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복고

왕정복고

[ Restoration , 王政復古 ]

요약 혁명이나 기타의 사정으로 일단 폐지되었던 왕정(王政: 왕이 다스리는 정치)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

대표적 예는 1660년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의 부활과 1814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의 부활이 있다.

영국의 왕정복고

1658년 O.크롬웰이 죽은 뒤 그의 셋째 아들 R.크롬웰이 뒤를 이어 호국경(護國卿)이 되었으나 그는 원래 군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대의 불신을 받았고 종교계로부터도 불만을 사서, 이듬해 사직하였다.

그러자 의회가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군대를 그 통제하에 두려고 함으로써 군대가 반발하여 거꾸로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켜, 국가체제는 혼란에 빠졌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스코틀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장군 G.멍크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런던에 들어와 최후의 장기의회(長期議會)를 열게 하여, 임시 의회의 소집을 결의시켰다.

한편 그는 네덜란드에 망명중인 찰스 2세와 은밀히 연락하여, 혁명파에 대한 보복을 단독으로 행하지 않을 것, 혁명중에 왕당파의 토지를 입수한 자의 소유권을 확인할 것, 신앙의 자유, 병사들에 대한 급료지불 등을 약속한 ‘브레다선언’을 발표하게 하였다. 소집된 임시의회에는 왕당파와 장로파가 많았으므로, 이 선언을 승인하고 찰스를 국왕으로서 영입할 것을 결의하여, 이에 따라 그가 귀국하여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프랑스의 왕정복고

나폴레옹의 퇴위와 빈회의(1814)에 의하여 프랑스혁명 직전의 정통 왕조가 복귀하게 됨으로써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1755∼1824)이 루이 18세로서 즉위하였다. 이 부르봉 복고 왕조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1815) 동안 중단되었으나 다음의 샤를 10세(재위 1824∼30) 때까지 계속되었다.

백일천하 이후의 배상과 보장 점령에서 해방된 1818년 이후 과격 왕당을 형성한 귀족 반동세력이 강하여져서 빈체제의 국제적 반동에 동조한 에스파냐출병(1823)과 ‘망명 귀족의 10억 프랑’(1825)이라고 불려진 농지보상이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1825년 공황(恐慌)에 대하여 과격 왕당(過激王黨)은 아무런 정책도 펴지 못하였으며 의회에 자유주의자 및 좌익 세력이 늘어나고, 그리스 독립전쟁을 원조(1827)하거나, 알제리를 점령(1830)하여 임기회복을 꾀하였으나 노골적인 선거간섭(選擧干涉)을 계속하다가 7월혁명을 자초하여 자멸하였다.  

에스파냐의 왕정복고

1868년 9월 급진파 군인의 쿠데타로 여왕 이사벨 2세가 망명하였고, 이탈리아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아들 아메데오가 새 국왕으로서 1870년 12월에 추대되었으나 1873년 2월 퇴위하고 제1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공화국은 집권제와 연방제의 파쟁으로 심각하였고, 아나키스트적인 운동에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서 카를리스타의 봉기로 위협을 받아서, 군인 정치가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고, 1874년 12월 카를리스타 증대의 위기감을 배경으로 일어난 알폰소 12세(이사벨 2세의 아들)의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군인쿠데타로 붕괴하였다.

이 왕정복고는 크게 흔들리면서 1931년의 제2공화국까지 계속되었다. 1939년 이래의 프랑코 독재체제를 그 연장으로 생각한다면 1975년 11월 프랑코의 사망으로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가 새 국왕으로 즉위한 사실은 제2왕정복고라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