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

페니키아

[ Phoenicia ]

요약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 일반적으로 북쪽의 에리우세루스에서 남쪽의 카르멜산 까지를 가리키나 시대에 따라 그 범위는 달라진다. 베리토스(베이루트, Beirut), 시돈(Sidon), 티레(Tyre), 비블로스(Byblos)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했으며, 거주민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고대 서아시아 세계의 변천

고대 서아시아 세계의 변천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일반적으로 북쪽으로는 오늘날 카비르(Kabīr) 강으로 불리는 엘레우세루스(Eleutherus)강에서 남쪽으로는 카르멜(Carmal) 산까지를 가리키나 시대에 따라 그 범위는 달라진다. 하나의 정치 단위로 통일된 적은 없으나 시기마다 세력이 강력한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했다. 주요 도시로는 베리투스(Berytus, 오늘날의 베이루트), 티레(Tyre), 트리폴리(Tripoli), 시돈(Sidon), 아크레(Acre, 아코: Akko), 비블로스(Byblos), 우가리트(Ugarit, 오늘날의 라스샴라: Ras Shamra) 등이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에 종사했으며, 발굴 자료에 따르면 이집트 제 4왕조(B.C. 2613 ~ B.C. 2494 추정) 때부터 이집트와 비블로스(Byblos) 간의 상업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페니키아인의 기원은 셈어족(Semitics)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B.C. 3000년 경 서쪽으로 이주하여 동지중해안에 정착한 데서 주로 찾는데, 그들의 원래 고향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페르시아만 연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가나안(Canaanites)계(系)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계, 후리르계와 혼혈을 이루어졌다.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페니키아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포이니키스, 즉 '자(紫)색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페니키아인들이 값 비싼 보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B.C. 1200년 경 페니키아가 해상 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는 본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B.C. 1500년 경까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B.C. 14세기에 들어 히타이트아모리인(Amorites)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했다. B.C. 1250년경에 이미 페니키아는 동지중해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으며, 티레, 시돈, 트리폴리, 아라두스, 비블로스 등의 도시 국가들이 크게 발전했다.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어 알파벳이 발명·보급 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아시리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페니키아의 독립성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4세기 무렵 그리스가 성장하자 페니키아는 B.C 350년에 시돈이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의 한 속주가 되었다. 특히 티레는 B.C. 333년 ~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B.C. 64년 페니키아 전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리스의 통치 하에 있었다.

페니키아의 항해술

페니키아는 중개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교역을 통해 지중해 전역을 장악했는데, 그 바탕에는 우수한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이 있었다. 특히 페니키아의 행해술은 연안항법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천문 관측과 조수간만의 차·조류의 흐름 등에 대한 전문 지식을 토대로 하였다. 또한 조선기술에 있어서도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길고 폭이 좁은 선박과 상선용의 라운드 선박으로 선박의 종류를 이원화 시켰으며, 상선의 경우에는 화물적재능력을 최대화 하기 위해 노(櫓)가 거의 필요 없는, 돛에 의존하는 범선을 주로 사용했다.

페니키아의 주요 생산품과 교역품

페니키아는 삼나무·소나무 등의 목재, 티레·비블로스·베리투스에서 생산되던 고운 아마포, 고둥의 분비액에서 추출하는 보랏빛 염료와 염색 옷감, 시돈에서 생산되던 자수제품, 포도주, 금속, 유리 공예품, 채색 유기, 소금, 건어물 등을 주로 수출했다. 또한 지중해연안,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귀금속, 상아, 공예품 등을 사고 팔았으며, 식민지였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은을, 사이프러스에서는 구리를 생산해 거래했다.

페니키아의 문화: 미술, 공예, 알파벳

페니키아 문화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에게해, 시리아의 문명에서 온 소재와 관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페니키아 유적은 주로 평면 부조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비블로스에서 출토된 아히람(Ahiram, B.C. 11세기 말 비블로스의 왕)의 석회암 석관이다. 페니키아의 문화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페니키아 문자이다. 페니키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했으나 B.C. 15세기 경에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체계를 발명했으며,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그리스인들이 이 표기법을 채택하여 오늘날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