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판 레인

렘브란트 판 레인

다른 표기 언어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요약 테이블
출생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덴
사망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요약 ‘빛의 화가’로 불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주요 작품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베드로>와 <루크레티아>. 유화와 소묘, 에칭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미술사의 거장으로 수많은 초상화와 자화상은 인간의 성격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며, 소묘는 당시 암스테르담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뛰어난 판화 기법을 터득한 그의 에칭화는 생전에도 고가에 팔릴 정도였고, 후대 판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목차

접기
  1. 렘브란트의 레이덴 시절
  2.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시절
  3. 렘브란트의 실험과 탐구
  4. 렘브란트의 말년
  5.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유화·소묘·에칭 등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17세기의 화가이며 미술사에서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의 그림은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능숙한 명암배분이 특징이다. 그의 수많은 초상화와 자화상은 인간의 성격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며, 그의 소묘는 당시 암스테르담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보편적인 호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그당시 그의 동시대인들은 풍경화나 정물화, 또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더 많이 그렸다. 렘브란트도 인기있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에는 자기 제자를 비롯한 젊은 경쟁자들에게 밀려나 빛을 잃었다. 그가 통달한 또 하나의 주요분야는 식각판화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의 판화들은 비싼 값에 팔렸고, 그의 뛰어난 판화 기법은 몇 세기 동안 판화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특히 젊은시절의 작품을 대표하는 전형적 특징은 유럽의 중요한 화가들(특히 가까운 벨기에 안트웨르펜 출신의 P.P. 루벤스)과 경쟁하려는 개인적 야망이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유행과 렘브란트 자신의 기질은 그의 야망을 좌절시켰고, 그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고독하고 괴팍해져 외톨이가 되었으며 그결과 자기 나름의 독자성을 얻게 되었다. 조용하지만 깊은 감정 상태에 빠진 영원한 인간세계를 독특하고 생생하게 재현한 것은 그의 이 독자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용한 인간의 모습은 렘브란트 예술의 중심 주제이며 보는 사람과 그림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한 렘브란트의 인기와 위대함은 바로 그 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Sacrifice of Isaac)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Sacrifice of Isaac)

렘브란트의 레이덴 시절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에 대학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르멘 게리츠존 반 레인은 비교적 부유한 제분업자였고, 어머니 넬티에 반 조이트브루크의 집안은 제빵업자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레이덴 전체가 신교를 채택했을 당시에도 렘브란트의 외가는 여전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렘브란트 가족 가운데 가톨릭을 떠나 칼뱅교도가 된 사람은 그의 아버지뿐이었다. 렘브란트 생전인 1641년 얀 오를레르스가 쓴 레이덴 연대기에 따르면, 젊은 렘브란트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고 네덜란드에 처음 세워진(1575) 대학이자 학문의 중심지인 레이덴대학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1619~22년 레이덴의 화가인 야코프 이삭스존 반 스바넨부르크의 도제가 되었다. 오늘날 반 스바넨부르크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은 거의 없으며, 그의 예술은 렘브란트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

렘브란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스승은 페테르 라스트만(1583~1633)이었다.

암스테르담 출신인 라스트만은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지낸 뒤(1603~06/07) 고향으로 돌아와 성경과 신화 및 역사에 나오는 장면을 그리는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렘브란트가 라스트만에게 배운 것은 1623년을 전후한 반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를테면 폭이 넓은 화폭에 고상한 주제를 그릴 때에는 인물들의 옛날 의상과 극적인 몸짓, 그리고 구도적 배치에서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라스트만에게서 배웠다.

〈돌에 맞아 죽는 성 스테파누스 Stoning of Saint Stephen〉(1625)·〈아가멤논 앞에 선 팔라메데스 Palamedes Before Agamemnon〉(1626)·〈내시의 세례 Baptism of the Eunuch〉(1626)를 비롯한 렘브란트의 초기 그림들은 라스트만의 주제와 형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예컨대 내시의 세례는 라스트만이 몇 년 전(1623, 카를스루에) 가로로 긴 화폭에 이미 그린 주제였다. 렘브란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장면을 세로로 긴 화폭에 그렸지만, 인물과 의상 및 부속물은 라스트만의 그림과 거의 같다.

돌에 맞아 죽는 성 스테파누스(Stoning of Saint Stephen)
돌에 맞아 죽는 성 스테파누스(Stoning of Saint Stephen)

다만 그것을 좀더 꽉 짜인 집합체로 압축하고 보다 극적인 조명을 비추었을 뿐이다. 라스트만이 1622년에 그린 패널화와 렘브란트가 1626년에 그린 패널화도 〈발람의 나귀와 천사 Balaam's Ass and the Angel〉라는 똑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형식도 비슷하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은 세로로 길고 좀더 촘촘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성 스테파누스〉와 〈팔라메데스〉는 페트루스 스크리베리우스라는 레이덴의 인문주의자가 젊은 렘브란트에게 주문한 그림이라고 한다. 렘브란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주문자가 분명한 그림은 이 2점뿐이다.

렘브란트의 초기 그림은 그가 벌써 유럽의 일류 화가들과 경쟁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가장 학구적이고 도덕적으로 진지한 주제를 주로 다루었고 배경과 의상도 역사적으로 그럴 듯하게 그리려고 애썼다. 이는 독일 이주자인 아담 엘스하이머를 비롯한 로마 화가들과 라스트만의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특징이었다. 이 초기 그림은 또한 렘브란트가 극적이고 인간적인 반응이나 명암효과에 주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요소들은 그후 10년 동안 그의 예술을 지배하게 되었다. 특히 렘브란트는 위트레흐트 출신 화가들의 작품과 접촉한 뒤 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그들의 뚜렷한 명암 배분을 갑자기 흉내내기 시작했다.

헤리트 반 혼토르스트가 이끄는 이 위트레흐트 화가들은 로마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들의 미술은 고향에서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북유럽 각국의 궁정에서도 크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성전에 나타난 예수 The Presentation in the Temple〉(1627~28경)나 〈엠마오스의 그리스도 Christ at Emmaus〉(1628) 같은 종교화를 그릴 때, 엘스하이머와 카라바조 및 반혼토르스트의 극적인 조명과 몸짓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그림으로 국제 예술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이무렵에 렘브란트가 그린 〈화실의 젊은 화가 Young Painter in the Studio〉(1629경)는 규모는 작지만 극적인 자화상으로, 뒷벽을 배경으로 한 화가의 모습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 앞쪽의 이젤 위에 놓여 있는 대형 화판 때문에 화가의 모습이 더욱 왜소해보이는 이 전신초상화를 보면, 당시 렘브란트가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뒷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화판은 그늘 속에 놓여 있고, 가까운 가장자리만 밝은 빛을 받고 있다. 이 그림은 창작행위 자체가 일종의 영웅적 대결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위트레흐트파).

렘브란트가 1620년대말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은 1629~30년경에 오라니에 공의 비서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가 쓴 자서전의 유명한 언급을 보면 알 수 있다. 호이헨스는 레이덴에 살고 있는 렘브란트의 젊은 친구이자 동료인 얀 리벤스(1607~74)만이 아니라 렘브란트도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로 특별히 칭찬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주제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작은 판형 속에서 거두는 뛰어난 효과로 칭찬을 받았다. 특히 1629년에 그린 〈은화 30냥을 돌려주는 유다 Judas Returning the Thirty Pieces of Silver〉라는 패널화는 감동적인 몸짓과 감정의 본보기로서, 이탈리아나 고전시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못지 않다는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호이헨스는 렘브란트와 리벤스가 이탈리아에 가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좀더 공부하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했다.

리벤스는 최근에야 렘브란트에 맞먹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두 예술가의 경력은 오랫동안 서로 앞뒤를 다투며 발전했다. 리벤스도 렘브란트와 마찬가지로 레이덴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와서 2년 동안(1618~19) 라스트만의 도제로 일했다. 리벤스는 렘브란트에게 상당히 중요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렘브란트가 위트레흐트 화가들의 작품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리벤스를 통해서였을 것이고, 이 그림들은 렘브란트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620년대말의 리벤스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과 너무나 비슷하여 일부 패널화의 경우 진짜 작가가 누구인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리벤스의 〈사로잡힌 삼손 Capture of Samson〉(1627~28경, 암스테르담)은 렘브란트의 〈사로잡힌 삼손〉(1628)에 자극을 준 것 같고, 이 두 작품은 루벤스가 그린 똑같은 주제의 그림(1610, 런던)과 우열을 다투고 있다.

당시 루벤스의 이 그림은 판화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에 배포되어 있었다. 렘브란트와 리벤스는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림을 통한 대화를 계속했다. 먼저 렘브란트가 1630년경에 이 주제를 다룬 패널화를 그리자, 리벤스가 1631년에 유화(브라이턴)와 에칭으로 그뒤를 따랐고, 렘브란트가 1632년경에 능숙하고 극적인 대형 에칭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렘브란트는 리벤스의 작품과 비슷한 자신의 작품 일부에 대해 리벤스 작품보다 먼저 제작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실제 제작연대보다 날짜를 앞당겨 적기까지 했던 것 같다.

렘브란트의 수많은 그림에 나오는 똑같은 모델은 19세기에 와서 렘브란트의 아버지나 어머니로 알려졌는데, 이 그림들은 사실상 재료나 조명, 그리고 얼굴표정이나 이목구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스케치이다. 그의 초기 자화상도 대부분 '트로니' 형식의 변형이었던 것 같다.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다른 모델의 얼굴 대신 자기 얼굴을 이용했고, 몸소 군복이나 당시 유행하던 의상(깃털 달린 모자, 금줄, 갑옷의 목가리개)을 입고 모델 노릇을 했다. 좀더 나이든 모델들의 스케치 가운데 일부는 렘브란트가 레이덴 시대 말기(1630~31)에 그린 수많은 예언자와 사도들(1630년 그린 〈예레미야 Jeremiah〉 포함)의 얼굴에 사실상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인 1660년대까지 더이상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헤이그 궁정에서 영향력있는 호이헨스의 주목을 받아 네덜란드를 지배하는 오라니에 왕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는 특히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대공을 위해 1632~33년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십자가 세우기 Raising of the Cross〉(뮌헨)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scent from the Cross〉(뮌헨) 및 아말리아 반 솔롬스 대공비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반 혼토르스트가 그린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초상화와 짝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장면은 호이헨스가 대공에게 바치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루벤스가 그린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렘브란트는 이번에도 주로 판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루벤스의 작품을 접했는데, 당시 루벤스는 유럽의 일류 화가였고 미술의 대가일 뿐 아니라 세련된 외교관으로서 궁정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렘브란트가 후원자인 군주에게 바칠 그림을 그리면서 굳이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를 흉내내어 그보다 더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쓴 것은 예술가로서 누구한테도 뒤질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1633년에는 루벤스를 본떠 자신의 그림을 에칭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십자가 세우기〉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장면에 참여한 인물들에게 자신의 얼굴모습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특히 〈십자가 세우기〉에서는 자신과 그림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자기 얼굴을 본뜬 인물에게 당시의 옷을 입히고, 그 얼굴에 조명을 집중시키기까지 했다. 이것은 아마 사색을 즐기는 자신의 정신적 경향을 표현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리스도 수난 연작에 관하여 호이헨스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한 편지에는 렘브란트가 자신의 예술적 목표에 관해 자부심을 나타낸 구절도 있다.

그는 종교적 주제를 다룰 때 '가장 고결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루벤스와 비슷하다. 루벤스 역시 활력과 극적 효과 및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작품은 루벤스와 비교하면 장렬함과 아름다움은 덜하지만, 그대신 극적인 야간조명과 초라한 인물들, 그가 창조한 종교적 배우들의 친밀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반응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호이헨스가 렘브란트의 초기 그림을 칭찬할 때 지적한 요소들이었고, 1630년대에 그린 종교화의 특징이었다.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시절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렘브란트는 1631년말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미 헨드리크 오일렌부르그라는 암스테르담의 미술상과 거래를 텄고, 반 혼토른스트의 우세한 지위에 눌려 헤이그 궁정에서 출세할 전망은 어두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수도이며 사실상의 도시국가인 암스테르담의 번영은 그를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주로 오일렌부르그의 소개를 통해 렘브란트는 당장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인기있고 비싼 초상화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렘브란트는 자기를 받아들인 이 도시의 섭정들, 즉 정치권력과 영향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인귀족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초기에 거둔 성공을 말해주는 증거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1632)를 주문받은 것이었다. 당시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동업조합은 명성이 드높은 의사 한 사람을 초빙하여 조합원들 앞에서 인체를 해부해보이는 행사를 연례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이 그림은 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주문 제작된 것이었다. 렘브란트가 그린 이 대형 단체초상화는 제작된 이후 줄곧 사람얼굴을 순서에 따라 한 줄로 배열하는 규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렘브란트는 피라미드 구도와 강의 자체의 실제과정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극적인 조명을 통해 주제를 살렸다. 동시에 그는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그의 상징이 된 암시적 심리상태를 그들에게 부여했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온 직후에 그린 개인·부부 초상화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을 거의 발견할 수 있다. 렘브란트는 레이덴에 있을 때에는 초상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지만, 암스테르담에 온 뒤 4년 동안 약 50건의 초상화 주문을 받았고, 그 대부분은 사례금이 아주 많았다.

니콜라스 툴프는 외과의사일 뿐 아니라 암스테르담 시의회 의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섭정 그룹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렘브라트가 잠시 함께 살았고 동업자 관계를 맺은 미술상 오일렌부르그도 섭정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렘브란트의 초상화 모델들(예를 들면 1632년의 마르텐 로텐)은 대부분 종교적 보수주의자인 메노파교도였던 것 같다. 그는 오일렌부르그를 통해 메노파교도들과 교분을 맺게 되었는데, 이들은 암스테르담 섭정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또한 암스테르담에 온 뒤 처음 10년 동안 많은 네덜란드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 즉 레몬스트란트파의 요한네스 오이텐보가르트(1633), 칼뱅파의 요한네스 엘리손(1634), 메노파의 코르넬리스 안슬로(1641) 등을 그렸다.

신화를 주제로 한 그의 그림으로는 〈안드로메다 Andromeda〉(1630경)·〈플루톤과 프로세르피나 Pluto and Proserpina〉(1632경)·〈오이로파의 약탈 Rape of the Europa〉(1632경)·〈가니메데스의 약탈 Rape of the Ganymede〉(1635) 등이 있다.

그의 신화 그림들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있다. 신화를 다룬 렘브란트의 그림이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면, 성서를 주제로 다룬 그림은 광범위한 주제와 연출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별난 주제들, 특히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와〈다니엘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동양 의상과 극적인 몸짓 및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가득 차 있는 대작 〈벨사자르의 잔치 Belshazzar's Feast〉(1635경)도 이런 종류의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 그림에 적혀 있는 정확한 히브리어는 렘브란트가 또다른 종교지도자이며 세계교회론을 주장하고 지복천년을 믿는 므나쎄 벤 이스라엘을 통해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렘브란트는 1636년에 메나세의 초상화를 에칭으로 제작했다.

렘브란트의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 Sacrifice of Isaac〉(1635,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그와 똑같은 생생함과 활력이 담겨 있다. 이 그림에서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손이 천사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멈추고, 그 손에 들린 칼은 허공에 떠 있는 채 이 장면에 사진 같은 박진감을 부여하고 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존되어 있는 이 그림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사실은 독일 뮌헨에도 이 그림을 약간 수정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뮌헨의 그림에는 "렘브란트, 고치고 덧칠하다"라는 애매한 서명이 들어 있다. 이것은 렘브란트 자신도 1630년대 오일렌부르그의 작업실에서 재고 작품을 모사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1630년대에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야심만만한 에칭을 개발했다. 이런 경향의 첫 출발은 프레데리크 핸드리크를 위해 그린 그림을 에칭으로 다시 제작한 1633년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서 이미 엿볼 수 있고, 1630년대 중엽에 렘브란트와 오일렌부르그는 수요가 많은 대형 에칭 연작을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에칭 작품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Christ Before Pilate〉(1636)를 제작하기 전에 미리 회색과 갈색의 유화 스케치(1634)로 조심스럽게 판화의 원형을 만들었다. 화포에 그린 또다른 유화 스케치 〈설교하는 세례 요한 John the Baptist Preaching〉(1634경)은 끝내 판화로 완성되지 않았다. 폐허를 배경으로 선명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인물들은 1633년에 세상을 떠난 라스트만의 공식을 연상시킨다.

풍부하고 짙은 색조에 숙달된 솜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야심만만한 에칭은 1634년에 제작한 〈목동들에게 이른 예수 탄생 소식 Annunciation to the Shepherds〉이다. 이 판화에서도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고유한 요소를 덧붙여 양치기를 소치는 목동으로 바꾸었다. 이 목동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천사의 모습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가 에칭에서 시도한 실험의 특징은 이 판화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바로 빛과 어둠을 일부러 뒤바꾸는 것이다. 이 판화에서 그는 진한 윤곽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한 색조를 이용하거나 연마기로 윤곽선을 지움으로써 형태와 광휘점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는 듯한 효과를 내는 이 기법은 렘브란트가 후기에 제작한 가장 감동적인 종교적 판화의 특징이 되었다.

렘브란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들 가운데 일부(클레베 출신의 고베르트 플링크, 하를링겐 출신의 야콥 바커, 도르드레흐트 출신의 페르디난드 볼)는 1630년대말에 작성된 암스테르담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플링크(1615~60)는 수집가들을 위해 렘브란트의 몇몇 그림을 복제했거나 작업실에서 렘브란트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화와 초상화 및 '트로니'에 대한 렘브란트의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그후 오랫동안 그의 제자들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1634년 6월 22일에 결혼했다.

신부는 헨드리크 오일렌부르그의 조카이며 레바르덴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 오일렌부르그(1612 출생)였다. 사스키아는 상당한 지참금만이 아니라 높은 사회적 지위도 가져왔기 때문에 이 결혼으로 렘브란트의 사회적 지위도 상당히 높아졌다. 결혼 당시 렘브란트와 헤이그 궁정의 관계는 가장 우호적이어서 이 결혼은 사회적으로 대등한 남녀가 배필을 이룬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부부가 처음 만났을 때 사스키아의 보호자였던 사촌오빠는 개신교 목사인 요한네스 코르넬리스 실비우스였다.

실비우스가 죽은 뒤 렘브란트는 1646년에 그의 초상화를 에칭으로 제작했는데, 환상적인 타원형 창틀에서 힘차게 나타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초상화는 렘브란트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1630년대에 가장 많은 초상의 주인공이 된 사람은 사스키아였다. 렘브란트는 아내에게 신화적인 매무새, 특히 수많은 꽃으로 꾸민 꽃의 여신 플로라의 의상을 입혀 모델로 삼았고(1634), 몸가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정식 예복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자연스럽고 가정적인 그림의 주인공으로도 자주 등장시켜 아내가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의 인생에 일어난 몇 가지 불행을 알고 나면, 이 침대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스키아는 세 아이를 잃은 뒤 1641년에 아들 티투스를 낳았고 그로부터 1년 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혼과 더불어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1630년대의 자화상은 자신감과 행복으로 환히 빛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1640년에 그린 피라미드 구도의 당당한 자화상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자화상은 티치아노가 그린 초상화(모델은 시인 아리오스토라고 알려져 있음)에서 난간에 기댄 차분한 몸짓을 차용했을 뿐 아니라 라파엘로가 그린 궁정 신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에서는 그 화려한 옷차림과 황금빛 색깔의 조화를 빌려왔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렘브란트의 자화상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의 독특한 2인 초상화(1635경~36)는 자신의 인생을 냉정하고 사려깊게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그림도 에칭으로 제작되었지만, 1636년에 에칭으로 제작된 2인 초상화에서 렘브란트는 관객을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드레스덴에 있는 그림에서 사스키아는 멋지게 차려입은 렘브란트의 무릎 위에 앉아 있고, 렘브란트는 맥주병을 유쾌하게 들어올린 채 고개를 돌려 그림 바깥쪽을 바라보면서 바보처럼 히죽 웃고 있다. 이 선술집 배경은 상류계층의 숙녀들을 고급 창녀(렘브란트가 이미 사스키아와 결부시킨 꽃의 여신 플로라의 또다른 화신)로 표현하는 당시의 '아르카디아' 유행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선술집 매춘부들과 함께 있는 탕아를 주제로 한 그림의 전통에 의존하고 있다.

이 남녀의 사치스러운 옷차림은 카셀에 있는 사스키아의 반면상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흉내내고 있지만, 탕아의 비유를 통해 방탕한 생활과 그로 인해 있을 장래의 후회를 암시함으로써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렘브란트는 드레스덴에 있는 2인 초상화의 과시적 소비를 강조하듯 1639년에 요덴브레스트라트에 있는 커다란 저택을 한 채 사들였다. 이 집은 지금도 렘브란트의 집이라고 불리며, 오늘날에는 그의 기념관으로서 많은 에칭이 보존되어 있다. 같은 해 귀족이자 민방위대장인 프란스 반닝 코크는 나중에 렘브란트의 대표작으로 가장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야경'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그룹 초상화)를 주문했다.

〈야경 Night Watch〉의 암스테르담에 알맞는 정식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방위대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이다.

1640~42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민병대 머스킷 총 부대(쇠뇌 사수대와 궁수대와 함께)의 새로운 본부를 장식하기 위해 그린 6점의 민방위대 단체초상화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단체초상화 가운데 2점은 렘브란트의 제자인 플링크가 그렸고, 3번째 초상화는 플링크의 경쟁자인 바커가 맡아서 그렸다. 〈야경〉의 모델들은 반닝 코크와 그의 부하 빌렘 반 로이텐부르그(그림 전면에서 조명을 받으며 행진을 이끌고 있는 두 사람)가 이끄는 대원들로 대부분 암스테르담의 포목상 구역에 모여 사는 부자들이었다.

10년 전에 그린 단체초상화 〈해부학 강의〉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의 민방위대 단체초상화는 장면 전체를 하나의 역동적인 행위로 수렴하여 생기와 활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네덜란드 그림과는 다르다. 개선문 앞으로 나오고 있는 민방위대는 특별한 임무를 띠고 출발하는 것처럼 보여 16세기말에 일어난 네덜란드 혁명의 영광된 날들을 상기시킨다.

민방위대의 활동은 과거에 성문을 지켰던 무장수비대와 이제 스스로 자기 도시의 독립과 특권을 지키는 암스테르담 시민을 비교하게 된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그의 그림들 가운데 가장 큰 이 그림(원래 크기는 약 4.5m×5m였고, 왼쪽 가장자리가 꽤 많이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큼)에서 역사와 초상화, 활동과 묘사를 결합시켰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렘브란트의 실험과 탐구

1642년에는 사스키아가 죽었고 〈야경〉이 완성되었다.

이 상충된 경험은 렘브란트의 생애와 활동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와 궁정의 관계는 1630년대말에는 완전히 파탄 났고, 그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이후 처음 10년 동안과는 달리 1640년대에는 그의 초상화 모델은 물론 그의 고객들도 1646년에 헤이그 궁정에 바친 종교화 2점을 제외하면 결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저명인사들이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야경〉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대담한 창조력 때문에 후원자를 잃었다고 한다. 별로 신빙성 없는 이야기지만 아무튼 일반인들은 특히 초상화에서 좀더 세련되고 정교한 솜씨를 선호하는 편이었고, 이러한 취향은 렘브란트가 추구하던 취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렘브란트는 초기 초상화와 레이덴 후기시절의 역사화에서는 정확하고 꼼꼼한 세부묘사를 즐겼지만, 이제는 좀더 대담한 붓놀림과 어두운 배경에 떠오른 좀더 뚜렷한 그림자를 실험하고 있었다. 한편 볼, 플링크, 바커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가장 수준높은 후원자들 사이에서도 스승보다 더 인기를 얻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640년대 렘브란트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좀더 은밀하고 겸손한 야심을 나타냈다.

수십 년 동안 그가 그린 풍경화들을 비교해보면 이런 발전의 1가지 기준이 드러난다. 1630년대에 렘브란트가 그린 풍경화는 유화 형식을 취했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사나운 하늘과 말라 죽은 나무들을 자주 보여준다. 이것은 루벤스와 헤르쿨레스 세헤르스가 네덜란드 예술에 남긴 유산이었다. 그러나 1640년대에 렘브란트는 좀더 네덜란드다운 정취를 그리는 쪽으로 돌아섰고, 그런 장면을 유화보다는 소묘와 에칭으로 더 많이 표현하게 되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암스테르담 풍경의 윤곽을 섬세하게 묘사한 에칭 〈돌다리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a Stone Bridge〉(1641경)·〈풍차 Windmill〉(1641) 및 〈오두막 Cottages〉(1641/42)이 그 보기이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에칭도 1640년대말과 1650년대초에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점점 더 중요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작품은 그 비싼 값 때문에 '100길드 판화'라고 불리는데, 1643~49년경에 오랜 시일에 걸쳐 제작된 이 판화는 렘브란트의 풍부한 에칭 기법과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이 판화의 주제는 1640년대의 유화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이며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는 등 그리스도의 공생애 내용이다. 이 그림은 〈야경〉이나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1630년대의 성서 그림(예를 들면 1634년의 〈의심하는 도마 Doubting Thomas〉)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벽을 가로질러 뻗어 있다. 크기가 30×40㎝에 이르는 이 대작 판화에서 렘브란트는 각 부분마다 서로 다른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해 다양한 명암, 묘사적인 세부나 스케치, 서술적인 초점을 창조하고 있다.

전체구도의 중심에는 키가 큰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이 그림의 구도는 어두운 벽 앞에 섬세하게 묘사해놓은 후광 속으로 거의 녹아들고 있다. 렘브란트는 한 모델(아마 이웃에 사는 젊은 유대인 남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수없이 스케치했다.

렘브란트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가장 감동적인 견해 가운데 일부는 1650년대초에 제작한 여러 점의 에칭에서 전개되었다. 흔히 〈작은 무덤 La Petite Tombe〉이라고 불리는 〈설교하는 그리스도 Christ Preaching〉(1652경)라는 에칭은 '100길드 판화'를 보완하듯 드라이포인트 기법의 깊고 짙은 선을 이용하여 '100길드 판화'와 같은 주제를 좀더 친밀하고 꽉 짜인 공간 속에 압축하고 있다.

또다른 에칭들은 렘브란트가 궁극적으로 어둠 속에서 밝게 떠오르는 인물들에게 매혹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서를 주제로 한 초기의 실험적인 에칭들(예를 들면 1634년의 〈목동들에게 이른 예수 탄생 소식〉)과는 대조적으로 〈목자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1654경, 1652경) 같은 후기 에칭들은 조용한 내면으로 파고드는 우울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런 야간 장면에서는 대부분 아기예수나 수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 주변에 신이 몸소 나타나 계시를 준다. 〈매장 Entombment〉(1654경)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654경) 및 어두운 〈성전에 나타난 예수 Presentation in the Temple〉(1654경)가 그 보기이다.

또한 렘브란트는 1쌍의 대형 에칭을 제작하여 1650년대 중엽에 거의 끊임없이 개작을 계속했는데, 이런 개작은 일종의 명상적 훈련으로서 한 번 개작할 때마다 서술적 풍부함은 점점 줄어드는 대신 그 장면의 정신적 내용과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2점의 판화 〈3개의 십자가 The Three Crosses〉(1653, 4가지)·〈사람들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Christ Presented to the People〉(1655, 6가지)는 그리스도 수난의 중요한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1660년경까지 에칭을 계속 다루었던 것 같다.

1650년대에 렘브란트가 보여준 그밖의 주요 미술 분야는 풍경화였다. 에칭으로 제작된 풍경화는 대부분 오두막과 농가가 있는 네덜란드의 시골풍경을 보여주지만, 일부는 탑이나 오벨리스크처럼 당당하거나 아름다운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을 반영하고 있다.

1651년에 제작한 직사각형의 〈금의 무게를 다는 사람의 농장 Goldweigher's Field〉은 뛰어난 걸작으로 이 농장은 실제로 하를렘 근처에 있는 크리스토펠 테이스(12년 전 렘브란트에게 집을 팔고 집값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렘브란트의 채권자가 된 사람)의 소유지였다. 10년 전에 렘브란트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암스테르담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했는데, 이 에칭도 그 작품과 마찬가지로 규모와 색조변화(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앞쪽을 화려하게 강조한 것을 포함하여) 및 구부러진 원근법을 통해 공간이 단계적으로 부드럽게 펼쳐지는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금의 무게를 다는 사람의 농장(Goldweigher's Field)
금의 무게를 다는 사람의 농장(Goldweigher's Field)

가로로 긴 이 작품은 네덜란드 풍경을 그린 얀 반 호옌 같은 화가들이 유화에서 사용한 형식을 에칭에서 재현하고 있다. 렘브란트가 유화로 그린 풍경화 〈방앗간 The Mill〉·〈폐허가된 강변 풍경 River Landscape with Ruins〉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의 화풍(새파란 하늘과 꼼꼼한 구도)을 받아들였다.

거의 10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렘브란트는 1640년대 말에 다시 자화상으로 돌아갔다.

그가 에칭으로 제작한 마지막 자화상도 이무렵의 작품이다. 창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자화상(1648, 5가지)에서도 그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떠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1639년의 멋부린 궁정 신하의 모습보다 더 살쪄 보이지만, 친구와 후원자들의 초상화들 한가운데 그의 자화상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그가 새로 얻은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후원자들이 다시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기 시작 할 때 렘브란트는 자화상도 몇 점 그렸다.

그중에서 특히 1652년에 그린 대형 자화상은 주목할 만하다.

1653년의 문헌을 보면, 렘브란트의 경제사정이 점점 나빠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아들 티투스에게 양도한 뒤 1656년 채무변제를 신청했다. 한편 이에 앞서 재산을 경매에 붙이기 위해 그의 수집품 목록(1656)이 작성되었는데, 그의 수집품에는 풍경화와 동물화를 비롯한 자신의 작품도 많이 들어 있었지만, 다른 화가들의 판화와 소묘도 많았다.

이것들은 대개 책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렘브란트가 소유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가들의 작품 중에는 세헤르스와 리벤스의 작품이 많았지만, 플랑드르 출신의 아드리안 브로우웨르와 네덜란드 출신의 얀 포르셀리스 및 수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도 있었다. 자연물과 동양의 문물 및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수집품은 당시 유행하던 것으로 백과사전적으로 다양한 물건을 수집하여 일종의 개인박물관인 '예술품과 진귀한 자연물의 방'(Kunst und Wunderkammer)을 꾸미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

레이덴에서 받은 초기교육과 그의 그림 주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렘브란트는 여기서도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박식하고 야심만만한 세계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렘브란트의 말년

렘브란트의 명성은 네덜란드 밖에도 널리 퍼졌다.

〈호메로스의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 the Contemplating the Bust of Homer〉(1653)는 그가 돈 안토니오 루포라는 시칠리아 사람의 주문을 받고 그린 작품이었다. 철학자와 시인 및 군주의 세계를 하나의 작품으로 통합한 이 고전적 주제는 렘브란트의 풍부한 상상력에서 나온 착상인 것 같다. 이 작품은 어둠 속에서 인물이 그 자체의 내적인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얼굴을 그리는 렘브란트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1660년에 루포는 이 그림과 짝을 이룰 그림을 주문했고, 렘브란트는 〈호메로스 Homer〉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Alexander〉(1663, 단편으로만 보존되어 있음)를 그렸다.

렘브란트는 얀 데이만 박사에게서 또 하나의 해부학 강의(1656, 단편으로만 보존되어 있음)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의 유명한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 Syndics of the Drapers' Guild〉(1662)은 마지막 단체초상화로, 〈야경〉에 나오는 머스킷 총 부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상품 검사관들의 주문을 받고 그린 그림이다.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Syndics of the Drapers' Guild)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Syndics of the Drapers' Guild)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다른 단체초상화처럼 생생한 활기로 가득 차 있지만 관례에 따라 얼굴들을 좀더 균형있게 배열한 것이 특징이다.

렘브란트는 말년을 항상 누군가와 함께 지냈다. 아들의 유모인 헤르트헤 디렉스가 그곁을 떠난 뒤로는 헨드리키에 스토펠스(1615~63경)가 그와 동거하면서 시중을 들어주었고, 사스키아보다 훨씬 더 자주 그의 그림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654년에 그린 누드화 〈밧세바 Bathsheba〉의 모델은 예로부터 헨드리키에로 알려졌고, 실제로 이 모델의 모습은 헨드리키에의 수많은 초상화와 스케치(예를 들면 1655년의 〈목욕하는 여인 Woman Bathing〉)와 일치한다.

헨드리키에는 딸 코르넬리아를 낳기 직전인 1654년에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교회위원회의 공식적 비난을 받았다. 같은 무렵 렘브란트의 재산을 명의상으로 갖고 있던 아들 티투스는 27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인 1668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중요한 주문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창작 활동의 마지막 10년 동안 남아 있는 정력을 모조리 긁어모아 영혼이 깃들어 있는 감동적인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오늘날 사랑받는 것은 주로 이런 종류의 그림 때문이다. 그는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되돌아갔지만,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미 나타났 듯이 초상화와 같은 인간성의 차분한 힘을 부여했다.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을 시작으로 하여 〈돌아온 탕자 Return of the Prodigal Son〉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극적 사건이 주제가 되었다. 렘브란트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이 〈돌아온 탕자〉에서는 우울한 인물들이 어두운 배경에서 자체의 빛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각 인물들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

일부 작품은 초상화와 너무 비슷해서 그 종교적 성격이 많이 가려진다. 아내를 다정하게 끌어안는 남편의 몸짓이 화려한 금빛과 붉은색으로 두껍게 칠해진 인물들의 이국적인 의상을 압도하는 〈유대인 신부 Jewish Bride〉(1664경, 암스테르담)도 바로 그런 경우이다. 렘브란트는 1660년대말에 최신 의상을 입은 가족초상화(브라운슈바이크)를 그렸는데, 이 초상화는 암스테르담에 보존되어 있는 부부초상화와 비슷하다.

그래서 부부를 그린 〈유대인 신부〉는 성서를 주제로 한 그림이 아니라 〈야경〉에 나오는 머스킷 총 사수들의 초상화처럼 역사화를 가장한 2인 초상화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베드로 Peter Denying Christ〉(1660)와 〈루크레티아 Lucretia〉(1664, 1666)에서와 같이, 렘브란트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인간적 고독과 내면의 고통을 주로 나타냈다.

1661년에 그린 사도들의 반신 초상화 연작, 특히 〈사도 바울로 가장한 자화상 Self Portrait as the Apostle Paul〉(1661)에서는 당시의 인물과 역사적 주제가 완전히 결합되어 나타났다. 이 그림들은 시칠리아 사람 루포에게 보낸 〈호메로스〉 및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시기에 그려졌고,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을 그릴 때 모델로 삼는 '트로니'의 전통은 이 작품에서 절정에 이른다.

렘브란트가 마지막 10년 동안 초상화 주문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장 감동적인 초상화 가운데 몇 점은 이 시기에 그려졌고, 그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에게 부여한 것과 같은 침묵과 감정이입을 통해 실제인물들을 초상화로 그렸다. 그의 초상화 모델 중에는 원래 도르드레흐트 출신이며 볼의 후원자인 부유한 트리프 가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렘브란트는 1639년에 엘리아스 트리프 가족의 모녀를 그렸고, 1661년에는 엘리아스의 동생 야코프와 그의 아내 마르게리테 데 헤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모델들은 고전적으로 묘사된 화가 헤라르트 데 라이레세(1665)와 렘브란트의 가까운 친구이자 시인인 예레미아스 데 데커(1666)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2점의 초상화가 1쌍을 이루는 인상적인 초상화(특히 뉴욕과 워싱턴에 보존되어 있는 작품)와 나이프로 두껍게 칠한 다채로운 화법을 보여주는 가족초상화(브라운슈바이크)가 남아 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12년은 자화상이 많이 제작된 시대였다. 렘브란트는 1661년에 그린 사도들의 연작 초상화에서 사도 바울로의 모델로 자기 얼굴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그무렵에 더 크게 그린 반신 초상화(켄우드 하우스)에서는 팔레트를 손에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자화상의 배경에는 기하학에 대한 그의 지식을 보여주는 커다란 원호 2개가 있다(이것은 아마 네덜란드 지도제작법의 관행인 세계지도의 북반구와 남반구도 암시하고 있을 것으로 보임). 렘브란트는 생애의 마지막 해인 1669년에도 2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첫번째 자화상(런던)은 초기의 피라미드 구도로서 위엄을 보여준다. 2번째 자화상(헤이그)은 초기의 '트로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이국적인 터번을 쓴 모습으로, 축 늘어진 살과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시선을 냉정하고 거의 냉소적인 만큼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1669년 10월 4일에 죽었고, 암스테르담의 베스터 교회에 묻혔다.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

명쾌한 구도와 잘생긴 주인공에 대한 고전적 취향이 높아짐에 따라 렘브란트는 생전에도 이미 제자들(특히 플링크와 볼)에게 밀려났다.

라스트만과 반 혼토로스트 및 루벤스와 경쟁했던 야심만만한 시절이 지난 뒤 렘브란트는 국제적 조류를 따라가려는 노력을 포기했지만, 성서에 나오는 진지한 주제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그 정신적 성격 때문에 높이 평가되었고 그의 예술은 정통 칼뱅파 교도만이 아니라 메노파와 레몬스트란트파, 그리고 종교적으로 너그러운 암스테르담의 유대인과도 접촉한 것을 보여준다. 그는 데 그라프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평생 동안 중요한 그룹 초상화를 그렸으며 명성도 잃지 않았지만 그의 예술은 1630년대 이후로는 암스테르담의 첨단 유행을 결코 지배하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완전히 잊혀진 적은 없었으며, 특히 19세기 미술가들은 그를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독자적인 형태의 표현수단을 갈망하며 인물의 성격과 열정을 묘사하는 데 몰두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런 낭만적 갈망과 실험에 대한 공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에칭은 17세기 제노바의 조반니 카스틸리오네나, 18세기 베네치아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같은 후세의 판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19세기 중엽에 에칭이 되살아나면서 그의 판화가 다시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는 아름다운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형식적인 예술교육에 반대되며 '근대적'이 되려고 애쓴 쿠르베 같은 화가의 신조와 일치한다.

최근의 학자들은 렘브란트를 평가할 때 몇 가지 선례를 따랐다.

정확히 어떤 작품이 그의 것이며 어떤 작품이 제자나 추종자, 또는 모방자나 후세 위작자들의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결론을 끌어내는 데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는 것 외에 실험에서 과학적 조사도 이루어졌지만, 렘브란트의 제자들에 대한 최근 연구는 각각의 고유한 특징에 더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그들이 렘브란트의 화실에서 작업한 동안에는 그들과 렘브란트의 정확한 관계를 규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상기시켰다.

렘브란트의 진짜 그림이나 소묘를 위작 또는 제자들이 부분적으로 제작에 참여한 작품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작업실의 작업방법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 렘브란트의 제자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결국 렘브란트와 그의 후원자 및 당시 암스테르담의 정치·경제·사회 체제의 관계에 관해서도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고, 이 발견은 렘브란트가 당시의 문화 안에서 맡은 역할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는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의 야심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를 고려하고 그들 각자의 후원자와 지위를 고려하여 렘브란트의 업적과 그의 경쟁자 겸 동료들(리벤스와 플링크 및 볼)의 업적을 비교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렘브란트 자신이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옛 미술품을 수집하고 공부했다는 사실은 그를 고독한 천재로 여겨온 오랜 생각을 뒤엎어 버리기는 하지만, 좀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오늘날 렘브란트의 이미지는 여러 가지 점에서 그의 주위환경과 좀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의 작업방법과 그가 즐겨 다룬 주제, 그리고 네덜란드의 도시문화 안에서 그가 누린 후원 등이 그것이다. 현대인들은 렘브란트의 인기를 줄곧 뒷받침해 주고 있는 그의 독창성과 특유한 감수성을 인정하는 한편 렘브란트와 그의 예술이 17세기 네덜란드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는 렘브란트의 업적과 그의 동료 화가들의 업적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만 비로소 이 사랑받는 네덜란드의 거장이 이룩한 업적을 진정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