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조만식

[ 曺晩植 ]

요약 한국 정치가 겸 독립 운동가.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했다.
출생-사망 1883.2.1 ~ 1950
본관 창녕(昌寧)
고당(古堂)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평남 강서(江西)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0)

본관 창녕(昌寧). 호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재학 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있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직하고 3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1923년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崇仁中學)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關西)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이 발발한 뒤 퇴각하는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북한 내무성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살해된 날짜에 대해서는 1950년 10월 15일이라는 설과 1950년 10월 18일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