 프랑스 문화의 근본 모습이다. 프랑스어(語)는 라틴어가 점차 골(Gaul)화하여 형성된 것인데 이미 스트라스부르의 선서(842)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다.

12,13세기에는 프랑스어에 의한 최초의 중요 문학작품 《롤랑의 노래》로 대표되는 서사시가 나타났으며 이에 뒤이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른바 ‘로망 쿠르투아’의 시대를 맞이하는 등 당시의 중세 봉건사회에서 기사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사고(思考)·이론을 제일로 하고 표현의 이론 정연함을 추구하는 주지주의가 중세 봉건제의 확립·발전과 더불어 점차 프랑스인의 기질에 침투하여 16세기의 프랑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명료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경향은 프랑스 문화의 명석한 논리와 비판을 즐기는 지성, 구체적인 것을 존중하는 실증적 정신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이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 사고의 과정에서 ‘참된 인생’을 터득하려는 경향 때문에 눈앞의 사실을 분석하는 측면에서 후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가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오히려 ‘원형(原型:prototype)의 나라’이고 ‘양산(量産)의 나라가 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지주의의 보편성과 추상성 때문에 프랑스 문화의 이념은 세계적으로 넓게 받아들여져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가 계승한 로마 문명의 보편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풍부하고 다양한 국토와 천혜의 기후 아래, 프랑스인들은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북돋워지는 한편, 중앙권력이 점차 확립됨에 따라 권력을 두뇌로 하는 유기체로서 국가를 이해하는 추상적인 국가관이 생겼다. 또 나아가서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창조력을 소생시켜 이것을 헤쳐나가야 할 ‘우리 프랑스’라는 관념이 프랑스인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심어졌다. 이것이 ‘교회의 장녀(長女)’라는 종교적인 의식과 결부되어 쇼비니즘(배타적 애국심)의 전통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또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추상적 관념이 법률주의로 정착되었다.

교회의 신성(神聖)을 배경으로 한 국왕 아래에서도, 또 이것을 공화제의 이념으로 바꾸어 놓은 뒤에도 이 독자적 국가관은 존속되었으며, 프랑스인 스스로도 너무나 현실을 무시하고 추상화해버린 이 사실을 반성하는 반면, 그것을 소중히 아끼는 모순을 되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파리에 강력한 뷰로크라시(관료정치)가 확립되는 정신적 밑바탕이 완성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한편 명료한 카테고리의 설정을 즐기는 정신은 동질의 것을 통한 조직에 대하여는 편향성이 있다. 예컨대 종적(縱的) 방향의 전국조직, 즉 중앙집중의 경향은 행정뿐이 아닌 직업 등에서도 아직까지 명확하며, 현재의 프랑스가 국토의 재편성이라는 큰 문제를 앞에 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평(水平) 방향의 조직, 즉 이질(異質)의 것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견해는 프랑스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범위의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국왕 사이의 역사적 관계, 또 교회의 이념으로부터 평등을 출발점으로 하는 프랑스 사회에 개인주의의 정신이 생긴 뒤 근세에는 자유와 법률주의의 사상에 뒷받침되어 강력하게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혁명을 완수하고 정치적 ‘자유’의 대원칙을 수립한 프랑스인이 근대 산업혁명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인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에 시작된 인구 정체로 말미암아 산업 근대화의 필요성이 적었다는 사실과 병행하여 기업에서 개인의 주도권, 나아가서는 ‘인간성’의 상실은 프랑스의 개인주의에 반(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강대해진 프랑스에서는 드 말레르브 궁전을 중심으로 한 활동의 영향 아래 국민문화로서의 고전주의가 개화되었지만, 여기에서도 보편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으며 당시 프랑스의 군사적·정치적 우세와 더불어 유럽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종교개혁도 르네상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칼뱅의 엄격한 종교생활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휴머니즘(인문주의)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12세기에 파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양식이 각지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포함하는 추상의 산물이었던 점도, 이 시대에 체계화되고 파리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철학 역시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서 고전주의의 조락 이후 18세기에 시작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출발점으로 디드로의 《백과전서(百科全書)》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움직임은 과학적 탐구심과 동시에 자유검토의 정신을 진작시켜 사회적으로는 대혁명의 1단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독재시대를 거쳐 19세기에는 왕정(王政)이 복고되기도 하였으나 서민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루이 필리프가 즉위함으로써 프랑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때는 어떤 의미에서 확실히 대립적인 낭만주의가 활발해졌지만, 이것을 가리켜 반드시 반동적(反動的) 또는 히스테리컬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 자체가 18세기 말의 소란스러운 동란(動亂)의 생활로부터 탈피를 바라고 있었고 루소나 샤토브리앙 등에 의하여 이미 탄탄대로가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문학과 정부 및 사회적 현실의 연관성을 강조한 운동이었고, 진보적 운동인 동시에 조국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애국주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 감상적 측면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1848년의 혁명에 의해 제2공화국이 성립되고, 그 뒤를 이어 제2제정(帝政)이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패전하여 제3공화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과학·기술의 분야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는 동시에 문예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도 마치 12세기의 프랑스에서 본 바와 같이 또다시 세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의 문학·예술·음악·연극 등의 모든 예술활동은 파리에 집중되고, 각각 반발과 공명(共鳴)을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틀 속에서 다시 창조되었다. 다다이즘·미래파(未來派)·추상주의에서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표현을 통하여 잇달아 저마다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프랑스 문화에 존재하는, 많은 요소의 복합성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실존주의 등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인 동시에 칼뱅의 나라이고 디드로의 나라이며, 한편에서는 지드와 사르트르가 있다. 또 한편에서는 페기·베르나노스도 태어난 나라이다. 이것은 추상과 보편성을 기본으로 각 시대를 뛰어넘어 온 프랑스 문화의 두께를 짐작하게 하는 특성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