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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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체로 목판·동판·석판 등에 형상을 새긴 뒤 그 위에 잉크를 입혀 종이·천·양피지·플라스틱 등에 찍어낸다.
초기에 판화는 서적이나 회화작품의 보급을 위한 복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판화 작품은 복제품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예술의 영역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미술가들은 사용하는 도구·재료·인쇄법 등에 따라 매우 독특한 질감 및 효과를 보이는 판화의 특수성에 매료되었다. 특히 19세기에 사진의 보급으로 판화의 복제 기능이 거의 쇠퇴하자, 판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여 현대에 와서는 고유의 독립된 장르로서 미술가들 사이에 널리 쓰이고 있다. 순수 판화는 일률적인 작품이 여러 점 찍혀 나오더라도 그 하나하나를 원작으로 간주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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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류
    1. 볼록판화
    2. 오목판화
    3. 평판화
    4. 공판화
  2. 제작
    1. 목판화
    2. 에칭
    3. 드라이포인트
    4. 애쿼틴트
    5. 메조틴트
    6. 인그레이빙
    7. 석판화
    8. 모노타이프
    9. 실크스크린
  3. 역사
    1. 개요
    2. 목판화
    3. 에칭
    4. 드라이포인트
    5. 애쿼틴트
    6. 메조틴트
    7. 인그레이빙
    8. 석판화
    9. 모노타이프
  4. 현대 판화
  5. 한국의 판화
목판화
목판화

대체로 목판·동판·석판 등에 형상을 새긴 뒤 그 위에 잉크를 입혀 종이·천·양피지·플라스틱 등에 찍어낸다. 초기에 판화는 서적이나 회화작품의 보급을 위한 복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판화 작품은 복제품과 거의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순수한 판화 작품일지라도 여타의 미술 작품에 비해 소극적으로 평가되어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미술가들은 드로잉을 판화로 제작했을 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했다. 판화의 각 기법들은 사용하는 도구·재료·인쇄법 등에 따라 매우 독특한 질감 및 효과를 보이므로 화가들은 판화의 이러한 특수성에 매료되었다. 특히 19세기에 사진의 보급으로 판화의 복제 기능이 거의 쇠퇴하자 판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여 현대에 와서는 고유의 독립된 장르로서 미술가들 사이에 널리 쓰이고 있다. 순수 판화는 일률적인 작품이 여러 점 찍혀 나오더라도 그 하나하나를 원작으로 간주한다.

18세기에 이르러 판화가들은 자신의 판화에 서명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그후 제작자의 서명이 있는 판화는 일반적으로 원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서명이 관습화되어 판화가들은 각각의 판화에 서명과 더불어 전체 인쇄 수량과 고유번호를 병기하는데, 예를 들어 '4/50'는 같은 이미지의 총 50판 중에서 4번째로 찍은 작품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서명은 오른쪽 아래 끝, 인쇄번호는 왼쪽 아래 끝에 표기하며 가운데에 제목을 쓰기도 한다. 현대의 판화가들은 적절한 수량의 판화를 찍은 후 보통 원판을 파기하거나 특별히 표시해놓음으로써 자신이 정한 수량 이상의 판화가 인쇄되는 것을 막는다.

종류

볼록판화

인쇄할 형상 부분은 남겨 두고 바탕이 될 부분을 깎아낸 다음 볼록한 부분에 잉크를 입혀 종이 등에 인쇄한다. 판재로는 주로 나무나 리놀륨을 사용한다. 명암대조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인쇄할 때는 판 위에 종이를 놓고 문지르거나 롤러프레스기에 통과시킨다. 목판화, 메탈 컷, 리놀륨 컷 등이 여기에 속한다.

오목판화

판면에 형상을 직접 새기는 직각제판기법(드라이포인트·인그레이빙·메조틴트)과 항산성(港酸性) 물질인 그라운드를 바른 표면에 뾰족한 도구로 형상을 그린 뒤 산 용액에 담가 형상 부분을 부식시키는 식각제판기법(에칭·애쿼틴트)으로 나뉜다.

형상이 새겨진 오목한 부분에 잉크를 입히고 나머지 면에 묻은 잉크는 깨끗이 닦아낸다. 습기를 가한 종이를 판 위에 놓고 롤러프레스기에 통과시킨다.

평판화

볼록판화나 오목판화와 같이 판면에 요철을 만들어 형상을 인쇄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상에서 물과 기름이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이용해 찍는다. 석판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공판화

인쇄할 형상 부분에만 잉크가 통과하도록 나머지 부분은 천이나 종이로 막은 판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실크스크린(세리그라피)·스텐실이 있다. 다색인쇄 판화를 인쇄하는 데에 많이 사용된다.

제작

목판화

목판화의 제작 기법에는 2가지가 있다.

초기의 일반적인 방법은 양각법으로 판목에 형상 이외의 공백 부분을 조각칼로 파내어 윤곽선만 남기는 것인데 여기에 잉크를 입히고 종이를 덮어 문지르면 원화가 검은 선이 되어 찍힌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반대로 윤곽선만을 파내는 음각법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인쇄하면 검은색 바탕에 흰 선으로 된 형상이 나타난다. 목판재로는 주로 벚나무·배나무·보리수 등을 사용한다.

에칭

산의 부식작용을 이용하는 에칭 기법에는 동판이 주로 쓰이며 아연판·철판을 사용하기도 한다(구리). 우선 판면 전체에 그라운드를 발라 방식층(防蝕層)을 형성시킨다.

그라운드는 밀랍·송진·아스팔트를 혼합한 것으로 그 혼합비율은 대체로 3:2:4 정도이다. 그 다음 적당히 뾰족한 도구로 판 위에 형상을 그리는데 이때 형상 부분은 그라운드가 벗겨져 동판이 노출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부식액에 담그면 그라운드가 벗겨진 부분만이 부식된다. 부식액으로는 주로 질산 희석액을 쓰는데 산의 농도, 부식 시간에 따라 선의 표현이 좌우된다. 잉크를 부식된 오목한 부분에 고루 배어들도록 한 다음 나머지 부분에 묻은 잉크는 닦아낸다.

습기를 가한 수제(手制)종이를 덮어 롤러프레스기에 넣고 돌린다.

드라이포인트

에칭과 마찬가지로 동판화의 일종이나 부식 과정 없이 판면에 직접 철침으로 형상을 새긴다.

철침이 파고 지나간 홈의 가장자리에는 판동이 말려 올라가 '바'(burr)가 생긴다. 인쇄하면 이 부분에 잉크가 고여 선이 번지는 것 같은 독특한 효과를 낸다.

애쿼틴트

에칭처럼 산의 부식작용을 이용하는 동판화의 일종이다.

아스팔트 그라운드 대신 송진 가루를 동판에 뿌려 다공성(多空性) 그라운드를 형성시킨 다음 부식시킴으로써 명암의 그라데이션 효과를 나타낸다. 이때 송진의 밀집 정도와 부식액의 농도, 부식 시간 등에 따라 다양한 명도의 차이를 낼 수 있다. 에칭과는 달리 점 조직에 의한 면적 표현, 명암의 그라데이션, 수채화와 같은 효과를 특징으로 한다.

메조틴트

판면에 형상을 직접 새기는 동판화의 일종이다.

로커라는 톱니 모양의 조각칼로 판면에 종횡으로 무수한 홈이나 칼집을 낸다. 이것을 그대로 인쇄하면 전면이 벨벳과 같은 질감의 검은색으로 나타난다. 부분적으로 밝게 하고 싶은 부분은 스크레이퍼나 버니셔 등으로 판면을 평활하게 깎아낸다. 판면의 평활도에 따라 명암의 미묘한 정도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메조틴트의 주요특징이다.

인그레이빙

금속판에 뷔랭으로 직접 선을 새겨 나타내는 기법이다.

판재로는 동판이 주로 쓰이며 철판·아연판·은판을 쓰기도 한다. 드라이포인트에서와 같은 '바'가 생기지만 이 기법에서는 명쾌하고 정밀한 표현이 생명이기 때문에 스크레이퍼를 사용해 바를 깎아낸다.

석판화

물과 기름의 반발성을 이용하는 평판법에 의한 판화이다.

판재로는 석회암으로 만든 석판을 쓰지만 오늘날에는 알루미늄 판이나 아연판을 쓰기도 한다. 석판화는 다른 기법에 비해 제작과정이 복잡한데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먹(解墨)이나 석판화용 연필 등의 유성재료로 판면에 형상을 그린 다음 그 위에 송진 가루와 탈크 가루를 고루 바른다. 붓으로 아라비아 고무액을 엷게 칠한 후 말린다. 휘발성의 테레빈 유로 형상을 완전히 지우고 아라비아 고무액도 물로 씻어낸다.

아스팔텀을 엷게 입혀 형태를 살린다. 스폰지에 물을 적셔 판을 항상 축축하게 유지하면서 롤러로 잉크를 입힌다. 이때 기름성분이 없는 공백 부분은 물기 때문에 유성 잉크가 묻지 않는다. 잉크는 오프셋 잉크를 쓰며 인쇄용지는 표면이 매끄러운 것일수록 좋다. 제판이 끝나면 석판용 프레스기에 넣고 인쇄한다.

모노타이프

일반적인 판화와 달리 한 장만 인쇄하는 기법이다.

딱딱한 판면(유리·금속·목판)에 판화 잉크나 유화 물감으로 형상을 그린 다음 종이를 덮고 문지르거나 롤러프레스기에 넣고 인쇄한다. 모노타이프는 잉크의 종류와 롤러프레스기의 압력에 따라 다른 판화에는 없는 독특한 효과를 갖는다. 경우에 따라 여러 장을 찍을 수도 있지만 인쇄를 거듭할수록 효과가 감소한다.

실크스크린

공판화의 일종이다.

4각형의 틀에 비단이나 화학섬유를 팽팽하게 묶어 스크린을 마련한다. 형상 이외의 부분을 형지(形紙) 또는 아교로 막은 다음 그 위에 잉크를 놓고 스퀴즈로 밀어 인쇄한다. 그밖에 젤라틴 감광액을 스크린에 칠하고 감광시켜 현상하는 사진제판법도 있다. 이 기법은 단순명료하고 강렬한 시각효과로 인해 포스터 등 상업미술 분야에도 즐겨 사용되며 종이뿐만 아니라 직물에도 인쇄할 수 있다. 한편 미묘한 색조 변화는 나타내기 어려우며 소량의 인쇄에 적합하다.

역사

개요

유럽에서는 먼저 14세기말경에 목판화가 출현하고 이어 15세기 전반에 동판화가 탄생했다.

초기의 목판화는 성지순례 기념품으로서의 성서 제재나 성상(聖像)을 표징한 것, 부적, 게임 카드, 서적의 삽화 등에 사용되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목판술이 점차 발전했으며 특히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뒤러(1471~1528)는 목판화의 차원을 크게 부상시켰다. 크라나흐·알트도르퍼 등이 이를 계승했는데 16세기말경에는 쇠퇴했다.

오목판법에 의한 동판화는 금속세공 분야에서 우연히 발명되었는데 최초의 동판화는 1446년의 것이다.

동판화는 초기부터 공예미가 돋보였으며, 특히 상류계급의 취향에 맞게 제작되었다. 초기의 동판화는 뷔랭으로 동판 위에 직접 형상을 새기는 인그레이빙이었다. 15세기 이후에는 이탈리아·독일의 화가들도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동판화 분야에서 이것을 회화에 견줄 만큼 격조 높은 예술로 완성시킨 것은 뒤러였다.

16세기 전반은 뒤러를 중심으로 인그레이빙이 가장 융성했던 시대이다. 독일의 크라나흐·알트도르퍼, 네덜란드의 루카스 반 레이덴, 이탈리아의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동판화가이다. 라이몬디는 화가 라파엘로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판화를 제작했는데 화가와 판화가의 이러한 공동 제작 경향은 16세기 후반 마니에리스모 시기에는 보편화되었다.

에칭은 16세기 전반에 이미 뒤러·알트도르퍼 등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동판 부식에 적절한 산의 조합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이 문제도 해결되고, 특히 독창적인 실험을 거듭한 세헤르스와 그의 뒤를 이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는 에칭 기법상의 표현 가능성을 남김없이 활용하여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에칭은 인그레이빙에 비해 선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판이 대단히 빠르며 즉흥적인 제작도 가능한 이점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시도했고,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순수 판화 작품 제작에 주로 쓰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17세기의 렘브란트, 오스타데, 자크 칼로, 클로드 로랭, 18세기의 피라네시, 티에폴로 부자(父子), 카날레토, 고야를 들 수 있다. 17세기말에는 건식(乾式)동판화의 새로운 방법으로 메조틴트가 개발되어 18세기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18세기의 석판화 발명은 판화사상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야와 들라크루아는 이 방법으로 예술성 높은 작품을 낳은 최초의 화가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초크나 잉크로 그린 소묘와 거의 같은 효과를 재현시킬 수 있는 석판화 기법이 에칭과 더불어 화가들 사이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도미에는 4,000점의 풍자적 석판화를 남겼다. 마네·드가·르누아르 등의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하여 휘슬러, 르동도 우수한 석판화가였다.

19세기말에는 다색 석판화가 개발되어 보나르, 툴루즈 로트레크 등이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가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고갱과 뭉크에 의해 목판화가 부활되었고 특히 20세기초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은 판화의 특성을 살려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20세기에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판화를 시도했으며 다양한 기법 및 효과가 개발되었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리놀륨 컷,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일본인들에 의한 메조틴트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실크스크린의 유행은 판화기법상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목판화

가장 오래된 판화기법인 목판기술은 서양에서보다 동양에서 훨씬 빨리 시작되었다.

최초의 목판화는 중국 당대(唐代)에 제작된 〈금강반야경〉(868)의 삽화로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 사용된 종이는 2세기경에도 존재했다. 유럽에서는 초기에 종이 대신 직물에 목판을 인쇄했다. 1400년경에 제작된 〈헤로데 앞의 그리스도〉등은 단순하고 굵은 선을 특색으로 하는 단순한 작품인데 그후의 정교한 것보다 힘찬 효과를 나타낸다.

1460년대에 이르러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목판에 의한 삽화제작이 성행했고, 약 10년 후 이탈리아도 이에 가담해 15세기말에는 아름다운 삽화본이 탄생했다. 단색 목판화 예술이 그 정점에 달한 것은 뒤러 및 그의 후계자들이 활약한 16세기 전반의 독일에서였으며, 특히 민중에게 종교적·정치적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많이 쓰이게 되었다.

목판화는 16세기 후반 이후 새로이 등장한 인그레이빙에 밀려 한동안 부진했으나 영국의 토머스 뷰익이 등장해 새로운 목판 기법을 구사함으로써 목판화 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현대에 와서 목판화는 삽화나 복제를 위한 수단보다는 목판화 고유의 효과를 강조하여 그 자체를 작품으로 시도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고갱·뭉크·발로통 등이 있다. 한편 20세기의 독일 표현주의 화가 키르히너·놀데·헤켈 등도 목판화에 힘써 옛 뒤러 시대에 필적할 만한 예술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목판화는 현대에 와서도 다양한 가능성과 힘찬 표현의 예술로서 많은 예술가를 매료시키고 있다.

에칭

에칭의 발상지는 인그레이빙과 마찬가지로 북부 유럽이며 주로 독일·프랑스·영국, 특히 네덜란드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최초의 에칭은 15세기 중엽 무구류 장식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 최초의 에칭 작품은 호퍼에 의한 쿤츠 판 델 로젠의 초상으로 1504년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후 뒤러, 알트도르퍼, 네덜란드의 루카스 반 레이덴 등 많은 작가들이 에칭을 시도했다. 가장 우수한 에칭 작가는 네덜란드에서 배출되었는데 그중에도 걸출한 존재는 렘브란트이다.

그의 에칭작품은 총 140점에서 300점 사이라고 하며 그 주제는 성서·풍속·초상·정물·풍경 등 광범위하며 그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은 〈이 사람을 보라〉·〈3개의 십자가〉이다.

17, 18세기에는 에칭이 많이 제작되지 않았지만 티에폴로·카날레토 등 몇몇 대표적 인물들이 뛰어난 걸작을 남겼다. 19,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근대 회화의 선구자인 고야가 에칭 작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야가 남긴 〈변적〉·〈전쟁의 참화〉·〈투우〉·〈로스 카프리초스〉 등의 연작은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신랄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칭이 화가들의 부업이 되어 서적의 삽화용으로 많이 제작되었는데 메리옹·마티스·피카소·샤갈·스공자크 등이 대표적 화가이다.

드라이포인트

드라이포인트는 에칭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1480년경 독일에서 활약한 네덜란드계 화가 겸 동판화가들의 작품이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판화실에 소장되어 있다. 드라이포인트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뒤러이며 그의 〈버드나무 곁에 앉은 성 히에로니무스〉·〈성가족〉 등이 현재 대영박물관, 빈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덜란드에서 드라이포인트를 발전시킨 화가는 렘브란트였다. 그는 1640~50년 에칭에 드라이포인트를 병용했으나 말기에는 드라이 포인트만으로 제작한 작품이 늘어났다.

〈3개의 십자가〉·〈민중 앞의 그리스도〉 등이 그의 걸작이다. 19세기 후반에는 휘슬러, 로댕이 드라이포인트를 다루었고 이어 뭉크·보나르·피카소·샤갈·비용이 이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애쿼틴트

애쿼틴트의 기법은 프랑스의 J. B. 르 프랭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작품은 176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인그레이빙을 병용하여 애쿼틴트를 시도했고, 18세기말에는 기법적으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애쿼틴트가 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수채 데생의 복제 수단으로서 애쿼틴트가 크게 보급되었는데 이런 복제일 경우에는 흔히 판화 위에 붓으로 채색을 덧붙였다. 19세기 후반 애쿼틴트는 석판화에 밀려 쇠퇴했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부활했다.

메조틴트

메조틴트는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독일의 화가 지겐에 의해 시작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메조틴트의 중심지는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옮겨져 우수한 작가를 배출했다. 그것은 당시 영국에서 우수한 화가가 속출하여 그들의 작품이 메조틴트 작가에게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메조틴트는 그 독특한 매력과 개성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주로 복제용 기술로 쓰여왔기 때문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친 사진술의 급속한 진보에 따라 그 존재 의의는 급격히 쇠퇴했다.

인그레이빙

이 기법은 1410~30년경 북부 유럽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작가는 '트럼프의 화가'라고 불리는 독일 미술가이거나 'E·S의 화가'라는 서명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후자는 300점 이상의 인그레이빙 작품을 남겼다. 'E·S의 화가'의 영향을 받은 마르틴 숀가우어는 명확하고 힘찬 화면구성과 크로스해칭 기법을 통해 인그레이빙을 발전시켰다. 뒤러는 숑가우어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세련된 후기 고딕 양식을 계승하고 여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합리성과 뒤러 특유의 심오한 사색과 힘찬 상상력을 가미하여 〈기사, 죽음, 악마〉·〈멜랑콜리아 Ⅰ〉·〈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등 걸작을 남겼다.

그의 천재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분야는 바로 인그레이빙이었으며, 그는 이 분야에서 고금의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탈리아에서는 1450년경 피렌체의 금속공예가 공방에서 인그레이빙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만테냐는 이탈리아 최초의 위대한 인그레이빙 작가이다. 〈성모자〉·〈그리스도의 매장〉·〈해신(海神)들의 싸움〉 등에서는 힘차고 남성적인 양식을 엿볼 수 있다.

16세기초 북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인그레이빙 작가가 활약했는데 그중에서도 특이한 작품을 보인 베네치아의 줄리오 캄파뇰라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라파엘로가 유럽 미술 전체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라파엘로의 드로잉을 인그레이빙으로 제작하여 보급한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인그레이빙은 복제 수단으로 초상화 보급의 가장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18세기에는 초상화 대신 당대의 새로운 풍속을 담은 인그레이빙이 널리 보급되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사진의 급속한 발달에 밀려 다른 판화기법과 마찬가지로 복제 수단으로서의 실용적 의의를 거의 상실했으나, 이 기법의 예술적 특성을 추구하는 작가는 계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석판화

이 기법은 1796년 독일에서 제네펠더에 의해 발명되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전에 제네펠더 공방이 있던 뮌헨을 중심으로 석판화가 성행했지만 대부분이 복제용이었고 독창적인 작품은 별로 없었다. 석판화에 처음으로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한 예술가는 프랑스의 낭만파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이다. 그는 〈햄릿〉·〈파우스트〉의 삽화를 포함하여 약 100점의 석판화를 제작했다. 또 석판화 작가로서는 19세기 최고의 다작가로 꼽히는 도미에는 1830년 이후 일생에 걸쳐 4,000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신문·잡지에 게재된 정치적인 희화(戱畵)이며 탁월한 성격묘사와 신랄한 풍자성이 돋보인다.

19세기 중엽 석판화는 지나치게 상품화되었고 사진발명 등의 원인으로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그후 1870년대에 들어와 코로·드가·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새로이 부각되었다. 르동은 1883~89년에 전적으로 석판화에 전념하여 환상적·신비적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다색인쇄 석판화는 이미 마네가 1874년에 시도했는데 1890년대에 들어와 그 절정기를 맞았다. 특히 로트레크는 유화 외에 수많은 다색인쇄 석판화를 만들어 디자인에서나 기법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의 석판화는 화려한 파리 풍속을 주제로 한 것이 많으며 특히 이것을 포스터에 응용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마티스·샤갈·루오·레지에·피카소 등 거장들이 석판화를 다루면서 여러 가지 표현기법적 가능성을 실험하여 석판화사에서 하나의 황금시대를 구현해오고 있다. 특히 다색인쇄 석판화는 뛰어난 표현효과로 인해 20세기 회화에 필적할 만한 존재가 되었다.

모노타이프

가장 오래된 모노타이프 작품으로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이 약 20점 남아 있다.

그후 한동안 무관심 속에 잊혀졌다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점차 재인식되어 휘슬러·고갱·로트레크·르누아르·피사로·앙소르 등 개성적인 화가들이 이 기법을 시도했다. 그중에서도 드가는 모노타이프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다.

현대 판화

19세기 중엽부터 현대에 이르는 판화의 역사는 회화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다양하며 혁신적이었다. 특히 사진의 발명과 그 보급은 판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사진이 등장하기 이전 판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원래 1점밖에 없는 유명한 예술작품이나 기념비를 여러 개로 복제함으로써 유포시키는 일이었다.

즉 사진도 없었고 오늘날처럼 여행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실물을 보지 않고도 미켈란젤로나 루벤스 양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판화의 업적이었다. 사진의 발명은 복제수단으로서의 판화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판화는 복제라는 역할의 한계를 넘어 독창적인 예술양식으로 전환하여 이 국면을 타개했다. 휘슬러·고갱·로트레크·보나르·뭉크 등 세기말에 활약한 화가들의 목판화·석판화는 삽화적·설명적 성격이 강했던 종래 판화의 굴레를 대담하게 타파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칸딘스키·놀데·키르히너 등 독일 표현주의 화가는 특히 목판화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했고, 피카소·블랙·비용 등은 입체파적 표현을 판화에도 그대로 도입했다.

현대 판화는 포스터 및 서적 삽화로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로트레크의 포스터와 화상(畵商) 포랄이 피카소·루오·샤갈에게 의뢰하여 출판한 유명한 문학작품의 삽화가 그 좋은 예이다. 이 경우 문학작품의 텍스트는 미술가에게 있어 단순한 출발점에 불과하며 그 다음은 전적으로 미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겨지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은 반드시 텍스트에 정확하게 대응되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삽화용 판화의 황금시대였던 프랑스 18세기의 그것과 비교하면 더욱 확실하며, 여기서 볼 수 있는 텍스트와 삽화의 정확한 대응은 현대의 작품에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밖에 실크스크린이나 다색인쇄 에칭 등 많은 새로운 시도에 의해 미국과 유럽 각국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아틀리에 17'의 활동 등도 종래의 '복제적'인 측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새로운 창작작품으로서의 판화 추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판화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인쇄문화가 발달했고 신라 750년(경덕왕 9)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선진적인 인쇄기술은 불교의 발달과 함께 더욱 진보되었는데 고려초에 이미 목판인쇄경과 함께 소형의 다라니경판화가 제작되었다.

한국의 판화
한국의 판화

고려시대의 판화 유품으로는 1007년 총지사(摠持寺) 개판의 〈보협인다라니경〉, 권수의 변상판화, 11세기경의 〈어제비장전판화 御製秘藏詮版畵〉 등 다수가 전해진다. 이 시대에 간행된 예수시왕경판화·화엄경판화 등은 고려의 대장경 제작에 따른 뛰어난 기술축적에서 이룩된 것으로 고려 불화 및 일반 회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사회인 조선시대로 오면서 판화제작이 더욱 다양해졌지만 역시 불교판화는 17세기에 성행하다가 18세기에 갑자기 위축되었다. 해인사 소장의 〈석가고행도 釋迦苦行圖〉(1501)·〈아미타삼존도〉는 일반 불화의 형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그밖에도 석씨원류 화엄경판화, 금강경판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판화 등이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내용의 판화가 광범위하게 제작되었는데 〈입학도설 入學圖說〉(1425)·〈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이륜행실도 二倫行實圖〉(1730)·〈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1797) 등에 나와 있는 판화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밖에 풍속·무예·천문·지리 등을 나타내는 판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 판화는 주로 종교나 국가 이념의 교화수단으로 쓰였다.

한국에서 판화가 독자적인 장르로서 인정되고 전문적으로 제작된 것은 20세기초 이후이다. 그 이전에도 몇몇 화가들에 의해 판화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20세기 중반에 들어 한국판화협회(1958)·한국현대판화가협회(1968) 등 판화단체가 결성되어 전문적인 판화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서울 국제판화 비엔날레(1970), 공간 국제판화 비엔날레(1980)가 조직되어 한국 현대 판화의 위상을 높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각 대학이나 대학원에 판화과가 신설되어 판화전문인의 양성이 가능해졌으며 이와 때를 맞추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판화공방운동에 힘입어 판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