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

[ Augustus ]

요약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내정의 충실을 기함으로써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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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BC63.9.23 ~ AD14.8.19
본명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국적 고대 로마
활동분야 정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이다. 서민 출신이나 그의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질녀로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았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그의 유언장에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음을 알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다. 카이사르의 유병(遺兵)을 장악하여 BC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제2회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시작하면서 반대파를 추방하였다.

BC 42년에는 필립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3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를 탈락시킨 후부터는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BC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후 패권을 잡았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빈약하였으나 아그리파를 비롯하여 여러 부장의 조력과 나아가 전 이탈리아, 그리고 전체 속주(屬州)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공화정 말기의 내란을 진정하였다. 질서회복 후에는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주었고, BC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았으며,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제정(帝政)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민 가운데의 프린켑스(제1인자)로서, BC 23년 프로콘술(속주의 장관)에 대한 명령권과 호민관의 직권(職權) 등의 공화정체의 권한을 수중에 넣고 프린키파투스, 즉 원수정(元首政)을 시작하였다(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로마 제정의 시초로 삼지만, 프린키파투스라고 불러야 될 것이다). 그는 속주를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로 구분하였고, 또 군단 수를 28로 정하여 내외의 수비를 견고히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숙적인 파르티아를 무찔렀지만, 9년에 토이토부르거전투에서 게르만 군대에게 패배하여 3개 군단을 잃고 나서 수세로 변하였다. 한편, 신분질서를 다시 수립하고, 풍기 숙정 등을 단행한 것 외에도 치안과 식량 문제에 마음을 써서 로마시(市)의 질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규모 건축사업도 일으켜,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변경시켰다고도 한다.

특히 내정의 충실을 기함으로써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후계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후 티베리우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