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론

필론

다른 표기 언어 Philon Juda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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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BC 15(~10), 알렉산드리아
사망 AD 45(~50), 알렉산드리아
국적 유대

요약 필론은 헬레니즘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저작들은 디아스포라에서의 유대주의의 발전에 관한 가장 명확한 견해를 제공해준다. 계시신앙과 철학적 이성을 종합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로서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성서에 대한 우화적 해석을 시작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며, 신의 권능이 자연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는 자연신학의 창시자들 중의 하나이고,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중세의 핵심 문제에 처음으로 부딪혔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고,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 위에서 신에 대한 신비적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중세 이후 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는 거의 모두 다 제기했다.

필론(Philon Judaeus)
필론(Philon Judaeus)

헬레니즘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저작들은 디아스포라에서의 유대주의의 발전에 관한 가장 명확한 견해를 제공해준다. 계시신앙과 철학적 이성을 종합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로서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유대 민족에 관한 역사가로서 1세기에 살았던 요세푸스는 필론이 명문 출신이라고 썼다. 필론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기 전까지는 팔레스타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관세담당 세무관리였던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 리시마코스는 그 도시는 물론 헬레니즘 세계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유대 왕 아그리파 1세의 아내에게 막대한 액수의 돈을 빌려주었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신전의 거대한 문 9개에 입힐 금과 은을 기증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로마 제국 전체에도 영향력 있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오랜 친구였으며 황제 어머니의 보호자 역할도 했다.

유대 파피루스와 비문에 씌어진 언어로 미루어 보면, 알렉산드리아 공동체는 거의 3세기 동안 오직 그리스어만을 사용한 듯하며 70인역(히브리어 성서를 BC 3세기에 70여 명이 번역했다고 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구약성서〉)을 신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필론이 태어나기 전 150년 동안 알렉산드리아는 오늘날 단지 단편으로만 존재하는 저작들의 저자인 많은 유대 저술가들의 고향이었다. 이들은 종종 그리스 문화 속에서 살면서 유대주의를 위한 변론서를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자식들이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 자유7과와 체육 교육에 전념하는 종교 단체들을 가진 기관인 그리스 김나지움에 입학시키려고 애썼다. 물론 이 김나지움에 들어간 유대 학생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필론은 그러한 교육의 산물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는 광범위한 그리스의 작가들, 특히 서사시인과 극시인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 수사학파들의 기교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김나지움을 찬양하고 있다. 필론의 교육은 그가 모세에게 그 기원을 돌리고 있는 학과들처럼 산술·기하·천문학·화성학·철학·문법·수사학·논리학 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비록 종교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이기는 했지만 당대의 교양 있는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필론도 종종 연극을 보러 갔으며, 그곳에서 동일한 음악이 여러 부류의 관객들에게 상이한 효과를 미치는 것과 관객들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열광하는 것에 주목했다.

필론은 자신이 받은 유대 교육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저작에는 유대 교육에 관한 언급이 단 한 번 나오는데, 이는 유대 교육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빈약했었던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단지 윤리학 강의를 위해 안식일에 열린 유대 학교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이 정한 유대 관습을 단 하나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진술로 미루어 볼 때, 그가 결코 그리스화한 팔레스타인인이 아니었고 자신을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으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필론은 성서를 너무 축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특히 신인동형론(인간의 특성을 기초로 하여 신을 기술하는 입장)이라는 신학적 난관에 봉착하는 사람들과, 율법을 지나치게 우의적(寓意的)으로 해석함으로써 율법은 단지 우화일 뿐이므로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 사람들 모두를 비판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한 차례 순례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종교적 실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랍비들이 알기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수수께끼를 내고 날카로운 대답을 하는 것으로 특히 유명했다.

중세 이전에 〈탈무드〉를 제외하고 유대 법률의 최대 보고라고 할 수 있는 필론의 저작은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의 관계를 법률(halakah)과 의식(儀式) 준수의 영역에서 구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유대 법률에 대한 필론의 설명은 그 법률에 대한 이상적 서술을 제공하는 학문적 논문이거나 아니면 이집트에 있던 유대 법정에서 실제 행해진 것들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대체로 필론의 관점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팔레스타인적 관점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는 자세한 설명을 많이 하고 있고 때때로 그리스와 로마 법률에 의존하고 있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적 관점과 다르다. 필론이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는 것은 그의 〈특별법에 관하여〉에 나오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세상사에서 벗어나 명상 생활에 들어가고 싶은 갈망,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을 때의 기쁨(그의 논문 〈명상 생활에 관하여〉에서 서술하고 있는 테라페우태라는 이집트의 유대 금욕 종파와의 만남을 두고 한 말인 듯함), 다시 세속의 혼돈 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때 느낀 고통 등에 관해 쓰고 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떠들썩한 대도시에서의 생활에 줄곧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또한 사해 지역의 수도(修道) 공동체에서 생활한 유대 종파인 에세네파가 도시 거주자들 사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죄악들 때문에 대도시를 피해 농촌 생활을 하며 부를 부끄럽게 여긴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필론의 생애에서 단 하나의 확인 가능한 사건은 39(또는 40)년에 일어났다. 이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있은 이후, 필론은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 왕조의 역대 왕(프톨레마이오스)들이 인정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확인한 유대인의 권리를 재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이끌고 칼리굴라 황제를 찾아갔다.

셈족에 대한 반대로 악명 높은 그리스의 문법학자 아피온이 유대인들은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하자 필론은 대답하려 했으나 황제가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후 필론은 동료 사절들에게 신이 칼리굴라를 벌할 것이므로 낙담하지 말라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칼리굴라는 암살되었다.

필론이 실제로 쓴 저작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모세5경으로, 특히 〈창세기〉의 특정한 시나 소재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와 설교이다. 그중 25편의 글이 남아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에 관한 주석인 〈율법의 비유들〉과 모세5경에 나오는 율법들을 해설한 〈특별법에 관하여〉이다. 둘째는 일반적인 철학적·종교적 에세이로는 현자만이 자유롭다는 스토아 학파의 주장이 역설임을 증명하고 있는 〈착한 인간은 모두 자유롭다〉로서 스토아 학파에 반대하여 세계는 창조되지 않았고 파괴될 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세계의 영원함에 관하여〉(필론의 글이 아닌 것으로 추정됨), 신이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신의 섭리라고 주장하는 필론과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티베리오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필론의 조카로 추정됨) 사이의 내화로 이루어진 〈섭리에 관하여〉(현존하는 것은 아르메니아어로 되어 있음), 동물의 비이성적 영혼에 관해 논하고 있는 〈알렉산드로스에 관하여〉(현존하는 것은 아르메니아어로 되어 있음) 등이 있다.

셋째는 당대의 문제들에 관한 에세이로서 테라페우타이 종파에 대한 찬미의 글인 〈명상 생활에 관하여〉, 셈족에 대한 비난에 맞서 유대 민족을 옹호한 단편 〈가정 Hypothetica〉(요세푸스의 〈아피온에 반대하여〉는 많은 점에서 이것과 유사함), 로마의 이집트 총독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프라쿠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가한 죄악과 그에 대한 처벌에 관해 쓴 〈프라쿠스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칼리굴라 황제(즉 가이우스)를 공격하고 자신이 이끈 사절단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대(對)가이우스 사절단에 관하여〉 등이 있다.

필론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저작들 가운데 많은 것이 위작이다. 이러한 위서(僞書)들 중에서는 아담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유대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한 〈성서의 고대(古代)〉가 가장 중요하다.

사상

필론(Philon Judaeus)
필론(Philon Judaeus)

필론의 철학은 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피타고라스 학파, 견유학파, 스토아 학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성 제롬(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과 그밖의 교부(敎父)들이 "플라톤이 필론이 되고 있거나 아니면 필론이 플라톤이 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매우 널리 퍼진 말을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필론의 기본적인 철학적 견해는 플라톤적이다. 필론은 플라톤의 〈향연〉과 〈티마이오스〉를 너무도 숭배한 나머지 스토아 학파나 그밖의 철학자들에 대해서와는 달리 플라톤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반박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필론은 플라톤을 표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플라톤의 이론을 수정했다. 또한 그는 주로 우주론과 윤리학 문제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 수(특히 7)의 신비적 의미와 영혼불멸을 위한 준비로서의 독특하고 자제된 생활방식에 관한 견해는 주로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는데,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필론 이전의 100년 동안 점차 중요성이 커졌다.

견유학파의 독설은 필론의 훈계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필론은 스토아 학파의 용어를 가장 빈번히 사용했지만,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과거에 학자들은 신학 사상가로서의 필론의 중요성을 축소하고 그를 단순히 훈계가로만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미국의 학자 H. A. 울프슨은 사상가로서의 필론의 독창성을 입증했다. 특히 필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과 신의 본질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신에 대한 견해에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의 보편적 신에 관한 견해, 즉 신은 불변의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보편적 존재라는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신은 자연법칙을 중지시킬 수 있는 개별적 존재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내세웠다. 창조주인 신은 보조자들을 이용했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만듭시다"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것이 그 증거이다. 필론은 선재(先在)하는 물질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이 물질 역시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필론은 자신의 유대 신학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이데아를 신 자신의 영원한 사고물(思考物)이며 신이 세계를 창조하기에 앞서 먼저 실재 존재로 창조한 것이라고 보았다.

필론은 우주를 로고스에 의해 주재되는 거대한 존재 사슬로 보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서 비롯된 용어인 로고스는 신과 세계 사이의 매개물이다. 그러나 필론은 어떤 때는 로고스를 제2의 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는 로고스라는 용어를 이데아 중의 이데아와 이데아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점에서, 그리고 로고스는 지성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공간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원칙적으로 플라톤으로부터 이탈했다. 그는 로고스를 신이 처음 얻은 아들, 신의 종, 신의 모상(模像), 신 다음 가는 것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앞지른 주장이었다.

신이 인간 안에 심어 놓았고 또 그것을 통해 인간이 신처럼 되는 신의 신비한 사랑에 대한 필론의 설명도 새로운 것이었다.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신을 자신 안에 갖는다는 뜻인 '엔투시아스모스'(enthousiasmos)와 같은 이교(異敎)와 신비 교단의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그러한 용어들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주의 속에는 한 사상가 안에서 신비주의와 율법주의가 결합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결합과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플라톤주의, 특히 〈향연〉의 신비적 개념들과 대중적 신비교단은 유대주의를 유일하게 참된 신비로 내세우려는 필론의 시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필론은 이들 신비 교단의 교리들, 특히 부활의 교리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주요출처이다. 아마도 그는 유대주의에 대한 신비적 표현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유대주의가 신봉자들을 계속 붙잡아두는 데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서도 신비 종교와 경쟁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성서에 대한 축자적(逐字的) 해석을 존중한 점, 성서를 극도로 우의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을 비난한 점, 개종자들을 위한 특수한 입교 의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 등은 그가 본질적으로는 유대주의의 주류에 속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필론이 신비적인 '냉정한 도취'라고 부른 것의 목적은 사람들을 물질 세계로부터 영원 세계로 이끄는 것이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필론도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았으며, 자아로부터의 도피, 신과 세계 사이의 대조, 신에 대한 직접 경험의 갈망 등에 관한 기술에서처럼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에서도, 그는 BC 2세기에 중요성을 띠게 된 이원론적 종교인 영지주의의 많은 것을 선취했다. 그러나 의지의 제한된 자유를 믿은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에피쿠로스 학파는 예외)과는 달리 필론은 인간은 자신의 본성의 법칙들 모두에 반해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필론은 윤리 이론에서 그리스의 철학 문헌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2개의 덕, 즉 종교적 믿음과 인류애를 정의라는 제목 아래 기술했다.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후회가 약점이었으나 그에게는 덕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행복은 덕을 달성하려는 인간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온다. 필론은 정치 이론에서 가장 좋은 정부 형태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결코 우민정치는 아니었다. 그는 우민정치를 최악의 정치형태라고 비난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군중들의 행동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필론에게 민주주의란 특수한 정부 형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정부 형태에서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을 누리는 적절한 질서를 뜻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정부 형태의 최선의 요소들을 구현하는 혼합 정체가 이상적인 정체이다. 실로 역사의 궁극 목적은 전 세계가 민주적 정체하에 단일 국가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