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테냐

만테냐

다른 표기 언어 Andrea Mantegna
요약 테이블
출생 1431(?), 베네치아 공화국 비첸차 근처
사망 1506. 9. 13, 만토바
국적 이탈리아

요약 북부 이탈리아 최초의 진정한 르네상스 화가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두칼레 궁에 있는 카메라 델리 스포시(결혼의 방, 1474)라는 방이다. 벽화로 장식한 이곳에서 그는 방 전체 환경에 대한 자신의 일관된 이상을 펼쳐보였다. 그밖에 만테냐의 주요작품으로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교회에 있는 오베타리 예배당의 프레스코와 그의 후기 양식의 절정인 〈카이사르의 승리> 등이 있다. 만테냐의 비범한 능력은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다. 1448년에 지금은 사라진 산타소피아 교회에 제단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은 것은 그의 조숙한 재능을 분명히 보여준다. 만테냐가 생애의 주요한 시기에 살았던 파도바에서의 환경은 그의 흥미와 착상 및 그림 양식뿐 아니라 자아에 대한 자각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만테냐의 예술과 고대 문화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른 미술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와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파도바에서 보낸 형성기
  3. 만토바의 궁정화가 시절
  4. 평가

개요

북부 이탈리아 최초의 진정한 르네상스 화가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두칼레 궁에 있는 카메라 델리 스포시(결혼의 방, 1474)라는 방이다. 벽화로 장식한 이곳에서 그는 방 전체 환경에 대한 자신의 일관된 이상을 펼쳐보였다. 그밖에 만테냐의 주요작품으로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교회에 있는 오베타리 예배당의 프레스코(1448~55)와 그의 후기 양식의 절정인 〈카이사르의 승리〉(1486경, 영국 햄프턴 궁 소장) 등이 있다.

파도바에서 보낸 형성기

만테냐의 비범한 능력은 일찍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는 목공예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10세 전후로 프란체스코 스콰르초네의 법적인 양자가 되었다. 파도바의 그림 선생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스콰르초네는 재능있는 시골 소년들을 화실로 데려왔는데, 만테냐와 마르코 초포를 비롯해 그의 후원을 받은 몇몇 예술가들은 나중에 그의 화실에 들어간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17세 때인 1448년에 만테냐는 스콰르초네의 보호에서 벗어나 파도바에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고, 스콰르초네가 그의 봉사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으면서도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만테냐가 1448년에 지금은 사라진 산타소피아 교회에 제단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은 것은 그의 조숙한 재능을 분명히 보여준다. 젊은 예술가가 그처럼 중요한 주문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만테냐는 그림에다 "파도바 출신의 안드레아 만테냐가 17세 때인 1448년에 이 그림을 손수 그렸다"는 글을 적어넣어, 젊은시절의 능력을 자랑했다.

이듬해 만테냐는 파도바의 에레미타니 교회에 있는 오베타리 예배당에 프레스코를 그렸다.

그가 이 예배당에 처음으로 그린 프레스코는 성가대 뒤쪽에 그린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및 성 크리스토포루스였는데, 이 인물화들은 그가 토스카나 지방의 당당한 인물화 양식에 이미 정통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왼쪽 벽의 맨 아랫줄에 그려져 있는 〈순교하러 가는 성 야고보〉는 1453~55년의 작품인데, 이 그림에서는 만테냐가 '소토 인 수'(sotto in su : 아래에서 위로 보는) 원근법에 이미 숙달했고 로마 건축의 세부를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용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림의 아래쪽 테두리보다 더 밑에 시점을 두는 원근법은 보는 사람에게 그 장면이 훨씬 높아 보이게 하고, 개선문의 아치가 마치 웅장한 기념물인 듯한 느낌을 준다.

성 크리스토포루스의 생애를 다룬 두 장면은 오른쪽 벽에 하나의 배경으로 통합되어 있는데, 만테냐는 이 그림의 정면에 지극히 사실적으로 기둥 하나를 그려넣음으로써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까지 눈의 착각에 대한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지나칠 만큼 자세히 묘사된 이 기둥은 그림을 둘로 분할하지만, 회화적 공간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치 보는 사람과 함께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요소에까지 착각의 원리를 적용하는 이런 기법은 만테냐가 그린 산체노 교회의 제단화를 예고해준다. 이 제단화의 정면에 그려진 채색 기둥들(수직적 요소)은 무늬가 조작된 주변의 반원 기둥들과 인접해 있어서, 그림 주변의 건축물이 그림 속에 묘사된 건축물의 '외부'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물리적 장치와 시각적 장치를 훌륭하게 결합함으로써, 성모 마리아가 존재하는 관념적 영역은 보는 사람이 서 있는 현실공간과 하나로 융합한다.

만테냐가 오베타리 예배당에 그린 프레스코는 〈성모승천〉과 〈성 크리스토포루스의 순교〉 장면을 제외하고는 불행히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모조리 파괴되었다.

만테냐가 생애의 주요한 시기(10~30세)에 살았던 파도바에서의 환경은 그의 흥미와 착상 및 그림 양식뿐 아니라 자아에 대한 자각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파도바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인문주의의 중심지가 되었고, 큰 대학(1222 창립)이 있었으며, 의학과 철학 및 수학 연구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유럽 전역과 이탈리아에서 학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파도바에는 국제주의적인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파도바에서는 시인 페트라르카가 살았던 14세기부터 고전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되살아났고, 유명한 인문주의자와 라틴 학자들이 많이 살았다. 고대 로마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것을 모방하는 경향이 늘어나자, 골동품과 고대 비문(산산조각난 파편까지도)을 열심히 수집하는 풍조가 생겼다. 만테냐가 몇몇 인문주의자와 골동품 수집가 및 대학 교수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따라서 그는 그런 사람들과 지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우정을 나눈 최초의 르네상스 미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16세기초에는 고대 역사와 신화 및 고전 문학에 정통해 이런 훌륭한 원천에서 쉽게 주제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을 예술가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만테냐의 생활방식은 그 이상형의 확립에 이바지했다.

만테냐가 파도바의 이런 환경을 경험한 것은 고전 세계에 대한 그의 태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대 로마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만테냐의 탐구심은 로마 건축물과 조각을 묘사하고 고전 미술을 다루는 기법을 창조한 것에서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이것은 1450년대 중엽부터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탈리아 북부의 화가 및 조각가들이 고대 미술을 모방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 되었다. 만테냐는 또한 예술적 종합의 과정에서 로마의 위대한 모습에 잠재된 힘과 그 의의를 느꼈다. 빈과 파리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초상뿐만 아니라 〈헤롯 앞에 선 성 야고보〉·〈순교하러 가는 성 야고보〉를 비롯한 오베타리 예배당의 그림에서는 위압적일 만큼 거칠고 엄격한 건축물이 배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고통은 이제 곧 일어날 문화적 충돌, 즉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교도 세계의 분열로 말미암은 문화적 충돌 속에 함축된 비극적 의미를 띠고 있다.

만테냐의 시대에는 건축과 조각의 형식을 연구하고 거기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함으로써 고대로부터 소외되었던 경험을 극복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주제였다. 로마 세계가 이탈리아의 폐허 속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15세기를 덮쳤던 갑작스러운 문화적 상실감을 더욱 증대시켰을 뿐이다. 만테냐는 고대 미술 형식을 철저히 묘사하고 그 예술품 창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정치현실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거기에 결부시킴으로써 14세기 중엽의 르네상스 운동에 커다란 추진력을 주었다.

만테냐의 출발점은 그보다 훨씬 먼저 이루어진 고대 부활 형식(1442년에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가 베네치아에 소개한 웅장하고 당당한 토스카나 인물화 양식)이었다.

만테냐는 1447년에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산차카리아 교회에서 카스타뇨가 그린 복음서 저자들과 성인들의 프레스코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1453년에 자코포 벨리니의 딸이자 조반니 벨리니와 젠틸레 벨리니의 누이인 니콜로시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와 베네치아의 관계는 더욱 강해졌다.

벨리니 가문은 그후 10년 동안 베네치아의 유력한 화가 집안이 되었다. 자코포 벨리니는 고대 건축물에 바탕을 두고 환상적인 건축물을 배경으로 한 원근법과 소묘를 연구했는데, 이것은 그의 사위인 만테냐의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만테냐도 앞서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그런 소묘작품을 연구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만테냐가 당연히 벨리니의 화실에 들어갈 것으로 여겼을 테지만, 그는 파도바에서 독자적으로 일하는 쪽을 택했다.

피렌체의 조각가 도나텔로가 파도바에 새로 지은 산안토니오 교회(1450 완공)의 중앙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수많은 조각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만테냐에게 압도적인 예술적 영향을 미쳤다. 만테냐의 화풍에 대한 조반니 벨리니의 반응은 부드러운 의견교환이었지만, 도나텔로의 작품에 대한 만테냐의 반응은 투쟁이나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만테냐가 산체노 교회 중앙제단에 그린 제단화(1459)의 테두리와 채색 건축물은 도나텔로가 장식한 파도바의 중앙재단이 그에게 제기한 도전에 응한 것이었다. 만테냐의 예술은 딱딱하고, 심지어는 금속성의 질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도나텔로의 조각을 흉내내고 있다. 그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조각의 접근방식임을 보여주는 딱딱한 표면은 1490년대에 이르러 약간 부드러워졌다.

만토바의 궁정화가 시절

만테냐는 독립성을 잃지 않으려고 지나칠 만큼 경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1459년에 만토바 후작인 루도비코 곤차가 아래에서 일하게 되자, 그는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자유와 다른 후원자들에게 주문을 받을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만테냐는 1466~67년에 피렌체와 피사를 여행하면서, 도나텔로와 프라필리포 리피, 파올로 우첼로 및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작품을 다시 보았다. 이 10년(1460~70) 동안 만테냐는 〈예수 할례〉와 베네치아의 〈성 게오르기우스〉를 비롯해 그의 소규모 작품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을 제작했다.

곤차가의 후원으로 만테냐는 고정 수입(이 수입이 항상 들어오지는 않았음)을 갖게 되었고, 만토바의 두칼레 궁에 이른바 카메라 델리 스포시 또는 카메라 픽타(채색한 방)라고 부르는 방을 장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방은 결국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되었다. 15세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화가들은 네모진 벽을 바깥 세계로 향해 열려진 창문처럼 보이도록, 그 벽면에 가공의 공간을 그럴 듯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만테냐는 카메라 델리 스포시의 벽과 천장에 건축적 요소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언뜻 보기에 방이 실제보다 확장된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천장도 우묵하게 팬 것처럼 보이게 했다. 만테냐는 옥내의 작은 방을 야외의 우아한 정자처럼 느껴지게 했는데, 이 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도시의 성 깊숙한 곳에서 갑자기 야외의 우아한 정자에 들어서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안드레아 만테냐, 만토바 대공의 궁전 예배당의 제단 후면 장식화 : 〈그리스도의 승천〉
안드레아 만테냐, 만토바 대공의 궁전 예배당의 제단 후면 장식화 : 〈그리스도의 승천〉

방 한복판의 바로 위 천장에는 오쿨루스(하늘을 향해 뚫린 둥근 구멍)가 그려져 있고, 난간 주위에는 작은 천사들과 여인들이 극적으로 단축된 원근법으로 그려져 있다.

오쿨루스가 만드는 강렬한 수직축은 보는 사람을 방 한복판의 한 점에 고정시킨다. 이 점에 서면 관찰자의 공간은 벽난로 위의 비좁은 공간에서 그를 향해 튀어나오는 프레스코 속의 인물들의 공간과 하나로 융합된다. 오쿨루스의 원근법 처리는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눈의 착각을 일으키는 '디 소토 인 수' 원근법을 이용한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장 장식 가운데 가장 영향력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오쿨루스가 암시하고 있는 천장 장식은 16세기초 이탈리아 북부의 화가 코레조가 이탈리아 파르마에 있는 몇 개의 둥근 천장에 이와 똑같은 유형의 원근법을 채택했을 때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리고 만테냐는 종합적으로 착시를 일으키는 공간개념을 형성했지만 바로크 시대(17세기)에 독창적인 천장 장식기법을 고안한 조반니 란프랑코와 안드레아 포초 같은 예술가들이 만테냐와 기본적으로 똑같은 개념, 즉 방의 한 점에 서 있는 가공의 관찰자의 위치에 바탕을 둔 총체적 착시공간 개념을 활용할 때까지 아무도 만테냐의 이 개념을 이용하지 않았다.

곤차가의 궁정에서 일하는 동안 만테냐는 상당히 존경받는 지위를 얻었다.

후원자인 루도비코와 그의 친밀한 관계는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만테냐의 그림에 적힌 서명은 화가로서 이룩한 업적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말년에 만테냐의 성격이 급해지고 싸움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증거는 그림에 적힌 이 서명 이외에 이웃 사람들과 그의 분쟁(루도비코는 이 분쟁에서 그를 구해주어야만 했음)에 대한 몇 건의 법정기록뿐이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관찰자가 만테냐의 그림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만테냐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주관적 결론을 수없이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도비코가 1478년에 죽고, 만테냐의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그동안 문을 닫았던 아버지의 화실을 다시 시작하리라고 여겨졌던 베르나르디노마저 그 직후에 세상을 떠나자, 만테냐는 경제적 곤궁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1484년에 피렌체의 유력한 상인이자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피렌체로 이주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까지 했다. 루도비코의 아들 페데리코는 아버지보다 불과 5년 더 살았을 뿐이었고, 1484년에 어린 프란체스코 2세가 만토바 군주로 즉위하자 그의 후원을 받는 만테냐의 경제사정은 약간 나아졌다.

만테냐가 곤차가가(家)를 위해 그린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로마의 개선행진을 묘사한 9점의 그림은 아직 전해진다.

그는 〈카이사르의 승리〉라는 이 그림들을 1486년경에 그리기 시작해 여러 해에 걸쳐 완성했다. 새로운 후원자인 프란체스코의 고전적 취향을 반영한 이 그림에서 만테냐의 후기양식은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로마 벨베데레 궁에 있는 개인 예배당을 장식해달라고 만테냐에게 주문한 이유는 고대 로마의 색채와 웅대함, 의례적 권위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새롭게 종합한 이 작품을 보고 매혹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테냐는 교황의 주문을 1488~90년에 수행했다.

건강도 나쁘고 나이도 들었지만, 만테냐는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1495년에 프란체스코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하고, 그 승리를 기념하는 〈성모의 승리〉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만테냐는 1490년에 이루어진 이사벨라 데스테와 프란체스코 곤차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파르나소스 산〉(1497)과 이사벨라의 '스투디올로'(만토바의 곤차가 궁에 있는 작은 방으로서, 후원자의 박식함과 고급 취향을 과시하기 위해 신화적 주제를 다룬 훌륭한 그림과 조각으로 꾸민 방)를 장식하기 위해 〈악을 정복하는 지혜〉(1502)를 그렸다.

3번째 그림은 코모스 신의 전설을 다룬 것(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이었지만, 만테냐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곤차가 궁정화가가 된 로렌초 코스타가 완성했다.

만토바의 산안드레아 교회에 있는 영안실은 만테냐를 추모해 그에게 헌정되었다.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는 이 영안실은 1516년에 완성되었으며, 둥근 천장에는 만테냐가 그린 〈성모의 승리〉와 관련된 낙원의 상징들이 그려져 있다(이 그림들을 그린 사람은 아마 코레조로 추정됨). 15세기 화가들 가운데 자신이 일한 도시의 주요교회에 자신의 영안실을 갖는 영예를 누린 사람은 만테냐뿐이었다.

이것은 만테냐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이 도시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입증해준다.

평가

만테냐의 예술과 고대 문화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른 미술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베네치아의 조반니 벨리니와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만테냐는 산체노 교회의 제단화에서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을 주변 건축물과 이어지는 통합된 공간 속에 묘사함으로써, 사크라 콘베르사초네 그림(즉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그림)에 새로운 3차원적 착시효과의 원리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가 프레스코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은 아마 이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만테냐가 원근법과 축소형을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총체적인 공간효과를 창출한 것은 천장 장식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고, 이 전통은 그후 3세기 동안 이어졌다. 만테냐가 만토바에 있는 곤차가 궁을 배경으로 그린 곤차가가의 초상화(1474)는 실물보다 더 큰 키, 조각 같은 입체감, 그리고 대개는 성인들이나 신화적·역사적 영웅처럼 위엄있는 자세로 묘사하는 등 실존인물들을 미화했다.

만테냐의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만테냐의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