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금속공예

귀금속공예

[ 貴金屬工藝 ]

요약 금·은 및 이의 합금(合金)을 소재로 하는 공예.

장신구(裝身具)와 각종 기구나 장식품 등을 만드는 일도 포함된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에게해(海) 주변에는 선사시대에 이미 귀금속공예 제품이 있었다. BC 20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트로이 유적인 프리아모스의 유보(遺寶)에서 보석세공(寶石細工)이나 귀금속 제품이 그 시대의 귀금속공예의 발달 정도를 보여 준다. 정교한 관대(冠帶)·장신구·팔찌 등은 거의 장식이 없으며, 1장의 금판(金板)을 두드려서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크레타의 귀금속공예품은 크레타를 정복한 그리스 본토에 있는 미케네의 묘지에서 많이 발견된다.

BC 2000년경의 제품은 술잔·대접·상자 등은 금으로, 주전자 등은 은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장례용구(葬禮用具) 등은 주로 금으로 만들어졌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은기(銀器)는 황소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데, 뿔은 금으로, 코·귀·눈은 엷은 금판을 붙였고, 이마에는 금으로 만든 꽃을 달았다.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에서 많이 출토된 당시의 것 가운데는 금·은 및 금은의 합금인 일렉트럼 등 귀금속을 상감한 청동제 무기 종류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장식된 문양으로 보아서 그것이 이집트에서 기원(起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과도기에는 대외교류(對外交流)가 두절되어 귀금속공예의 질이 떨어져 출토품의 양도 적다. 페니키아에서 만들어진 은그릇이 있으나, 이것은 두드려서 성형(成形)한 것이며, 선각(線刻)의 장식이 있다. 이 무렵에는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성격을 보이는 회화적이며 정교하고 치밀한 디자인의 공예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에트루리아에서 출토된 BC 4세기경의 은제 화장품 용기가 있으며, 이것도 선각으로 장식하였다. BC 4세기경의 로마에서는 은기를 부조(浮彫)로 장식하는 양식이 부활하였다. 이것은 헬레니즘 시대, 특히 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 등의 도시에서 발달하여 정교하고도 치밀한 것이 만들어져서 로마의 제정(帝政)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장 호화로운 포스코레아레의 유보나 힐데스하임 출토의 귀금속공예품이 모두 로마 제국 초기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것은 높은 부조(浮彫)로 새긴 것이 많다. 그 주제는 역사·신화·의식(儀式)에 관한 것과 식물 등의 사실적(寫實的) 디자인, 동물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스케치 등이었다. 제품은 두드려서 성형하여 선각으로 장식하며, 여기에 도금(鍍金)하거나 검은 합금 니엘로(niello)로 상감하기도 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시대와 중세
그리스도교 시대의 초기의 것도 두드려 성형한 것과 조각 등의 전통적 기법을 쓰고, 자연주의적인 우아함이나 장식의 점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을 닮았다. 대부분이 종교적인 주제를 장식하여 그리스도교 시대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6~7세기 이후의 왕관이나 십자가 등은 금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여기서 석류석(garnet)·유리질의 장식 등은 상감이나 칠보(七寶)가 같이 쓰이고 있다. 8세기 후반의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작품들은 인물의 추상적 취급이나 동물을 주제로 하는 장식법, 검은 합금의 상감이나 깎아서 새기는(chip carving) 등의 기법을 썼다. 칠보나 누금세공(鏤金細工:filigree)으로 주변을 장식하였고, 보석을 끼워 넣거나[嵌入], 인물이나 이야기의 정경(情景)을 두들겨서 부조하였다. 이것은 11세기까지 성행한 카롤링거왕조의 귀금속공예의 기법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시대 초기에는 금을 파서 에나멜을 박아넣는 샹르베(champlevé) 기법이 발달하였다. 13세기에는 그 탁월한 누금세공에다 자연의 나뭇잎을 모방한 금조각(金彫刻)이나 새와 짐승을 조그맣게 주조(鑄造)한 것들을 첨가하여 더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13세기 말에는 금의 표면에 음각(陰刻)하고 거기에 투명한 칠보유(七寶釉)를 부어넣는 칠보기법(bassetaille)이 창안되었다. 

16세기
16세기 후반 귀금속공예는 경질(硬質)의 돌에 칠보나 보석으로 장식한 금을 장식한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고딕 시대의 형태를 계승한 귀금속공예는 유럽 전반에 걸쳐 널리 발전되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형장식(耳形裝飾:auricular) 형태가 나타났다. 나무의 뼈대 위에 은판을 달아 만든 은제가구(銀製家具)도 이 무렵에 만들어져 유행하였다.

18세기
18세기 귀금속공예는 다른 나라에서는 두드려 성형하는 방법을 쓰고 있을 때, 프랑스에서는 형(型)을 만들어 주조한 것을 장식하였으며, 디자인이 훌륭하고 주조와 조금(彫金)의 기술이 크게 발달해 있었다. 영국의 아담 양식의 은기는 공업적 방법의 도입으로 크게 성과를 올렸다. 

19세기
19세기에 나폴레옹 원정은 프랑스 패션을 다시 유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앙피르(Empire) 양식이 전유럽에 퍼졌다. 중엽까지 종래의 여러 양식이 거의 단기간에 부활해서, 그런 여러 양식을 받아들여 융합·구성한 빅토리아 양식이 생겼다. 후반에는 귀금속세공이라는 기능도 공업화되었다. 공업화에 맞서 W.모리스, 아르누보(art nouveau)의 양식과 관련을 갖는, 수공예(手工藝) 부활의 흐름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유도되었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20세기
20세기 귀금속공업은 공업의 발달 추세에서 물러나 소수의 공예작가들이 독립된 공방(工房)을 가지고 예술적으로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있으나, 대세는 현대 기계에 의한 단조(鍛造)·압형(壓型:press)·선반가공·금속피복(金屬被覆) 등의 기법인 진공증착(眞空蒸着)·기계연마 등을 사용하는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마야와 잉카의 귀금속공예
마야와 잉카의 경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이 일찍부터 금속공예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16세기 신대륙이 발견되었을 때 이미 그들은 냉단법(冷鍛法), 가열해서 무르게 만드는 법, 두들겨 튀어나오게 하는 세공, 조금(彫金) 외에도 엷은 금판을 형에 씌워서 두들겨 같은 모양을 만드는 법, 나무나 보석에 금을 씌워 장식하는 법, 납땜 같은 것에 숙달해 있었다. 또 금선(金線) 제조법, 납형법(蠟型法)으로 가운데가 비는 장식품 만드는 법, 누금세공이라는 장식법을 알고 있었다. 도금(鍍金)이나 금의 합금을 식물성 약산(弱酸)으로 부식시켜 금을 첨가하는 방법도 터득하여 훌륭한 장식품을 만들었다.

페르시아의 귀금속공예
BC 550~BC 330년의 아케메네스왕조의 귀금속공예는 이미 조금(彫金), 두드려서 성형하는 것, 주조·보석감입(寶石嵌入) 등의 기법이 발달하였다. 고대 이란의 귀금속공예는 사산왕조 때에 이르러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대에는 형태·장식·기술이 발달해서, 사냥이나 잔치의 풍경이 부조되어 있고, 보석세공에 칠보도 사용하였다.

중국의 귀금속공예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구리제품의 표면에 금은을 상감하거나 도금하였고, 금은으로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거울·항아리·수레·대구(帶鉤)의 표면에 금은판을 박아넣어 인물·괴수(怪獸)·추상무늬를 정교하게 나타낸 것이 만들어졌다. 또한 인형·잔·괴수형의 것을 금은으로 주조하였다. 한(漢)나라 때는 기술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서 디자인도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   그리스 방면에서 유행되던 누금세공의 장신구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나라에서 당(唐)나라에 걸쳐서 보관금구(寶冠金具)나 두발금구(頭髮金具) 등에 이와 같은 기술을 이용한 정교한 장신구가 만들어졌다. 당나라의 금은기(金銀器)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이 짙게 보이고 있다. 송나라 때는 여전히 당나라의 것을 계승하였으나, 명·청 때는 표면적·말초적 기교가 도입되어서 활력을 잃어버린 작품이 되었다.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구리제품의 표면에 금은을 상감하거나 도금하였고, 금은으로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거울·항아리·수레·대구(帶鉤)의 표면에 금은판을 박아넣어 인물·괴수(怪獸)·추상무늬를 정교하게 나타낸 것이 만들어졌다. 또한 인형·잔·괴수형의 것을 금은으로 주조하였다. 한(漢)나라 때는 기술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서 디자인도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

그리스 방면에서 유행되던 누금세공의 장신구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나라에서 당(唐)나라에 걸쳐서 보관금구(寶冠金具)나 두발금구(頭髮金具) 등에 이와 같은 기술을 이용한 정교한 장신구가 만들어졌다. 당나라의 금은기(金銀器)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이 짙게 보이고 있다. 송나라 때는 여전히 당나라의 것을 계승하였으나, 명·청 때는 표면적·말초적 기교가 도입되어서 활력을 잃어버린 작품이 되었다.

한국의 귀금속공예
한국의 경우에는 한나라의 발달한 귀금속공예품이 낙랑(樂浪)을 통해 커다란 영향과 자극을 주어 삼국시대에 정교한 귀금속공예가 만들어졌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이 당시의 귀금속공예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의 공예품은 보존된 것이 많지 않지만 낙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기량이 제일 우수하였을 것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나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태환식(太環式) 귀고리 등은 정교한 누금세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금관이나 과대(銙帶) 같은 것은 당시 귀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5~6세기경에 만들어진 보검(寶劍)의 칼자루와 칼집에 장식된 누금세공과 감입한 홍마노(紅瑪瑙)의 기법은 귀금속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런 기법이 통일신라시대에는 더욱 발달해 지금까지 전해오는 사리함(舍利函) 등에서 볼 수 있다.

불교가 전래된 후로 금은은 주로 불상(佛像)·사리구(舍利具) 등 종교적인 내용의 것에 많이 쓰이게 되었다. 고구려의 불상은 중국의 영향이 짙게 담겨져 있다. 당시의 불상 가운데는 반가사유미륵상(半迦思惟彌勒像)이 많은데, 이 가운데 우수한 것들이 삼국에서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귀금속공예 수준도 한결 높아졌다. 통일신라시대의 고분발굴의 예가 많지 않아 금관이나 과대 등의 출토품이 많지 않으나, 불교 유물인 사리함구에 우수한 금은제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고려에도 계승되어 금제소탑 등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정교한 음각·양각이나 감석세공의 아름다운 금은기(金銀器)가 나타났다. 금이나 은으로 실처럼 가는 선을 기물 표면에 상감한 금은입사(金銀入絲) 기법으로 장식하는 기법도 발달하였다. 금을 여러 문양으로 투각(透刻)하고 거기에 정교한 음각과 부조(浮彫)로 기품 있는 장신구를 만든 것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