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헨드리크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다른 표기 언어 Frederik Hendrik, Prins van Oranje Graaf van Nassau
요약 테이블
출생 1584. 1. 29, 네덜란드 델프트
사망 1647. 3. 14, 헤이그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 연합주(네덜란드 공화국)의 3대 스타드호우데르(총독).
(영). Frederick Henry, Prince of Orange, Count of Nassau.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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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유년시절
  3. 총독직
  4. 프랑스와의 동맹
프레데리크 헨드리크(Frederik Hendrik)
프레데리크 헨드리크(Frederik Hendrik)

개요

침묵공 빌렘 1세의 막내 아들로 의붓형제인 마우리츠를 이어 오라녜 공이 되었다.

스페인과 전쟁을 계속치르면서 국내정치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군주에 필적할 만한 권력을 소유했던 오라녜 가문 최초의 인물이다.

유년시절

프레데리크 헨드리크가 태어나자마자 6개월도 채 안 되어, 네덜란드의 주요지도자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투쟁을 벌인 아버지 침묵공 빌렘이 살해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의 딸인 어머니와 고국인 프랑스로 가서 경험을 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빌렘 총독 자리를 물려 받은 마우리츠와 네덜란드 의회는 그가 네덜란드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레이덴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7세에 의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마우리츠의 군사 원정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여러 지역의 대외 사절로 파견되었다.

개혁파(칼뱅주의) 교회 내의 교리 갈등으로 촉발된 정치적·종교적 위기(1617~19) 동안 그는 어머니처럼 신중히 중도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여성편력이 심해 어느 한 여자에만 자신을 구속시키지 못한다"라는 평판을 들었으나 정통 후계자가 없는 마우리츠의 강한 압력에 못 이겨 마우리츠가 죽기 직전 40세가 되어서야 결혼했다. 보헤미아 여왕의 시녀였던 그의 아내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돈에 약하다는 평판을 받았으나 17세기 네덜란드에 바로크 왕궁의 전형을 도입하려 노력했다.

총독직

1625년 마우리츠가 죽은 후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덜란드 연합주를 구성하는 7개주 가운데 5개의 공국을 관할하는 총독이 되었으며, 1640년에는 6번째 그로닝겐 주를 병합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프리슬란트 주의 총독직도 빌렘(1626 출생)에게 계승권이 이어졌다. 오라녜 공은 이론상으로는 여러신분의회(중앙 및 지방)의 지명된 '공복'(公僕)에 지나지 않았지만 점차 여러 주의 총독직 세습권을 확보함으로써 네덜란드 군주로서의 지위를 획득해갔다. 당시 절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추세를 감안하면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야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지위는 시대착오적으로 번성한 과두체제의 공화국 연합을 관할하는 미약한 제후라는 비정상적이고 어색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략가로서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형 마우리츠의 수제자임을 입증했고 스페인에 대한 전쟁은 유럽의 청년 귀족들에게 일종의 군사 교실로 여겨졌다.

그는 요새지역을 함락시킴으로써 세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신은 격전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신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으며 매년 공격목표점으로 잡은 주요 도시와 요새들을 정복해나갔다. 그리하여 그의 승패에 따라 근대 네덜란드와 벨기에 왕국의 국경선이 결정되었다.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는데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헤르토겐보시 시(市)의 점령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점령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에게는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의 입지가 지닌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전지전능한 제후로서 인정을 받았으나 그의 권력은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다양한 요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연방 정부 예산의 58% 이상을 제공한 홀란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네덜란드 연합주를 구성하는 나머지 6개주와 네덜란드 청교도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종교가 없었지만 아버지와 같이 상황이 허락하는 한 종교적인 관용을 실시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지지자들보다도 정적인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더욱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정책결정에 있어서는 그같은 친밀성이 적용되지 않았다.

홀란트의 과두귀족들은 많은 비용이 드는 전쟁을 완강하게 반대했으며, 더욱이 전쟁이 크게 승리했을 때는 암스테르담과 치열한 무역 경쟁을 벌인 상업도시 안트웨르펜 항을 자유 네덜란드의 정치기구에 통합시키도록 위협했다. 헨드리크는 매년 전쟁을 치를 때마다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이 정치적으로 수용되도록 설득하는 데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마우리츠나 아들(뒤의 빌렘 2세)보다 노련한 전략가였던 그는 네덜란드 의회와 정면대립을 피해나갔다.

1640년 무렵까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덜란드의 외교정책을 혼자서 책임지고 수행해나갔다. 유럽 왕가와 결연을 맺으려는 그의 노력은 1641년 자신의 후계자 빌렘 2세와 영국의 왕 찰스 1세의 큰딸 메리와의 결혼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는 영국내란(청교도 혁명) 때 무조건적으로 찰스 1세를 지원했으며 반면에 홀란트 귀족들은 영국 의회를 지지했다.

프랑스와의 동맹

더 중요한 것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대(對)프랑스 정책인데 이것은 양국간에 맺은 분할조약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조약은 네덜란드 남부지역이 스페인에 의해 무력으로 정복될 경우, 이 지역을 프랑스에 분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으로 그는 매년 프랑스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전쟁에 지친 네덜란드 의회의 자금지원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지휘 아래 형성된 프랑스-네덜란드 연합군은 첫 공격에서 참패했다.

그후 브레다와 훌스트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연합군은 전쟁의 대세를 다시 잡지 못했다. 대세는 스페인과의 평화 쪽으로 기울었고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특히 아내에게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를 택했다.

어릴 때부터 통풍으로 고생하던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648년 1월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647년 3월에 죽어 델프트에 있는 가문의 무덤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