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설립운동

학교설립운동

[ 學校設立運動 ]

요약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하려던 운동.

3·1운동의 실패 이후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식산 흥업과 교육 진흥을 내세운 실력양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한국인들의 교육열이 고조되었고, 일제는 3면 1개교의 원칙을 세우고 공립학교를 증설하였으나, 입학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사립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실제로 전북 고창이나 충남 대전과 금산 등에서는 민간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사립 보통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지방 면 단위에서 사립학교의 설립을 추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고등보통학교의 경우는 당시 거의 증설이 이루어지지 않아 입학난이 다른 학교보다 심각하였고, 학교 설립 운동 역시 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통영, 부산, 공주, 천안, 진주, 재령, 강릉 등 전국 각지에서 사립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 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기부금의 모금을 허가하지 않는 등 기성회의 활동을 방해하면서 학교 설립 운동은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한편, 학교 설립 운동은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일찍이 1920년 6월 조선교육회 발기회에서 민립대학 설립을 결의한 바 있으며, 1922년 2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면서 대학교육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자, 민립 대학의 설립을 적극 주장한 것이다. 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 현상윤(玄相允), 최규동(崔奎東) 등의 주도로 민립대학 기성 준비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듬해 3월 1,170명의 발기인에 의하여 민립대학 기성회가 창립되었다.

기성회는 구체적인 대학 설립 계획을 수립하고 기금 모금에 들어갔으나, 예상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지방 조직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지방의 부호들이 친일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제 당국의 방해로 모금 활동에 지장을 받았고, 자연재해가 이어지면서 모금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결국 1924년 여름 이후 이 운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된다.

일제 당국 역시 한국인들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일제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무마하기 위하여 관립 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였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참조항목

실력양성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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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 설립을 위한, 학교설립운동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