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 문헌

교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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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교부들의 작품.

〈신약성서〉를 제외한, 8세기 이전 그리스도교인들이 쓴 책들을 망라해 가리킨다.

'교부'(patristic)라는 말은 그리스어이자 라틴어인 '파테르'(pater:아버지)에서 유래했다. 대부분의 교부 문헌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되어 있지만, 시리아어를 비롯한 여러 근동 언어로 된 작품들도 많이 남아 있다.

사도 교부들의 글들, 즉 주로 그리스도교인의 행실을 주제로 한 짧고 수수한 그리스어 작품 모음집에는 초기 교교부 문헌이 담겨 있다.

이 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로마의 클레멘스가 쓴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 Letter to the Church of Corinth〉〈디다케 Didache〉라고 부르는 교회 질서에 관한 지침서의 일부로서, 이 책들은 1세기말 수십 년 사이에 등장했으며, 저작시기가 〈신약성서〉의 몇몇 책들보다 앞선다.

초기 교부 저작들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순교 이야기이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 Passion of Perpetua and Felicitas〉으로, 이 책은 202년경 그리스도교인 귀족 페르페투아라는 여인이 카르타고에서 배교(背敎)를 거절하고서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에 썼다. 2세기와 3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도들의 업적에 관한 외경적(外經的)인 이야기가 유행했다. 훗날 그리스도교 예술은 그러한 전기적인 이야기들을 끌어다가 마리아의 탄생 및 사도 베드로의 모험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2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교인들은 로마 정부에 대해서 자기들의 신앙을 변호하고 이단으로 판단한 영지주의(靈知主義) 사상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

그 당시의 주요저자는 순교자 유스티노로서 그는 그리스도교 교사였으며, 165년경 로마에서 처형당했다. 그리스어로 책을 쓴 유스티노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수사학 및 철학의 유산을 점점 더 세련되게 사용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초기 유대문학, 특히 플라톤 철학에 토대하여 토라(Torah)를 상징적으로 해석한 철학자 필론(BC 15경~AD 50)의 작품들에 의존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그리스 철학 사용은 오리게네스(185경~254경)의 저작들에서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그리스인 저자로서, 그의 논문 〈제1원칙들에 대해서 On First Principles〉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교리들을 최초로 조직적으로 한데 모아놓은 작품이다. 오리게네스는 초대교회의 위대한 성서학자였으며, 그의 비유적 성서 해석 방법은 종교개혁 이전까지 그리스도교 해석학을 지배했다.

라틴계 그리스도교인 저자 가운데 최초의 중요한 인물은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160경~225경)로서, 그는 비할 수 없이 문체가 뛰어난 저서들을 써서 라틴 신학의 방향을 잡아놓았다.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교부 문헌의 커다란 분수령이다. 이론적으로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다 모인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후의 교부시대로 이어지는 한 시대 시작의 획을 긋는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동안 교회 공의회들은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정의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적·정치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니케아 공의회로 핍박받는 소수의 종교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총애를 받는 종교가 된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의 주요저자는 초대 그리스도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와 친구가 된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260경~340경)이다. 323년에 최종판이 출판된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는 처음으로 알려진 초대 교회와 그 시대 문학에 대한 역사서이다.

〈교회사〉는 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한 참고문헌들을 사용한 점에서 특별히 가치있는 책이다.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100년 남짓한 기간에 교부 문헌은 황금시대를 누렸다.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한 신학자들은 길고 격렬한 논쟁을 거친 끝에 삼위일체에 관한 규범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를 규명했다. 그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293경~373)와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그들의 고향이 모두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름), 즉 바실리오스(330경~379), 그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스(335경~394경), 그들의 친구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330경~389경)가 있다.

아타나시오스와 바실리오스는 저작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수도원 운동 발전에 이바지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스를 이상적으로 그린 전기 〈성 안토니오스의 생애 Life of St. Antonius〉로 수도원 운동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바실리오스는 동방 정교회 수사들의 생활 규율 지침서를 썼다.

이 황금시대 동안 설교자들과 저자들은 고도의 웅변술을 터득했다.

그리스에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7경~407), 라틴에서 밀라노의 암브로시오(339경~397), 그리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노(354~430)는 완벽한 웅변가들로서, 그 시대에 가장 존경받고 보편화된 예술 형태인 웅변술의 대가들이었다. 니시비스의 에프라임(306경~373)은 시리아어로 우수한 그리스도교 시를 썼다.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필가였던 예로니모(제롬:347경~420경)는 성서 원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세심하고 표현이 풍부한 불가타역을 내놓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교부시대에 가장 영향력있던 저자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였다.

그의 신학 논문들은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에 공통된 전통을 광범위하게 이룩해놓았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명상집이나 심리학적으로 예리한 자서전인 〈고백록 Confessions〉은 교부들의 책 가운데 현대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작품이다.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쓴 논문인 〈신국론 Civitas Dei〉은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반성을 열어놓았다.

두 사람의 그리스 신학자,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350경~428경)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375경~444)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인 동시에 사람일 수 있는가에 대해 영향력있는 대안적 견해를 제시했다.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오리게네스 이후 가장 위대한 성서해석학자로서, 그는 오리게네스의 비유적 성서해석방법을 배척했다.

문화 전통의 단절과 독특한 중세의 관심사들이 후기 교부 문헌의 특징이다. 비잔틴 신학자이며 고해신부 막시무스(580경~662)는 성상(聖像)과 신비주의적 사색에 대한 비잔틴의 전형적인 관심사들을 잘 나타내주었다.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라틴 교부 문헌에서 최후의 중요한 저자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604)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좀더 실제적인 관심사들을 주제로 글을 썼다.

그레고리오는 종교 밖의 모든 영역이 어지러운 시기에 베네딕토 수도회와 교황청이라는 2개의 안정되고 항구적인 제도를 하나로 묶었다. 이슬람의 등장으로 지중해 세계에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적 통일성이 사라지면서 교부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