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양성론

실력양성론

[ 實力養成論 ]

요약 일제 식민지배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독립운동의 한 방법론으로, 독립을 위한 역량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력양성론은 국민 계몽과 사회 개조, 신문화 건설의 목표 아래 추진된 운동, 즉 실력양성운동의 논리를 통틀어 가리킨다. 실력양성론은 크게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 1905~1910), 실력양성론(1910년대), 문화운동론(1920년대), 자치운동론(1920년대 중반~1930년대 초반)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05년부터 본격화된 일제의 국권피탈로 많은 지식인은 민족의 실력양성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일제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면서 독립이 최우선의 과제로 대두되고, 민족자결주의나 외교를 통한 독립의 기대 속에 독립운동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민족자결론에 대한 기대가 무산되고, 3·1운동이 좌절되면서 항상 독립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실력양성론이 다시 독립운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실력양성론자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독립을 위한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선(先) 실력양성, 후(後) 독립’을 주장하였다.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 1905~1910)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부터 본격화되었지만, 1904년 서적의 편찬 및 번역을 통한 신교육을 목적으로 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가 단초로 이해된다. 이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이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설립된 신민회(新民會) 역시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으나, 실력양성 외에도 실제 독립전쟁에 나설 준비를 도모하였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은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을 기반으로 한 근대지향적 성격을 가졌다. 신교육, 기업 및 산업 양성(殖産興業) 등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 한 것이다. 나아가 국권 회복을 위한 비타협적 노선을 설정하여 1910년대의 타협적 실력양성운동과 구분된다.

실력양성론(1910년대)

1910년대의 실력양성론은 교육의 보급과 인재 양성, 민족 자본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부터 조선의 발전을 표방하며 산업 발전을 위한 설비를 확충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상품 시장과 원료 확보를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에 1915년 이용우(李用雨)를 중심으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가 조직되어 국내 산업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지되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보급이 확대되었지만, 한국인의 교육을 모두 감당하지 못하였다. 반면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고등학교)와 대학, 사립학교의 보급은 매우 부족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실력양성론자들은 민족 교육의 강조와 학교 설립 증대를 주장하였지만,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의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한편 이 시기 이광수(李光秀) 등은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며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기 위하여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동화주의적 실력양성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문화운동론(1920년대)

민족자결론에 대한 기대가 무산되고, 3·1운동이 좌절되면서 독립을 위한 교육과 산업의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실력양성론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호응을 받았다. 조선인이 하나가 되어 경제 ·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고 구습(舊習)을 개량하자는 문화운동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교육의 육성을 위하여 1922년 이상재(李商在)를 중심으로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가 조직되어 한국인의 민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또한 회사령(會社令)의 철폐와 일본 상품의 관세 철폐로 민족 산업이 위기에 처하자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조직되어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표어를 내걸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펼쳤다. 또한 청년단체를 필두로 금주, 금연, 절약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1920년대의 실력양성론은 조선의 봉건 잔재 청산과 생산력 증대를 통한 현대적 문명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이해된다. 다만 이 시기의 실력양성론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안에서 진행되었기에 비정치적인 성격을 가져 직접적인 독립 투쟁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운동을 환영하였는데, 친일 세력을 이용하여 실력양성운동을 친일 어용적인 운동으로 유도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자치운동론(1920년대 중반~1930년대 초반)

1920년대 초반의 비정치적인 문화운동론이 한계에 봉착하자 1920년대 중반부터 자치운동론이 대두되었다. 정치적인 실력양성운동론으로 자치운동론이 제기된 것이다. 자치운동론은 조선의 보호와 실력양성을 위하여 정치적 발언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독립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자치권의 획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예속화되고 있었던 대자본가와 이들을 대변하는 타협주의자들이 자치운동론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독립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립이 중시되면서 실력양성론은 타협주의로 변질되어 간 것이다. 결국 실력양성론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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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키워 독립한다! 실력양성론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