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아시리아

[ Assyria ]

요약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국가로서, 그 명칭은 중심 도시였던 아수르(Assur) 시(市)에서 유래했다.
고대 서아시아 세계의 변천

고대 서아시아 세계의 변천

193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맥스 말로완 경이 니네베(Nineveh) 지역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BC 5000년 경에 인류가 거주했던 흔적을 발굴하면서 아시리아 제국시대가 밝혀졌다. 그 후 신석기시대 이후의 문화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당시의 신석기 문화의 중심지는 하수나, 하라프, 사마라였으며, 이 중 하수나(Hassuna)가 고대 아시리아 문화의 중심지로 밝혀졌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수메르, 아카드 세력이었다. 이 중 BC 3000년 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발전을 선도했던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심 도시 아수르가 건설되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수메르와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이 세력을 확장하고자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아시리아는 수메르어로는 수바르(Subar), 아카드어로는 수바르투(Subar-tu)라고 불렸으며, 셈족 계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메르, 아카드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언어, 풍습,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으며, 오랜 기간동안 양 강대국의 침입을 받으며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니게 되었다.

아시리아의 역사는 크게 BC 20 ~15 세기의 초기, BC 15 ~10세기의 중기, BC 911 년 ~ BC 612년의 신-아시리아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수메르가 멸망기에 접어든 BC 2000년대 초 무렵의 출토품에 쓰인 아시리아어가 아카드어 혹은 수메르어와 전혀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시리아가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아시리아의 중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바빌로니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 ·보석 ·목재 ·석재 등을 실어 나르는 원거리 무역에 종사했으며, 도시국가의 형태를 벗어나 군사(軍事)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BC 19세기에는 소아시아, 특히 카파도키아에 아시리아인의 상업식민지 카네쉬(Kanesh)와 하투사가 건설되었고 이 도시들이 중심도시 아수르와 느슨하게 결합되어 활발한 교역활동을 행했다는 것이 3대에 걸친 식민지 상인의 기록에 의해 밝혀졌다.

아시리아를 처음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북방의 강국을 건설한 사람은 BC 19세기말에 나타난 암무르인 출신의 샴시 아다드 1세(Shamshi-Adad I, BC 1813~1781 재위)이다. 그는 아수르 시를 정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아들 이슈메-다간(Ishme-Dagan)에게 에칼라툼(Ekallatum)시(市)를 통치하도록 하며 무역활동을 지속했다. 이어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마리(Mari) 왕국을 점령하여 아들 야스마 아다드(Yasmah-Adad)에게 통치하도록 했다. 샴시 아다드 1세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모두 정복했고, 아들 이슈메-다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아들들과의 분쟁으로 속국이었던 마리 왕국이 분열되어 나갔으며, 마리 왕국이 바빌론의 함무라비와 동맹하여 왕국을 정복했다. 이후 아시리아는 약 1세기간 바빌론의 속국으로 남아있다가, 바빌론에 침입한 후르리인(Hurrians)에게 정복되었다.

그 후 아시리아는 후르리인의 미탄니(Mitanni) 왕국의 속국으로 남아 왕조만을 존속시키고있다가, BC 14세기 중엽에 아슈르 우발리트 1세 (Ashur-uballit I, BC 1365~1330 재위)가 등장해 히타이트 왕과 손잡고 BC 1350년 이후 미탄니를 공격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회복하고 다시 부강한 왕국이 되었다. 아슈르 우발리트 1세는 이집트와 대등한 외교관계를 형성하고, 바빌로니아와 통혼하며 내정에도 개입했다. 그의 사후에도 6대에 걸친 158년간 아시리아는 전성기를 누렸다. 아다드 니라리 1세와, 그 아들 샬마네세르 1세 때에는 미탄니와 바빌론의 주요 영토를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BC 13세기에 투쿨티니누르타 1세(Tukulti-Ninurta I, BC 1244~1208 재위)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며 7년여간 직접통치하며 반란을 진압했다. BC 12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걸쳐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 1115~1077 재위)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만(灣)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아시리아는 다시 오랜 침체기에 들어갔고 아람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의 침입과 반란에 시달렸으며, 영토는 티그리스 강 유역의 좁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신 아시리아 제국 시대로 불리는 제 3기는 아슈르 단 2세(Ashur-dan II, BC 934~912 재위)하에서 아람인과 산악민족의 진압에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다드 니라리 2세(Adad-Nirari II, BC 911~891 재위)는 정복 사업을 재개했으며, 전술, 농업 등의 개혁에 성공했다. 그의 손자인 아슈르 나시르 팔 2세(Ashur-nasir-pal II, BC 883~859 재위)도 팔레스타인, 이집트 지역까지 정복활동을 벌였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BC 745–727 재위) 때에 이르면 아시리아의 세력은 정점에 달해 이집트의 제 25왕조를 위협할 정도였다.

아시리아의 광대한 영토는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官僚群), 완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특히 기병과 전차(戰車)를 갖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바빌론 등 고도의 문화적 발전을 이룬 점령지에 대한 억압적 통치와, 무거운 세금은 국민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처럼 강대하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69-627 재위)왕이 죽은 뒤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아시리아 본문 이미지 1
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

아시리아의 문화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이다. 또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築城)에 능하였고, 예술면에서는 석조(石造)의 환조(丸彫)와 부조(浮彫)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猛獸) 사냥 등 잔인한 행위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年代記)도 편찬하였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짓고 각종 사료(史料)를 수집·정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