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차가가

곤차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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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탈리아의 지배 가문.

1328~1707년 만토바를 통치했고 1536~1707년 카잘레를 본거지로 몬페라토를 다스렸다.

가문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곤차가의 코라디 가문이 만토바 가까이에 영지를 가진 봉건 지주로 자리잡은 때인 12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에 이 가문은 원래의 영토를 계속 넓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만토바와 레조 사이의 중간지점에 있는 곤차가 마을과 성에서 가문의 이름을 따왔다.

이 가문은 13세기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루이지 1세(1267~1360)는 격심한 전쟁을 치른 뒤 1328년 8월 그의 이복형제인 리날도(별명 파세리노) 보나콜시를 대신해서 만토바의 영주가 되었다. 당시의 칭호는 총사령관, 그뒤는 제국의 주교대리였고, 여기에 미란돌라와 콩코르디아 백작이라는 칭호가 덧붙여졌다.

1335년 7월 루이지의 아들 구이도가 스칼리제리로부터 레조를 공략해 곤차가 일가는 1371년까지 그곳을 다스렸다.

루이지의 뒤를 구이도(1369 죽음)가 계승하고 구이도의 아들 루이지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1382 죽음). 이어 조반 프란체스코 1세(때때로 프란체스코 1세로 부름. 1407 죽음)는 한때 밀라노 군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동맹을 맺었으나 뒤에 비스콘티의 적대감을 사서 영토을 잃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결국 그는 비스콘티의 적인 피렌체 및 볼로냐인(人)들과 연합했다. 그는 상업을 장려했고 자신의 영지를 부유하게 발전시켰다.

그뒤를 이은 아들 조반 프란체스코 2세(1444 죽음)는 유명한 장군이 되어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를 위해 봉사하고 그 대가로 자신과 후손들의 만토바 후작 작위를 받았다(1432). 이로써 곤차가 가문은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다.

조반 프란체스코 2세 때 비토리노 데 펠트레는 만토바 가까이에 있는 곤차가 가문의 한 저택에서 인문주의 성향을 지닌 최초의 학교를 세웠다(1423). 예술가들도 곤차가 가문의 후원을 받았는데 특히 안드레아 만테냐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들 수 있으며 예술가들의 활동으로 15세기 만토바와 그 주변지역은 화려하게 꾸며져 모습이 바뀌었다. 조반 프란체스코의 아들 루이지 3세(1478 죽음)도 마찬가지로 유명한 군인이면서 박식하고 자유분방한 군주였고 또한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였다.

그의 아들 페데리고 1세와 손자 조반 프란체스코 3세(프란체스코 2세:1519 죽음)도 곤차가 가문의 군사 전통을 계속 지켜 만토바에서 곤차가 가문의 위엄과 지배력을 그 절정에 달하게 했다.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입해 북부 이탈리아가 전쟁에 말려드는 위험하고도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여 곤차가가는 카를 5세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의 샤를 8세에 대항하는 이탈리아 동맹군을 이끌었으며 조반 프란체스코 3세는 토스카나와 나폴리 왕국에서 싸우다가 1509년 베니스인들에게 사로잡혔다. 풀려난 뒤 그는 더욱 평화적이고 화합적인 정책을 실시했으며 유명한 아내 이사벨라 데스테의 도움을 받아 예술과 문학을 장려했다.

그뒤를 아들인 페데리고 2세(1540 죽음)가 계승했는데 그는 교황군의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페데리고 2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1세(프란체스코 3세)가 부친을 계승했으나 요절하고 프란체스코 1세의 동생인 구리엘모가 뒤를 이었다. 구리엘모와 그 아들 빈센초 1세(1612 죽음)는 대단한 낭비가였다. 빈센초의 아들 프란체스코 2세(프란체스코: 1612 죽음), 페르디난도(1626 죽음), 빈센초 2세(1627 죽음) 등 무능한 군주들이 계속 뒤를 이었다.

이후 만토바는 외세의 침략으로 황폐해졌고 방탕한 공작들의 통치를 받다가 1708년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같은해 7월 5일 마지막 공작인 페르디난도 카를로가 베네치아에서 죽은 뒤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