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루스

테오도루스

다른 표기 언어 Theodorus of Mopsuestia
요약 테이블
출생 350경, 시리아 안티오크
사망 428/429, 킬리키아 모프수에스티아
국적 시리아

요약 시리아의 신학자.

당시 가장 위대한 성서 해석자이며 안티오크 학파의 영적 지도자로 인정된다. 친구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함께 유명한 소피스트이며 수사학자인 리바니우스 밑에서 공부했다.

369년 크리소스토무스의 영향을 받아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안티오크 근처의 수도원에 들어가 378년까지 그곳에서 공부했다. 381년 사제가 되었고, 392년경 모프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교회에 전염병처럼 번지던 신학논쟁에 가담했으며, 402(또는 403)년에 저작활동을 시작하여 안티오크 학파의 주요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주의 만찬, 니케아 신조, 성례전, 성서 대부분의 책들에 대해 주석서를 썼다. 또한 성령, 성육신, 제사장직, 주석 방법, 신학논쟁, 수도원주의 등 신학적·실천적인 문제에 대한 글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에데사(지금의 터키 우르파)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됨으로써 표준이 되었다. 그는 해석가로서 전례 없는 비평적인 기준들을 사용했다. 경쟁 해석학파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쓰는 우의적인 해석 대신 현대 학문을 예기하는 과학적·비평적·문헌학적·역사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성서의 여러 책들이 씌어질 당시의 역사 상황들을 고려함으로써〈시편〉에 실린 많은 시가 BC 2세기에 속한다는 오늘날의 견해를 예기했으며〈역대기〉,〈에스드라〉, 성서의 일반 서신서들 같은 책들을 정경이 아닌 것으로 배제했다.

테오도루스는 에페소스 공의회(431)가 정죄한 바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네스토리우스 교회, 즉 '동방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티오크 학파를 추종하던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테오도루스를 가리켜 '해석자'라고 했으며, 그를 모든 신앙 문제에서 가장 큰 권위자로 여겼다.

테오도루스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원을 받은 논쟁이 절정에 달했다. 칼케돈 공의회(451)는 그리스도의 인성 견해를 옹호했지만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는 테오도루스의 견해와 저작을 단죄했다. 484년 페르시아 공의회가 그를 올바른 믿음의 수호자로 인정한 뒤 동방교회는 테오도루스의 신학에 동조했고, 그 이래로 네스토리우스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